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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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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리 Aug 17. 2017

번호

  공일공...

  하고 뒤의 번호 8자리를 부르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예전 번호를 말하는 바람에 입이 멈췄다. 휴대폰 번호를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아 자꾸 입에 익어버린 숫자를 불러대는 통에 이런 식으로 입을 닫은 적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오늘은 기필코 새로운 번호부터 부르겠다 마음먹었는데 그 결심은 이렇게 무너지고야 말았다. 거의 10년간 쓰던 번호를 바꾼다는 것은 10년간의 나와 나의 기록들 그리고 그리운 기억들을 바꾸는 것과 같았다. 버릇도 10번이면 습관이라 했는데, 나는 나의 습관을 아니 나의 10년을 하루아침에 바꿔버린 것이다.


  익숙했던 번호들은 금세 낯선 번호로 바뀌고 말았다. 어제까지 다정했던 연인이 이별을 고함으로써 뒤돌아선 남이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이제 나는 그 번호로 포인트를 적립할 수도 누군가에게 나라며 알려줄 수도 '또 연락해'라는 말에 그 낯선 8자리의 번호를 상상할 수도 없었다. 님에 점하나 만 찍으면 남이 된다는데 나는 이 낯선 8자리의 번호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점을 찍어야 할까.


  생각이 너무 많아버리면 이미 계획하고 실행한 일도 마치 충동처럼 되어버린다. 한순간의 고민이 켜켜이 쌓여 어느샌가 나를 훌쩍 뛰어넘은 벽이 되어도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딛기만 하면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바닥엔 그림자와 발자국만이 남을 뿐이었다.

버릇도 10번이면 습관이라는데 생각을 10번, 100번 하면 무엇이 되는 걸까.


  번호판에 손을 대고 기다리던 점원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 번호를 부르지 않고 뭐 하고 있냐는 눈빛이었다. 나는 '잘못 불렀어요, 다시 불러드릴게요.'하고 새로운 번호를 불러주었다. 익숙했고 낯선 번호는 이제는 잘못이 되어 사라지고 낯설고 익숙해야 할 번호는 잘이 되어 조그마한 모니터 안으로 꾸역꾸역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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