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왕이로소이다
"술잔에서 왜 이상한 냄새가 나지?"
M의 말 한마디에 자리에 둘러앉은 모든 이들이 한 번씩 냄새를 맡았다.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먼지 냄새 같은데?"
"잘 모르겠는데?" 잔의 주인도 냄새를 맡고 말했다.
조금 전 소주잔 반 정도 채워진 술을 B가 마셨다.
"아니야. 비린내 같은 냄새가 나는데?" M은 연신 코를 킁킁대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한다.
"내가 입냄새가 난다는 거야? 양치하고 왔고 입냄새 안 나는데?" B가 살짝 웃으며 슬쩍 자리를 떴다.
수북한 그릇을 챙겨간 B가 개수대에서 돌아왔다.
"접시에 기름이 그대로야. 내가 다시 하고 올게." A가 그릇 몇 개를 다시 집어 들고 일어선다.
"왜 보여주는 거야? 앞에 가까이 대고 봐야지. 노안이니까 멀리 떼서 봐야겠다." 설거지를 마친 세 살 밑인 A가 B에게 말한다.
"내 카드가 보여? 조심해야겠네. 내가 눈이 안 좋긴 해. 늙긴 했나 봐." 카드 게임을 하던 B의 대답이 순순하다.
벌컥 문이 젖혀지고 흐느끼는 기척이 뒤따라온다. 조곤조곤 달래는 음성이 간간이 들리고 목이 메는 듯 숨을 들이켜고 말을 내뱉으며 고조되었다 살짝 낮아지는 비슷한 모양의 파동이 무한 재생된다.
대놓고 일어날까? 민망할 A를 생각해서 계속 자는 척할까? 화장실 앞에 매트를 깔고 등을 돌려 누운 B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수시 교차한다.
침대에 누워있던 가장 나이가 많은 K가 먼저 연기를 끝냈다.
"우리 안 자고 있고 잘 수도 없고 하도 들어서 대충 알 것 같아. 그냥 불 켜고 편하게 말해. 남친이 데이트폭력을 했다는 거야?" K가 허리를 세우고 끼어들었다.
"사실 제가 먼저 때리긴 했는데 그래도 남자가 그러는 건 아니죠. 경찰이 하도 많이 와서 이제는 신고도 못해요." 20대 중반까지 운동선수였다는, 남자의 평균 체격과 힘을 능가하는 A가 말한다.
"나도 겪어봐서 잘 알아. 완전히 끝내야 해.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어? 헤어지고 싶어? 헤어질 거야?" K가 되묻는다.
"네. 엄청 여러 번 헤어지려고 했는데 회사로 집으로 쫓아와서 회사도 그만두고 이사도 세 번이나 했어요. 그런데도 안 헤어져줘요." A의 울음과 하소연이 한창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도와주면 돼? 완전히 헤어질 수 있도록 남친이 스토커 짓 못하도록 막아주면 돼?" 쐐기를 박듯 K가 확인한다.
5자 대면이 시작되었다. A, A 남자 친구, A와 술을 마시다 온 G, 바닥에서 자는 척했던 B, 침대에 누어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던 K.
"그동안 여러 번 때렸고 경찰도 여러 번 왔다는데 맞아요?" K가 추궁하자 A 남자 친구가 "네 맞아요." 저항 없이 답한다.
"A가 진심으로 헤어지고 싶어 해요. 헤어지려고 하면 회사에도 찾아가고 집에도 찾아와서 못 헤어졌다는데 또 그럴 거예요?"
"안 그럴게요. 진짜 헤어지고 싶어 하면 헤어져야죠."
"A 집에서 같이 살고 있다고 들었는데 짐 바로 빼고 나갈 수 있겠어요?"
"우선 저도 옮길 곳은 찾아야 해서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언니 거짓말이에요. 짐도 별로 없고 다 내거고 핑계 대고 안 나가려는 거예요. 내가 짐 빼서 밖에 놔둘 테니까 나 없을 때 갖고 가고 다시는 찾아오지 마." K와 피의자의 고분고분한 문답이 오가다 격앙된 A의 목소리가 치고 들어온다.
"헤어진다고 해놓고 짐도 안 빼고 회사로 집으로 찾아오고 가족들에게도 연락하고 했다면서요. 오늘은 증인이 3명이나 있으니 확실히 말해요. 깔끔하게 헤어질 거고 짐도 바로 뺄 거고 앞으로 어떤 연락도 안 할 거예요?"
"A가 진심으로 원하면 그렇게 해야죠."
암막 커튼 틈으로 미세한 빛이 새어드는 사이 A와 A 남자 친구, K가 함께 차를 타고 A의 집으로 갔다.
B가 옆방에서 자고 있는 M에게 두 차례 알리려 갔지만 코를 골며 단단히 잠에 빠져 있어 깨울 수 없었다.
8시쯤 M이 일어나자 B가 밤새 있었던 일을 대략 얘기했다.
"저는 다 아는 얘기예요. 근데 그 언니가 맞고 당하기만 할 사람이 아니잖아요. 근데 왜 안 깨웠어요? 그리고 K는 왜 따라가?"
"A가 데이트폭력이랑 스토커 짓을 너무 불안해해서 언니가 막아준다고 같이 갔어요." B의 말을 들었는지 아닌지 M의 휴대폰은 A에게 연결 중이다.
"나이 들어 보이려고 파마했어요." 단발머리에 푸들 털처럼 곱슬대는 파마를 한 M이 말한다.
