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마지막 달력 한 장이 남았다

by 보석바

한 장의 종이가 떨어져 나가는 순간,

묵혀 둔 감정과 오래된 질문들이

조용히 고개를 든다.



11월이라는 계절


어느새 달력은 마지막 한 장만 남았다.

며칠 전, 바람이 유난히 심했던 날이었다.


민원실 창구에 앉아 출입문이 흔들릴 때마다

쿵, 하고 울리는 소리가 마음을 어지럽히더니

벽에 걸린 농민달력이

휭— 하고 바람에 날아갔다.


그 얇은 종이 한 장이 떨어져 나가는 모습을 보며

문득 실감했다.

정말 올해가 끝나 가고 있구나.


11월은 늘 그렇다.

을씨년스럽고, 내 마음 깊숙한 곳의 먼지를

괜히 건드리는 달.


적응 못 할 것 같던 면사무소의 하루도

어느새 습관처럼 굴러간다.

‘여기는 내 자리가 아니야’라고 버티던 마음도

이제는 ‘주어진 시간만큼만 잘해보자’로

조용히 내려앉았다.


언젠가 기회가 오겠지—

그렇게 나를 다독이며 지내고 있다.



조용한 일상 속의 미세한 흔들림


7월에 받았던 축산 점검 공문도

어느새 제출 기한이 코앞이다.


34곳 중 마지막 농장을 찾아가며

자주 가던 육개장집 뒤편에

젖소 농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보지 못한 채 지나쳐왔던 걸까.


얼룩덜룩한 젖소의 말간 눈이

괜히 예뻐 보이는 날이었다.

찰칵, 몇 장 사진을 찍고

‘이제 이것만 마무리하면 끝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돌아섰다.


조용히 흘러가던 일상.

그래서 더 불안했고,

그래서 더 마음이 흔들렸다.



그리고, 울먹이던 목소리


사촌동생의 결혼식이 다가왔다.

오빠가 일했던 예식장이라

조금은 꺼림칙했지만

좋아하는 둘째 이모의 딸 결혼이라

축하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던 중이었다.


그러다 울먹이는 엄마의 전화가 왔다.

여러 번 들었던 그 목소리다.


“오빠가… 결혼식장 밥값 천만 원을 썼대.

지금 결제해야 한다는데… 어떡하니.”


예식장에서 여러 번 사고를 치고

그만둔 건 알고 있었지만,

사촌동생의 밥값까지 해 먹었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엄마가 형제들 앞에서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그 생각만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계좌번호를 물었다.

그리고 마통에서 천만 원을 보냈다.

그렇게 또 한 번 마음이 무너졌다.



나의 오빠라는 사람이


대체 빚이 얼마나 되는 걸까.


장인·장모와 살던 집도,

우리 부모님 집과 논도

이미 다 넘어갔고,

양가 형제들에게 빌린 돈,

직장에서 건드린 돈까지.


모두 말아먹고 쫓겨나다시피 나온 사람이

나의 오빠라니.


다시는 빌려주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던 나인데

엄마의 당황한 목소리에

나는 또 정신없이 돈을 보냈다.


후회는 늘 같은 모양으로 찾아온다.


늦은 나이에 자리도 못 잡고 흔들리는 내 모습이

문득 진절머리 났고,

‘자리라도 잡았다면 더 보냈을까?’

그 생각에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이 나이에

내 문제가 아니라 가족 문제로

밤잠 설치는 현실이

참 야속했다.


왜 우리 가족은

이렇게 서로를 갉아먹어야 할까.


화나고, 슬프고,

황당하고,

가끔은 내가 내 마음을 모르겠다.


그리고 또 생각한다.

이번 돈은 어떻게 갚아야 할까.

정말 답이 없다.


올해의 마지막 달력 한 장이 남아

벽에 조용히 흔들리는 걸 보며

나는 또 한 번 깊게 숨을 내쉰다.



흔들리는 건 달력이 아니라, 어쩌면 내 마음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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