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행정은 이렇게 배웁니다

첫맛은 얼큰한 육개장 국물로

by 보석바

인수인계는 언제나 쉽지 않은 일이다. 물러나는 사람은 이미 마음이 콩밭에 가 있어서 얼른 털고 떠나고 싶어 하고, 새로 들어온 나는 그런 마음을 눈치채며 괜히 미안해진다. 게다가 해보지도 않은 업무를 1시간 만에 숙지해야 하니, 머리가 녹슨 나는 팔로업도 제대로 못 하고 하나씩 포기하게 된다.


그래도 다행인 건, 전임자가 오후에 잠깐 들러 한번 알려주겠다고 했다는 점이다. 아이 때문에 5시에 퇴근해야 하는데 4시에 도착했다. 그런데 마치 오래 일해 익숙한 사람처럼 여기저기 인사를 다니고, 바쁜 부서로 옮겼는지 전화도 계속 와서 정작 인수인계다운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다.


“주말에 나올 일이 있으니 그때 다시 알려줄게요.”


고맙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사실 차라리 주말이 나을지도 몰랐다. 업무에 필요한 사이트만 무려 8개. 처음에는 뭐가 뭔지 몰라 멍해졌지만, 막상 직접 해보니 전임자의 말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이곳은 산업경제팀. 도비, 군비 지원사업은 물론이고, 농민공익수당, 농식품 바우처, 에너지 바우처, 연탄 바우처, 민생회복 소비쿠폰까지 정신없이 굴러간다. 정신은 없지만, 사람들의 삶에 직접 영향을 주는 정책들이 실제로 실행되는 모습을 곁에서 본다는 건 꽤 근사한 일이었다.


그 와중에도 점심은 챙겨야 했다. 집이 차로 10분 거리라 자연스럽게 집밥을 먹곤 했는데, 어느 날 컴퓨터 바탕화면에서 ‘한국인은 밥심’이라는 이름의 폴더를 발견했다. 무심코 열어본 그 폴더 안엔… 놀랍게도!


전임자가 면(面) 단위로 돌아다니며 정리한 맛집 리스트가 들어 있었다. 상호, 대표 메뉴, 별점, 간단한 평가까지. 마치 시골판 미슐랭 가이드 같았다. 그날 이후 나는 ‘고독한 미식가’가 되기로 했다. ‘집에서 밥 먹는다’는 명목 아래 리스트 속 식당들을 하나씩 찾아다니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고독한이 아닌 정겨운 미식가가 되어갔다.



첫 출근 날, 팀원들과 우르르 몰려갔던 육개장집. 프랜차이즈였지만, 다이어트 중이라 국물요리를 끊었던 나에게는 생명수 같은 한 끼였다.


다음은 기간제 친구의 환영식으로 갔던 우동집. 커다란 탕그릇에 듬뿍 담긴 국물, 두툼한 면발 위로 얹힌 부드러운 우겹살 한 점이 속을 깊이 데워줬다.


세 번째는 자매가 운영한다는 백반집. 쟁반 가득 10가지 반찬에 콩나물국이 곁들여져 있었다. 집밥보다 건강하게 먹었던, 단단한 한 끼였다.


그리고 무려 세 번이나 연속으로 간 ‘앨리스 커피’. 미국 서부의 펍 같은 분위기에 놀라고, 김치볶음밥 맛에 두 번 놀랐다. 피자 두 판, 돈가스 한 접시, 그리고 그 흔하디 흔한 김치볶음밥 한 그릇이 유난히 맛있게 느껴졌던 날들. MSG가 아니라 김치로 맛을 낸 이 볶음밥은 피자나 돈가스와 의외로 찰떡궁합이었다.



예전에는 혼자 조용히 다니는 게 좋았는데, 요즘은 달라졌다.


30대 때는 직장에서 이름만 불려도 노이로제에 걸릴 것 같더니, 이제는 민원인이 안 오나 슬쩍 기다리는 내가 되어간다. 예전엔 점심 같이 먹자고 할까 봐 도망 다니기 일쑤였는데, 지금은 누가 밥 사주지 않나 은근히 기대하며 사람들의 눈치를 살핀다.


이게 나이 들며 생기는 변화일까? 아니면, 오랫동안 황량했던 내 인간관계에 이제는 사람을 들이고 싶어진 걸까.


내가 바뀌고 있다. 고독한 미식가에서, 사람을 기다리는 식객으로.

오늘은 또 어떤 맛이, 어떤 사람이, 내 점심을 채워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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