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비지원 무료 교육생 선발 과정에 등록하며
바라던 것들은 늘 왜 예상치 못한 순간과 방식으로 오는 건지.
아침에 e-알리미로 공문이 날아왔다.
'2023년도 12월 졸업생 과정 국비무료교육생 선발안내.'
1. [풀스택] 클라우드 기반의 웹&앱 개발자 취업연계 부트캠프(자바, 도커, 보안)
2. [인공지능] ALoT를 이용한 빅데이터 분석 산업솔루션 개발 취업연계 부트캠프.
3. [국가기간전략사업] 게임콘텐츠 제작 과정(기획, 그래픽, 프로그래밍)
이런 안내문을 한두 번 받아본 것도 아니고, 고2 때부터 일반고 대상 영상 편집 같은 국비지원훈련과정에 신청을 해 본 적도 있었다. 그때도 아들은 형식적으로 줌을 켜놓고 졸거나 시간 때우기를 하곤 해서 "내가 다시는 너한테~~~" 라며 부르짖게 했지만. 그렇다고 꺾일 에미도 아니다. ㅎㅎ
알바 다닌 지 두 달쯤 지났을 때 그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알바를 마치고 돌아온 아들은 오늘도 멀쩡하게 일하던 알바생 하나가 그만두었다고, 왜 그렇게 꾸준히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며 의아해했다. 이때다 싶어 나는 알바의 속성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네가 지금은 자유도 만끽하고 원하는 시간만 일해도 다른 정규직 초봉보다 훨씬 많이 받는다고 좋아하겠지만, 알바는 시간이 지나며 커리어와 연봉이 쌓이는 것이 아니라고. 함께 일하는 형님들을 보라고. 다들 자신이 원하는 목표가 있고, 알바는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단일 뿐이라고. 똑같은 시간 알바를 한다고 하지만 알바가 목표인 너와 알바가 수단인 형님들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가는 것이라고.
그때 슬쩍, 너도 알바를 하면서 일주일에 2-3일 정도 영상 편집이나 게임콘텐츠 제작 과정 등을 들으며 미래를 준비해 보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던 거다. 실제로 프로모션 기간 중 등록하면 학원비는 한 달에 몇십만 원 밖에 안 들었다. 중고등 학교 내내 영수 학원에 들였던 학원비를 생각하면 직업 훈련 학원비는 껌값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때도 아들은 완강했다. 자기는 알바만 하다 이 곳에 뼈를 묻겠다고.
그러니 내가 학교 공문을 받은 아침에 무심코 아들에게 국비지원 과정에 대한 말을 흘렸을 때. 내가 아들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진실이다. 더 놀라운 것은, 내가 정말 아무런 의도 없이 덧붙인 아래와 같은 말에 아들의 결심이 흔들렸다는 사실!
"OO야. 이거 교육비 지원이 전액 무료래. 게다가 열심히 공부하면 훈련장려금도 준대~~ 꺅~ 공부만 해도 한 달에 70만 원도 넘게 준다는데? 이게 말이 돼?"
학교 갈 준비에 바빴던 아들은 별 감흥 없이 "생각해 볼게"라며 서둘러 출석도장을 찍으러 학교로 향했다. 하지만 30분도 안 돼서 집에 돌아온 아들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나 아까 말한 직업훈련 받을래."
갑자기? 대체 왜? 이번엔 내가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아예 거들떠도 보지 않던 배움에 대한 욕구가 갑자기 솟구친 이유가, 내심 좋으면서도 이해되지 않았다. 아들이 관심을 보이자 나는 재빨리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고 이웃에 관련 교육기관에 대해 뭔가 정보라도 얻을 수 있을까 하여 수소문을 해 보았다. 담임선생님께도 아침에 이러저러한 공문을 받았는데, 우리 아들이 해당이 되는 것인지, 신청할 때 필요한 성적이나 서류는 필요 없는지 여쭤 보았다. 하지만 선생님 조차도 이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다고 하셨다. 고3이 대학입시를 앞두고 이렇게 직업훈련으로 방향을 트는 경우 자체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차여차 하여 아들을 일찌감치 특성화 고등학교에 보낸 사촌에게 물어보니, 보통 특성화 고등학생들이 고3 1학기 때 실무를 배우기 위해 거쳐가는 6개월 과정과 비슷한 커리큘럼 같다고 했다. 사촌의 아들은 그 과정을 듣고 지금 취직을 해서 회사에 잘 다니고 있었다.
공문에는 이 6개월 과정만 듣고 나서 바로 취업도 가능하다고 쓰여 있었다. 실제로 91%의 수강생이 바로 취업을 했으며, 작년 전국 교육 기관 중 1등을 해서 올해에 지원을 많이 받았다고. 삼성 전자 디렉터 개발자 출신의 강사님이 강의를 해주고, 비전공자도 판교 중소기업에 면접 기회를 받을 수 있도록 연계되어 있어서, IT 분야의 성지인 판교에 고소득 직무로 취업할 수 있다고도 했다. 대학에 가지 않아도, 단 6개월 만에 이렇게 좋은 교육을 받고 취업을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수강생이 성실하고 열심히 하는 한'이라는 조건과, '가장 잘된 케이스'를 홍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고도 너무 설계가 좋아 처음으로 내가 낸 세금이 아깝지 않았다.
좀 더 확실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그 길로 바로 상담 약속을 잡고 아들과 교육기관을 찾았다. 가는 차 안에서 아들에게 물었다. 몇 주 만에 갑자기 교육을 받겠다고 마음이 바뀐 이유가 무엇인지, 너무 궁금하다고. 아들은 무심하게 말했다.
"그냥 취업이 하고 싶어 졌어."
이제와 대학입시는 자신이 없어, 알바나 착실히 하며 살고 싶다고 했던 아들이었다. 알바를 착실하게 해서 정규직이 되면 몇 년 열심히 돈을 모으고 싶다고 했다. 군대에 가서 받은 돈을 합치면 제대 후 뭔가 작은 사업이라도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했던. 그 아들이 갑자기 프로그래머에 도전해 보겠다고 했다. 그때 알았다. 몇 주 전 제안에는 전혀 움직여지지 않았던 아들이 왜 아침의 제안에 마음이 바뀌었는지. 바로 무료. 수업료가 전액 무료이기 때문이었다.
나도 그랬다. 아들들이 조금 크고, 또래 엄마들과 몇 년 독서모임을 했을 때. 다시 공부가 하고 싶었다. <내 이름은 빨강>을 읽고 나선 페르시아어를 배워 우리나라 민화풍을 접목한 캘리그래피 스타일의 세밀화를 그려 보고 싶었다. 한나 아렌트를 알고 나선 아우구스티누스와 하이데거를 제대로 공부해 정치철학을 파보고도 싶었다. 김상욱의 물리학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땐 왜 나는 그동안 너무 크거나 너무 작아 보이지 않은 세계에 대해서 일찌감치 눈뜨지 못했을까, 의아했다. 양자역학을 공부해서 가롯유다와 자유의지의 문제를 설명해 보고 싶었다.
남편에게 다시 공부하고 싶다고 정식으로 부탁했다면, 남편은 분명 열심히 해보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자신이 없었다. 제대로 공부할 자신이. 남편이 어떻게 벌어오는 돈인데, 그 돈을 내게 투자하면, 그만큼 아웃풋을 내야 했다. 나는 그 기대에 부합할 자신이 없었다.
이것이 아들이 나의 유료 교육 과정에 대해 거절하고, 무료 교육 과정에 도전해 보겠다고 결심한 이유다. 나와 아들은 그렇게 매사 자신이 없는 것도 똑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