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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두부 Dec 27. 2023

인생의 답은 찾지 못했고 그냥 다녀왔어요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기의 시작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봐야 아냐고? 나는 대체로 찍어 먹어봐야 아는 인간이다. 주변에서 뭐라 하든 일단 마음에 두면 입에 넣어보기 전까지는 밤에 잠을 잘 수가 없다. 된장으로 보이는 똥이라서 에퉤퉤 뱉어낼 때도 많다. 작게는 마라 떡볶이부터(내 장이 몹시 싫어했다), 크게는 석사 학위까지(2기까지 하고 그만뒀다).


산티아고 순례길 가보려고,라고 말했더니 주변인 모두가 걱정했다. 진짜? 진짜 갈 거야? 진짜로 한 달 넘게 걷는다고? 그들의 걱정은 매우 상식적이었다. 


산티아고 순례길 시작점인 생장 피드포트부터 도착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는 약 800km이고, 이 거리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왕복하는 거리와 맞먹는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걸어갔다 왔는데 너무 좋더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미친 사람 취급을 할 거면서, 나는 왜 산티아고 순례길에 혹하고 말았는가. 왜 똥인지 된장인지 또 찍어 먹어보러 떠났는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온 사람들의 기록을 많이 읽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마법 같은 경험이었고 그로 인해 인생이 바뀌었다고 감격에 차 있었다. 오래전부터 가졌던 자아 찾기 여행에 대한 환상이 그에 덧붙여져서 어느덧 산티아고 순례길은 요술 지팡이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곳에 가기만 하면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더 나은 모습이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수 없었다. 아무튼 지금 이 꼴보다는 나은 모습이겠거니 싶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다고 해서 나의 성공시대가 시작되지는 않았다. 내 인생은 걷기 전과 후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번쩍이는 깨달음도, 영감도 없었으며 심지어 몸무게조차 그대로였다. 달라진 건 한 가지, 예상보다 더 크게 빵꾸가 난 통장 잔고였다. 잔고를 바라보며 당분간 콩나물밥을 자주 해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길을 걷고 나서 인생이 바뀌었다고 말하는 책들. 모든 짐을 자신의 등에 짊어진 채 전체 코스인 800km를 걸어냈다는 후기들. 그 극적인 이야기들에 압도되어, 한동안 나는 내 여행이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인생의 답 같은 건 찾지 못한 데다가 나 대신 짐을 운반해 주는 서비스인 동키를 신나게 이용했고 버스도 타고 택시도 탔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했다. 이것도 그냥 여행일 뿐인데. 뭘 그렇게 교훈을 얻어와야 해. 그냥 가고 싶었던 곳 다녀왔으면 된 거 아닌가.


그동안 산티아고 순례길 갔다 왔다고 하면 어땠느냐고, 정말 좋았느냐고 기대감에 가득 차 묻는 사람들에게 심드렁하게 대답하기 민망했다. 이젠 대답 대신 이 글 링크를 보내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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