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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취한하늘 Dec 20. 2021

역할과 책임의 정리

R&R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영어 약어를 참 많이 만나게 된다. 신입 때는 그런 약어에 익숙해지는 것도 일이다. 혹은 경력이 길어진 후에도 분야를 갈아타거나 새로운 일을 하게 되면 새로운 약어들부터 공부해야 한다.

직장에서 많이 쓰이는 약어 중 하나가 바로 R&R이다. Role & Responsibilities의 약어로, 우리말로 하면 '역할과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R&R이 명확하지 않아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꽤 있다. 직장 생활 5년 정도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하거나 목격했을 만큼 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생각하면, 프로젝트 진행에 필요한 R&R을 잘 정의하고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꽤 많은 문제를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 된다. 이번에는 이 R&R과 관련하여 신경 써야 할 것들을 정리해 보자.


먼저 직무/직책을 기준으로 정의하자


R&R을 처음 정의할 때, 사람을 기준으로 하기보다 직무나 직책을 기준으로 정리하는 것이 좋다. 어떤 작업을 놓고 '김 OO에게 R&R이 있다'라기보다는 '3D 모델러에게 R&R이 있다'라고 정의하는 것이 좋다는 얘기다.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보통 필요한 직무가 먼저 정의되고, 이후 각 직무에 적절한 사람이 배치된다. 따라서, '사람'보다는 '직무'가 프로젝트의 본질과 더 가깝고, 그만큼 변동도 적다. 3D 게임을 만드는 프로젝트에 있어, '3D 모델러 1명과 원화가 2명'이 '김 OO, 이 OO, 박 OO'보다 프로젝트의 인적 구성을 표현하는 데 더 적합할 것이다.

물론, 최종적으로는 어떤 업무를 '누가' 하는지까지 명확하게 정의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전 단계에 먼저 직무를 기준으로 R&R이 정의되어 있는 것이 좋다. 그 작업의 R&R이 어떤 사람에게 부여되는 근거도 결국 '직무'에 있고, R&R을 조정해야 할 때도 직무를 보고 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원이 많지 않은 프로젝트의 경우에는 특히, 한 사람이 두 가지 이상의 직무를 맡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3D 모델링을 하면서 이펙터의 역할도 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때 그 사람이 맡은 어떤 R&R이 어떤 직무와 연관되어 있는지 명확해야 향후 R&R을 조정할 때 혼란을 피할 수 있다.


R&R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을 명확히 하자


직무를 기준으로 R&R을 정의했으면, 그다음에는 역시 사람별로 R&R을 배정해 주어야 한다. 3D 모델러가 1명이면 3D 모델러의 R&R이 곧 그 사람의 R&R일 수 있지만, 모델러가 2명 이상이면 명확히 정리해 주어야 혼선을 피할 수 있다. 그리고 각 인원에게 할당된 R&R을 모두가 알 수 있게 공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프로젝트 구성원에게는 무엇이든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정리된 내용을 전체에게 공유하여 불확실한 부분을 확실히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이 좋다.

모델러도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잘 알고 있고, 원화가, 프로그래머, 기획자들도 각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과정이 불필요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실제로 R&R이 명확한 업무는 대부분 능숙한 구성원들에 의해 알아서 잘 처리된다. 하지만, 업무 중에는 경계선 상에 존재하는 업무들도 있다. 예를 들어, 3D 게임에서 특수 효과가 필요할 때, 프로그래머가 로직을 만들어서 연출을 할 수도 있고, 아티스트가 연출을 다 만들어 놓고 프로그램에서는 진행만 시키게 할 수도 있다. 이런 업무는 양쪽 직무에 모두 R&R이 있을 수 있는데, 프로젝트 현황에 따라 누가 담당할지를 명확히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쪽에 업무가 몰려서 다른 쪽에서 R&R을 가져갈 수도 있고, 여러 가지로 변형이 필요한지, 게임이 구동될 디바이스의 사양이 어떠한지 등에 따라 실제 담당자를 정해야 할 수도 있다.

경계선 상에 있는 업무의 경우 R&R이 명확하지 않으면 서로 미루다가 작업 공백이 생길 수도 있고, 반대로 같은 작업을 두 군데서 하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으니, 프로젝트 효율을 위해서도 주의해야 할 것이다.


권한과 책임은 항상 같이 움직이도록 하자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권한을 가지고 싶어 하면서, 동시에 책임은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싶어 한다. 잘 되면 내 탓, 안 되면 조상 탓을 하는 것이 사람이라서,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어쨌든, 이런 속성 때문에 실제로 권한과 책임이 서로 다른 사람에게 존재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문제가 생기고 조직의 효율이 떨어진다.

