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꿨다. 대궐 같은 한옥집에 손님이 찾아왔는데 그중 갓난아기가 오줌을 싸서 온 대청마루가 다 젖었다. 당황한 나는 오줌을 닦다가 손님들에게 불같이 화를 냈고,그 화가 집 뒷마당에 옮겨 붙어(?) 들판이 시뻘겋게 타올랐다. 그 불은 들판을 타고 하늘까지 옮겨 붙었고(?) 그 불이 노을이 되어 온 하늘이 빨갛게 물드는 것을 감탄하며 바라보다 꿈이 끝났다.
일어나자마자 '별 희한한 꿈이 다 있네' 싶었다. 그러나 개꿈으로 넘기기엔장면이 너무 생생하여 눈도 제대로 못 뜬 채로 폰을 집어 들고선 꿈해몽을 찾아보았다. 손님에게 화내는 꿈(하는 일과 사업의 번창), 아기가 오줌을 넘치도록 싸는 꿈 (힘든 시기가 지나가고 희망하던 날이 옴), 노을이 지는 꿈 (집안이 안정되고 큰 경사가 생길 징조)이라고 나왔다. '세상에... 드디어 내 삶에도 볕이 들려나 봐... 어떻게 해!!!!!!!'
살면서 처음 꿔보는 길몽에 나는 호들갑을 떨며자고 있는 남편을 흔들어 깨웠다. '오빠!! 나 대박꿈꿨어!!' 내 등쌀을 못 이긴 남편은 아침 댓바람부터 나를 싣고 복권명당으로 향해야 했다. 그러나 즉석에서 긁은 만원 어치의 복권은 천 원짜리 한 장으로 돌아왔고, 2만 원을 주고 산 로또는휴짓조각이 됐다. 내심 큰 기대를 품었던 나는 꽝이 적힌 복권 한 뭉치를 버리면서 남편과 '잠시라도 행복했으니 됐다'고 깔깔 웃었다.
그날 복권방에서 나온 우리는 근처에 살고 있는 동생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하게 동생이 임시보호하던 강아지 한 마리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그 강아지가 우리 부부에게 가져다줄 것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날 그렇게 우리 집에는 일확천금 대신 강아지 한 마리가 굴러 들어왔다.
지난 글에 나왔다시피(1편 '세상에 나쁜개는 없다'를 먼저 읽어보시라) 그 강아지는 우리와 함께 2달을 살다가 새 가족을 만나 떠났다. 떠나기 전 2달 동안 나와 남편은 마치 아이를 키우듯이 강아지를 돌보았다.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가르쳐주고 간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뭉치를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알지 못했을 수많은 것들을 뭉치로부터 배웠다.
강아지가 가르쳐준 것들
뭉치에게 받은 첫 번째 선물은 '존재가 주는 위안'이었다. 그 당시 남편은 1년 간 준비한 시험에 떨어져 크게 낙심한 상태였다. 내가 출근하고 나면 남편은 주로 혼자남아 시간을 보냈는데, 때마침 찾아온 뭉치로 인해 뜻밖의 동료를 얻었다. 남편은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하기 위해 집 밖을 나섰고 독박육견을 하며 하루를 보냈다. 쉴 틈을 주지 않고 정신을 뺏는 뭉치 덕분에 남편은 자연스레 좌절감과 우울감에서 벗어나 활기를 되찾았다.
무엇보다 뭉치가 남편에게 보여주는 무조건적인 신뢰와 사랑은 남편으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로운지 깨닫게 해 줬다. 온전히 내게 의지하는 생명 혹은 내가 세상에 전부인 존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크고 강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기와 함께 할 때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하는 뭉치의 모습을 보면서 남편은 무너진 자존감을 회복하고 차차 기운을 차려나갔다.
한 존재가 가지는 생명의 무게
또한 뭉치는 우리에게 '간접적 육아체험'의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외출을 하기 위해 바리바리 짐을 챙기고, 외출 후 돌아와 뭉치를 씻기고 닦일 때마다 마치 2살짜리 아이를 키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뭉치를 돌보면서 애와 개가 참 닮은 점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는데, 무한반복을 좋아해 극한의 노동강도를 준다는 것과 우리에게 무한한 사랑을 요구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모든 생명은 키우는데 품이 참 많이 든다는 걸 알게 됐다.
