웰다잉 에세이
이런 제목의 다큐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그것을 알려주마'도 패러디로 따라다녔고. 이 글이 그런 해답이 될 수는 없겠지만, 웰다잉에 대해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
죽음과 죽어감은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결말이다. '알면서 모른 체하기' 게임이 있다면 그 왕좌는 '죽음을 부정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차지할 것이다. 잊고 살다가도 문득 알고 싶어지는 그런 주제가 웰다잉이 아닐까.
한번 이런 질문을 마주해보자. 죽음은 다 나쁘고 무조건 피해야 하는 일인가? 죽음이 이 세상과 지금까지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해왔나 돌이켜 보자. 아니 반대로, 이 세상에 죽음이 없다면 어떻게 될 지를 상상해보는 게 빠르겠다. 폭발적인 인구증가가 찾아올 것이고, 사람들은 거주지와 식량부족에 시달리게 된다. 인구밀도는 교육, 의료, 행정, 산업 모든 인간활동의 근간이다. 그런데 인구가 마냥 적체된다면, 세대교체가 어떻게 되겠는가. 무한한 생명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나태해질 소지가 다분하여, 역으로 삶의 소중함을 최대한 누리지 못하게 한다.
호스피스 고위과정 교육 (지금의 표준교육)을 받을 때의 일이다. 실습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나의 장례식 상상하고 부고돌리기' '관에 누워있다고 생각해보고 소감 적기' 여기에 더불어 죽음의 당위성을 스스로에게 적용하여 찾아오라는 숙제가 있었다. 아니 의대 6년 졸업하고 전공의 전임의 박사과정 다 마친 게 엊그제이고, 이제 좀 커리어를 펼쳐보려는 마당에 뭔 죽음이람, 상상만으로도 이런 억울할 데가 싶었다. 그런데 조금씩 조금씩 시간이 흐르자 말기 환자의 입장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누구나 다 죽음을 받아들이기 싫고, 무섭고, 피하고 싶은 이런 저런 이유가 있을 거라고...
숙제는 분명 당위성 찾기였는데 마음 속으로는 '아직 죽으면 안 될 이유'를 찾고 있었다. 가족들은 어떻게 하라고... 생각조차 차마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동시에 문득 깨달았다. 숙제는 당장 죽음을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니었다. 언젠가, 언젠가라도 너는 너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네 자신이 수용하지 못하면서 말기 환자에게 어떻게 차분히 마지막을 준비하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런 깨달음이었다.
끄적끄적 답안을 적기 시작했다. 그래, 뭐 죽음이 없어서 히포크라테스나 화타같은 명의가 다 살아 있다면 나는 명함도 내밀지 못했을 거고, 또 선배들이 자리를 지키고만 있다면 후배들은 포부를 펴볼 수도 없을테고.. 그 때 인형에게 털모자를 씌우고 조잘대던 딸아이를 보면서, 다른 큰 깨달음이 왔다. 내가 고령에 계속 살아만 있다면 이 아이에게 짐이 되겠구나, 하며 스르륵 집착이 풀렸다.
외래에서도 환자 분들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다. "80, 90넘어서 배우자, 친구, 친척 다 가고 나만 남으면 뭐해요? 따라 가야지.." 그러니 한참 때의 외모와 체력, 그리고 더불어 주위 소중한 관계들을 유지하면서의 영생이라면 모를까, 무조건 죽음을 회피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다. 어떤 밀리언셀러 도서에 따르면, 신체 장기를 리모델링하면서 영원한 젊음을 누리려는 시도들이 엄청난 부를 쌓은 사람들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고, 빠르면 30년 후 실현가능할 지도 모른다고 한다 (호모데우스, 유발 하라리). 그 책은 죽음을 정복하고 없애야 할 대상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기존의 우리들의 지식, 신념, 상식에 전면적으로 낸 도전장이 호기롭다.
하지만 개인적인 소감은, 작가의 도발적인 필력이 현 사고체계의 반론에 치중되어 있는 듯 하다. 소수의 인류가 언젠가 죽음을 극복할지 그렇지 않을 지도 모르는 일이거니와, 그때까지 모두 죽음을 맞아야만 하는 확률을 부정할수 있겠는가. 따라서 나는 "내일 세계의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으련다"를 지지한다.
나이 이야기를 하면 생각하는 분이 있는데, 당시 호스피스 병동엔 33세 환자분이 계셨다. 90세 할아버지 환자도 있었지만 배우자분이 어찌나 매일 슬퍼하셨는지 모른다. 30대 환자분은 선한 인상에 맑은 눈빛으로 차분한 분위기가 대비되어 돋보였었다.
무슨 차이일까? 수백 증례의 호스피스 환자들을 지켜봤지만 마지막을 받아들이는 태도엔 뚜렷한 온도 차이가 존재한다. 이유가 뭘까... 인문학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교양서 철학서적등 죽음에 관련된 책은 대개 섭렵해 온 듯하다. 거기에서 두꺼운 의학교과서가 주지 못한 위안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미리 준비하고 정리하라”거나 “집착을 놓고 주위에 위임한다”는 지침이 있을 뿐, 내가 궁금해하던 개인차에 대한 분석은 없었다.
가까이 지켜 본 환자들에게서는 공통적으로, 학력, 경제력, 사회적 배경과 마지막의 평온함은 무관해 보였다. 아무래도 노인분들이 죽음에 대해 생각도 자주 해보았을 것이고, ‘살만큼 살았다’는 표현으로 죽음에 대한 수용력을 보여주곤 했다. 인격적 성숙도, 라고 나는 부르고 싶다.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자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싯구를 저절로 읊게 되는 분은 정말이지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끔 마주치는 그런 분들은, 등불같은 느낌이었다. 자신의 일생을 정돈하시고, 주위에는 배려라는 온기를 전하고 떠난 분들...회진 후에도 그 분들이 계시던 베드를 쳐다 볼 때가 있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초월한 평온함은, 분명히 현재의 모든 한계를 뛰어넘은 것이었고, 같은 인간으로서 경외감마저 들었다.
웰다잉은 웰리빙의 스펙트럼이다. 충만한 인생을 살고, 자신의 마지막을 그려보고 마음으로 준비한 사람들은 웰다잉을 선물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성인들의 과제가 대개 그렇듯이, 그 누구도 대신 해줄수 없는 일이다.
웰다잉 관련 강의들에서는 흔히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하나는 "오늘이 당신의 마지막 하루라면, 어떻게 보내고 싶은가" 만일 오늘이 마지막 하루라면, 최선을 다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아껴둔 옷을 입고, 가장 맛있는 것을 먹고, 야외로 나가 햇빛을 쬐고 미풍을 쏘이며, 좋은 풍경을 감사하고 싶어질 것이다. 물론 주위에 사랑하는 가족, 친구와 함께.
다른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에게 앞으로 6개월이 남았다고 의사가 말한다. 당신은 이제부터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자신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지금 왜 하지 않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