책임은 갖지 않고 권한만 가진 사람은 권한을 남용하기 쉽다. 문제가 생겨도 본인이 책임지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권한은 갖지 못하고 책임만 가진 사람은 책임질 상황을 피하려고 한다. 사람은 자기 방어 본능이 강한 편인데, 책임만 가지고 있으면 애초에 책임질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이 자신을 위기로부터 방어하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특히 의사결정자와 실행자의 관계에서 많이 발생한다. 원화가가 그린 그림을 아트 디렉터가 컨펌(게임에 사용하기로 승인하는 것)했다면, 그 그림에 대한 책임은 아트 디렉터가 가져가야 한다. 만약, 컨펌 과정에 프로듀서도 참여했다면 프로듀서도 책임을 같이 가져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림이 문제가 되었을 때 그 책임이 원화가에게 가는 경우가 있다. 물론, 원화가도 책임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좀 더 큰 책임은 그 그림을 컨펌한 사람들에게 있다. 원화가는 자신이 그린 그림이 컨펌받게 하는 것까지의 책임을 가진다. 따라서 컨펌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원화가의 책임을 생각할 수 있는 때라고 할 수 있다.

권한과 책임은 항상 같이 다녀야 한다. 그래야 본래의 의도가 충분히 살아난다. 그래서 R&R로 항상 묶어서 얘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권한을 부여할 때는 그에 따른 책임도 명확히 해두어야 하고, 반대로 책임을 부여할 때는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만큼의 충분한 권한을 같이 부여해야 한다.


의사결정 방식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R&R 중에서 특별히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 의사결정과 관련된 부분이다. 위에서 언급한 컨펌에 대한 부분인데, 이 컨펌 과정 때문에 혼선이 발생하는 경우가 은근히 많이 있다.

프로젝트에 따라 사정이 다르겠지만, 게임 제작 프로젝트의 경우에는 팀장과 디렉터가 따로 있는 경우가 있다. 프로그래밍 팀장과 테크니컬 디렉터가 따로 존재하고, 아트 팀장과 아트 디렉터가 따로 존재하는 식이다. 이럴 때 실무자의 입장에서는 누구에게 컨펌을 받아야 할지 혼란스러울 수 있다. 여기에 모든 것을 총괄하는 프로듀서도 컨펌에 참여하고, 여러 프로젝트에 대해 최종 의사 결정을 진행하는 치프 프로듀서가 있는 경우도 있으며, 회사 대표까지 직접 프로젝트의 결과물들에 대해 컨펌을 진행하면, 컨펌 과정이 굉장히 복잡해질 것이다.

컨펌 과정이 여러 단계로 구성될 필요가 있을 수도 있다. 그래야 하는 사정이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단계가 단순하든 복잡하든, 실무자가 명확히 인지할 수 있게 정리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컨펌을 다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작업해야 하는 걸 나중에 알았을 때만큼 힘이 빠지고 일하기 싫어지는 경우도 흔치 않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의사결정 과정은 순수하게 결과물의 품질을 올리기 위해 구성되어야 한다. 의사결정 과정이 직책자의 위력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야 실무자가 납득할 수 있는 의사결정 과정을 구축할 수 있고, 실제 결과물의 품질도 목표한 바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분쟁 지역


분쟁은 늘 경계선에서 일어난다. 서로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혹은 서로 책임을 미루면서 분쟁이 발생한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느 쪽에 권리와 책임이 있는지가 명확하면 분쟁은 잘 발생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분쟁이 프로젝트 안에서 발생하면, 프로젝트의 성공에 큰 장애물이 된다. 따라서, 권리와 책임이 불분명한 부분을 찾아 그것을 명확히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한번 잘 정리했다고 해도, 여러 가지 이유로 다시 정리가 필요해지는 경우들이 있다. 업무가 몰리는 직무도 시기에 따라 달라지고, 프로젝트 방향성이 크게 변경되기도 하며, 갑작스러운 인력 공백이 생기기도 한다. 따라서, R&R이 모호해진 부분은 없는지, 재조정이 필요한 부분은 없는지도 자주 살펴봐야 한다. 안 그래도 살펴볼 것이 많은데 R&R까지 신경 쓰는 것이 버겁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많이 살피는 만큼 문제를 많이 예방할 수 있는 것이니,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꼼꼼히 관리하도록 하자.


1. 먼저 직무/직책을 기준으로 정리하자

사람보다는 직무/직책을 기준으로 먼저 정리해 놓자.

직무/직책이 프로젝트의 인적 구성을 설명하는 데 더 적합하다.

R&R의 근거도 직무/직책에 존재한다.

2. R&R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을 명확히 하자

어떤 R&R이 현재 누구에게 있는지 명확히 하고, 잘 공유할 필요가 있다.

직무의 경계선에 존재하는 일들은 필요에 따라 어느 직무에든 속할 수 있으므로 현재 누가 맡고 있는지 더 명확히 해야 한다.

경계선에 존재하는 일의 R&R이 명확하지 않으면, 작업의 공백이 생기거나 중복 작업이 생길 수 있다.

3. 권한과 책임은 항상 같이 움직이도록 하자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권한과 더 적은 책임을 가지려고 한다.

권한과 책임이 동일한 사람에게 존재하지 않으면 조직의 효율이 떨어진다.

의사결정자와 실행자의 관계에 있어, 특히 권한과 책임이 동일인에게 있도록 주의하자.

4. 의사결정 방식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의사결정 과정이 모호해서 실무자가 혼란스러워할 때가 있다.

의사결정 과정이 필요에 의해 복잡해지는 경우라도, 실무자에게 명확히 인식되도록 할 필요는 있다.

의사결정 과정은 결과를 좋게 만들기 위한 것이어야지, 직책자의 위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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