또 동물이든 사람이든 그 존재를 온전히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맘과 정성을 쏟아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여러 유기견들을 지켜보면서 발달 과정에서 꼭 필요한 단계를 빠뜨리면 이후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과, 중요한 시기에 겪은 상처가 한 존재를 철저히 망가뜨릴 수 있다는 걸 경험했다. 그에 반해 사랑받고 자란 개들이 가진 건강함(예를 들어 믿는 구석이 있는 듯한 당당함과 상대를 대하는 안정적인 자세와 태도 등)에 감탄하기도 했다.
그것은 단순히 견종이나 주인의 재력 차이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태어나서부터 약 1년,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중요한 것들을 배울 결정적인 시기에 주인으로부터 사랑받으면서 갖게 된 근원적인 존재감에 가까웠다. 그래서 나는 한 생명을 키우겠다고 결심하기 전에 '책임져야 할 생명의 무게'에 대해 숙고해야하며, 과하다 싶을 만큼 충분한 준비와 각오를 한 뒤에 비로소 맞이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애나 개나 껌딱지인 건 매 한가지이다
생명을 책임 질 결심
뭉치가 가져다준 가장 큰 선물은 '부모가 될 결심'을 하게 해 준 것이었다. 뭉치는 우리에게 아기에 대한 마음을 갖게 만들어 줬는데, 우리로 인해 행복해하는 뭉치의 표정을 볼 때마다 '개가 이럴진대 내 아이가 생기면 어떨까?'라는 생각과 함께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우리는 둘이서 느꼈던 행복들을 뭉치와 함께 배로 누리면서, 처음으로 우리 외에 다른 존재와 함께 누릴 기쁨을 기대하게 됐다.
사실 어려서부터 가난했고, 지금도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지 못했던 우리는 결혼 후에도 선뜻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뭉치로 인해 우리는 참 사랑이 많고 꽤 좋은 양육자라는 것을 알게 됐고, 그 깨달음은 우리가 뭉치에게만큼이나 아이에게도 '좋은 존재가 되어줄 수 있다는 믿음'과 '생각보다 괜찮은 부모가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게 했다.
뭉치의 임시보호 종료기간이 가까워지면서 '뭉치를 키울지 말지'를 놓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뭉치가 온 뒤 삶이 완전히 변하는 것을 경험했기에 추후에 생기게 될 여러 문제들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개를 키우기 위해 아기를 포기할 수는 없었기에, 우리는 만일의 상황을 위해 뭉치를 새 가족에게 보내주기로 결심했다. 뭉치로 인해 선택의 기로에 섰던 우리는 나중으로 미뤄뒀던 중요한 문제들을 더 또렷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뭉치가 준 마지막 선물은 '반려가족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이다. 뭉치를 데려올 즈음하여 우연히 집사클럽이라는 모임에 가입하게 되었는데, 그곳에 모인 사람들과 함께 각자의 반려묘 & 견에 관한 작업을 시작했다. 나는 키우고 있던 두 냥이들의 묘생사와 뭉치의 견생사를 담은 글을 바탕으로 꾸준히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리고 그렇게 글과 그림을 엮어 만든 책이 세상에 나왔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그 책을 완성했을 당시 뭉치는 내 곁에 없었다. 그러나 책 속의 뭉치는 생생히 살아 숨쉬며 여전히 나의 가족으로 남아 있다. 나는 내 손으로 그린 뭉치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뭉치에게 '첫 책을 안겨주어 고맙다'고 인사했다. 흔히들 책을 쓰는 과정을 아이를 낳는 과정에 비유하곤 한다. 그래서 어쩌면 뭉치가 오던 날 꿨던 그 엄청난 꿈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준 태몽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뭉치 대신 선택한 나의 아이가 이 세상에 언제 즘 존재하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내 생의 첫 책을 만들어주고, 우리로 하여금 새 가족을 받아들일 마음을 먹게 한 뭉치는 일확천금보다 귀한 복덩이임이 틀림없다. 여전히 우리 부부는 가끔 뭉치 이야기를 한다. 잘 지내고 있을까, 뭉치도 우리 생각을 할까 하고. 우리 생의 몫으로 왔던 첫번째 강아지 뭉치에게 이제서나마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