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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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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리 Aug 24. 2017

숫자

  놀이터 미끄럼틀 옆 그늘이 진 곳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다가가서 보니 새것처럼 빛나는 500원짜리 동전이 떨어져 있었다. 아마 이곳에서 놀았던 아이의 주머니에서 떨어진 것이려니 했다. 집어 드니 2016년에 만들어진 500원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반짝였구나 했다.


  예전에는 새해가 다가오면 새해의 숫자가 찍힌 동전을 제일 먼저 손에 넣는 일이 가장 큰 기쁨이었다. 보석보다 영롱히 빛나는 동전을 들고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는 일이 새해가 오는 큰 기쁜 이유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숫자를 잊는다는 것은 더 이상 새 동전의 주조 연월에 연연해하지 않는다는 것 이상으로 무언가의 기쁨을 잃는다는 상태가 되는 것이었다.


  제철음식을 챙겨 먹지 않는 것은 이제 1월에 2월에 혹은 7월에 8월에 무엇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 것인지 모르는 것이고, 판에 박힌 일들이 안정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은 서른 살에 마흔 즈음에 무엇인가 하고 싶다는 열정을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의 의미였다. 이제는 편의점에서 담배나 술을 사도 민증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어쩌면 내가 숫자를 잊어버리게 된 것이 바로 내가 그 숫자 자체이기 때문에 혹은 온몸 곳곳에 새겨있어 매일 아침 거울을 볼 때마다 습관처럼 배어버리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집어 든 동전을 원래 있던 자리에 고이 놓았다. 잃어버린 아이가 아니어도 누군가가 더 유용하게 쓰지 않을까 했다.


  아무도 없는 빈 놀이터의 미끄럼틀 옆에는 2016년 산 500원짜리 동전이 이따금 빛을 내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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