40대 초반이지만 사람들이 너무 어리게 봐서 불편하다고 했다. 얼마 전에도 초등학생이 몇 살이냐고 물어서 맞춰보라고 했더니 중학생 같다고 했단다. 까만 단발머리에 탱탱해 보이는 얼굴, 150대 중반의 키를 감안하면 나이보다 어려 보이긴 한다. 위에서 보면 휑하게 빈 가르마가 눈에 들어오지만 애들 눈에는 보이지 않을 테니 학생처럼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너무 말랐는데 살을 찌워보이는 게 어때요?"
"나는 살찌고 싶어서 엄청 노력했잖아요. 지금 내 모습이 너무 좋아요." M이 B에게 말한다.
M은 등산 모임 때 크롭티와 레깅스를 입었다. 몸매에 상관없이 비키니를 입고 크롭티에 레깅스로 스타일링한 외국인은 가끔 봤지만 한국에서는 보기 쉽지 않은 실루엣이다. 원래 크롭티인지 옷이 작아 그렇게 된 건지 스프링 치즈 같은 팔뚝살, 허릿살이 비집고 나왔다. M사이즈 레깅스로 압박한 허벅지와 힙이 경사를 오를 때마다 스판을 찢을 것 같다.
M이 수영복을 입은 걸 본 적이 있다. 흰색 비키니를 입고 걸어오다 주변의 모든 시선이 본인에게 향하는 걸 느꼈는지 집업 래시가드를 포개 입었다. 비엔나소시지 같은 살이 수영복 위에 울퉁불퉁한 곡선을 만들었다.
"B는 왜 레깅스 안 입었어?" M의 레깅스 핏을 보고 고개를 돌린 M의 최애남이 묻는다.
"아들이 싫어해요." 평범한 등산바지를 입은 B가 웃는다.
"아들이 엄마한테 섹시하다고는 안 하지. 잘 어울릴 거 같은데 그냥 입어."
"네 나이에 너 정도 몸매는 드물지. 관리 진짜 잘한 거 인정. 멋있어." 긴팔 래시가드와 치마로 힙을 덮은 워터레깅스를 입은 B에게 M의 최애남이 말했다.
B는 모임에서 딱 한 명, M이 유일하게 소개해줄 만하다는 M의 최애남과 두 번의 데이트를 했다. M의 최애남이 B의 집 근처인 듯한 사진을 보냈다. B의 반응이 없자 전화를 해서 한 시간가량 통화를 하고 일주일 후에는 B의 집 앞으로 찾아왔다. 그날 B에게 사귀자고 했다.
"내가 캠핑장 올 때 치마 입지 말라고 했는데 또 입고 왔네." 1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M이 큰소리로 B에게 인사를 건넨다.
"갈아입을 거예요. 사진 찍고 카페 갔다 오느라 입고 온 거고 바로 갈아입을 거예요" 허리가 잘록한 레몬색 원피스를 입은 B가 재빨리 변명한다.
B는 지난번 캠핑장에 올 때 민소매 롱원피스를 입고 왔다. B를 보자마자 M이 당장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라고 재촉한다. B가 20년 된 정말 편한 옷이라고 재차 말했지만 M의 단호함에 빠르게 승복했다.
"저는 다리가 두꺼워서 바지가 더 불편해요. 운동복 말고는 바지가 거의 없고 원피스가 제일 편해요." 운동복 세트를 입은 B에게 아무도 대꾸하지 않는다.
혼자서 해안사구 산책을 하고 카페도 다녀왔다는 B가 오는 길에 홍게, 광어와 오징어회, 해삼과 멍게를 포장해 왔다. 여름철 회를 절대로 먹지 않는다는 M은 홍게만 2마리 먹고 이후 뭘 먹어도 게 맛이 난다고 찡그렸다.
다음 날 캠핑 사진과 모임후기가 올라왔다. 평소라면 누가 찬조했다고 공치사를 크게 떠드는 M이 B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스티로폼 박스 가득히 쌓여 있던 게와 금징어회, B가 각자에게 선물한 마스크팩과 간식에 대해서 M도 A도 어느 누구도 금기된 듯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틀 후 채팅창에 "늘 따뜻하게 대해 주시고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마움 잊지 않고 부족한 면을 돌아보며 성장하도록 하겠습니다."라는 글을 남기고 B가 방을 나갔다.
인원수가 오천명이 넘는 밴드인데 모임 참석 인원이 적을 때는 5명이 안되고 많아도 10명 남짓이다. M과 A, A 남자 친구 그리고 M의 선택을 받은 몇몇 인원이 고정 멤버이다.
"내가 강퇴시키려고 했는데 K가 탈퇴했잖아. 그 여자 이상한 여자야. 괜히 데이트폭력이니 스토커니 몰아서 따라가더니 별로 한 것도 없이 자기 교회 가야 한다고 해서 A가 기차역까지 태워다 줬대. 그 여자는 교회 가려고 간 거야."
"내가 지난주 등산벙때 B가 참석 누른 거 빼라고 했잖아. 이유를 묻더라. 몰라서 물어? 싫으니까 빠지라는 거지." M의 입에서 피식, 바람이 함께 나왔다.
"B가 산 탈 때 힘든 코스로 가고 싶다고 해서 그럴 거면 나가서 혼자 가라고 했어요." A가 기분 좋은 듯 덧붙인다.
A는 모임의 총무이고 A 남자 친구는 공동리더이고 M은 여전히 리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