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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Oct 18. 2023

아들이 집에 가지고 온 것

네가 우리를 떠올렸다는 것 만으로



"엄마, 오늘 나 좀 데리러 올 수 있어?

접시를 하나 받았는데 무거워서 차로 싣고 가야 될 거 같아."


아들 퇴근 시간쯤 카톡이 왔다. 접시라고? 명절 밑이라고 무슨 선물이라도 받았나?

조금 이른 시간. 아들이 반가워할 것 같아 강아지를 차에 싣고 아들이 일하는 레스토랑으로 마중을 나갔다. 사람의 온기가 빠져나간 홀은 이미 어둠 속에서 하루의 고단함을 마무리하고 있었고, 유일하게 조명이 남은 곳은 화장실. 아들의 흔적을 좇는 내게 화장실 너머로 희미한 곡조 하나가 흘러나왔다.


"지금 이 순간, 마법처럼... 날 묶어왔던 사슬을 벗어던진다..."


아, 같이 일하는 형 중에 뮤지컬 전공인 형이 있다고 했지. 직원들은 아침마다 그 형이 레스토랑이 떠나가라 쩌렁쩌렁 불러주는 뮤지컬 라이브를 들으며 레스토랑 오픈을 준비한다고 했다. 그런 훌륭한 형들과 아들은 함께 일하고 있었다. 이어 화장실 청소를 하던 아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강아지가 먼저 발견하고는 달려 나갔다. 아들의 얼굴에서 반가운 웃음이 번졌다.


엄마가 데리러 왔다니까 형들이 먼저 가라고 보내줬다며 아들은 보통 때 보다 일찍 나왔다. 그리고 내민 꾸러미. 뽁뽁이를 걷어보니 칸이 나눠진 양주 안주 접시 두 개와 유리 접시 하나가 포개져 있었다. 한눈에도 새것처럼 보이지 않는, 이가 나간 유리 접시였다.


"이게 뭐야~~? 이걸 왜 받아왔어?"

"받아온 게 아니라, 사장님이 버리신다길래 얼른 나 달라고 했지. 왜? 별로야?"

"푸핫핫, 야~ 이거 양주 안주 담는 그릇이야. 우리 잘 안 쓰는데."

"아깝잖아. 유리니까, 이모도 좋아하실 거 같고 해서."

"이모 요즘 가마 망가져서 작업도 잘 안 하는데. ㅋㅋ"


이야기인즉슨, 사장님이 자기 눈엔 너무 멀쩡해 보이는 그릇을 버린다길래 아깝기도 하고, 유리를 녹여 작업하는 이모(이모는 유리 공예가다) 생각이 나서 냉큼 달라고 했다는 거다. 그리곤 좋아할 줄 알았던 엄마의 반응에 살짝 멋쩍어진 아들은 옆에서 우리의 대화를 가만 엿듣고 있던 강아지를 덜렁 들어 올리더니, 애궂은 털을 쓰다듬었다.  


알바를 시작하고 3주쯤 지났을 땐가. 그날도 아들은 잔뜩 상기된 목소리로 인사를 하더니, 한 손에 들고 있던 꾸러미를 보란 듯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레스토랑 냉동고에서 갓 꺼낸 거대한 고깃덩어리였다. 손님들 용으로 나가고 남은 부위인데, 질긴 부위가 조금 섞여 있긴 해도 스테이크로 구워 먹으면 맛있을 거라며 사장님이 선물로 주셨다고 했다. 그날도 고깃덩어리를 내려놓는 아들이 폼이 너무 의기양양하여 나는 너스레를 떨며 고기를 녹이고 시즈닝을 뿌려 스테이크를 구웠더랬다.


우리 식구들은 모두 먹는 데 별로 관심이 없다.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 나는 고기에 대해 요령이 별로 없어서 늘 어떻게 구워도 실패하지 않는 특등급만 사서 굽는다. 그러니, 그날 군데군데 심지가 박혀 꽤 질길 법한 스테이크가 그렇게 맛있을 리 없었건만, 아들은 연신 "맛있다"며 감탄 했다. 자기가 벌어온 고기였으니, 맛있을 수 밖에! 


그런 아들을 보며 뜻밖에 우리 시대 아버지들이 떠올랐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귀가하던 그들의 한쪽 손에 들려있던 풀빵이며 귤 봉지 따위. 지금도 어디서 공짜로 얻었다며 자식 집에 들를 때마다 한 손에 들고 들어오시는 이 나간 화분이며 액자 따위. 너무 하찮아서 무시되거나 자식들의 핀잔이나 듣고 곧 무용지물이 될 운명의 그것. 하지만 그가 그 순간 가족을 떠올렸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그런 것들을.


그러니까 네가 이걸 보며 그때 우리를 떠올렸다는 거지?


아침에 아들이 가져온 이 나간 접시를 닦으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왠지 뭉클함이 복받쳤다. 고단한 어른의 세계에 들어선 아들이 짠하기도 귀엽기도 했다. 소파에서 꼬그리고 자는 아들을 뒤에서 꼬옥 안아주었다.


실로 오랜만의 허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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