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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잃고, 다시 찾기까지

내 몸 사용 보고서 4

20대 후반, 몸을 어느 정도 회복하자마자 처음으로 도전한 것은 여행이었다. 30살이 다 되어가도록 한 번도 외국에 가보지 못했던 나는 큰 마음을 먹고 해외여행을 떠났다. 처음으로 경험한 해외여행은 나를 한 순간에 매료시켰다. 고작 캐리어를 끌고 열흘 간의 태국 자유여행을 다녀온 것이 전부였던 초보 여행자는 호기롭게 목표를 '세계 배낭여행'으로 잡고 다음 여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캐리어를 끌고 관광지를 돌아다니는 여행을 하기 위해서도 어느 정도의 체력이 요구된다. (고작 열흘 간의 여행 뒤에 2주 가까이를 앓아누워있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무거운 배낭을 메고 장기간 돌아다니는 일정을 소화해내기 위해서는 웬만한 사람들보다 강한 체력이 필요했다. 여행은 내가 운동을 지속시키고 건강을 회복해야 할 동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나는 처음으로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라 '행복해지기 위해서' 운동을 시작했다.  




여행과 건강의 상관관계

여행을 다니는 내내 피트니스 센터가 존재하는 호텔에 묵지 않는 이상 헬스장에서 운동을 지속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여행을 하면서도 지속 가능한 운동을 찾아야 했고 그렇게 찾은 것이 요가였다. 집 근처 요가원을 찾아 등록한 뒤로 매일 새벽을 깨워 요가를 했다. 새벽 5시, 아직 눈도 채 뜨지 못한 상태로 비몽사몽 간에 시작한 수련이 사바사나로 끝날 때 즈음이면 온 정신이 명료하게 맑아졌다. 요가는 이 세상 어디서든 내 몸만큼의 바닥이 허락되는 한 언제든 할 수 있는 운동이었다.


첫 번째 배낭여행이었던 동남아 일주를 하면서 들렀던 여러 국가들에서는 어렵지 않게 요가원을 찾아볼 수 있었다. 숲 속 어딘가와 바닷가 어딘가. 혹은 관광지에서 조금 벗어난 고즈넉한 곳에 자리 잡은 요가원에는 전 세계 각 국에서 온 여행자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어 그들만의 수행을 이어나갔다. 나 또한 그들 사이에 조용히 자리 잡고서 여행을 지속하기 위한 생존 운동을 이어나갔다. 요가는 내 몸을 들여다보며 또 다른 세상으로의 여행을 가능하게 만들어주었다.


요가 초보들이 꼭 이런 인증샷을 찍는다

내가 첫 여행지인 태국에 흠뻑 빠진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좋아해 마지않는 여름 날씨, 맛있는 음식, 저렴한 가격과 친절한 사람들까지... 그러나 내가 그곳에 여러 번 방문하며 오랜 시간을 머문 것에는 '타이 마사지'의 영향이 가장 크다. 여행을 하는 동안 장시간의 이동이나 불편한 잠자리, 배낭의 무게 등의 변수들은 근골격계 환자인 나에게 버겁게 느껴졌다. 나는 그럴 때마다 인근의 마사지샵을 찾아 는 이틀에 한번, 많게는 하루에 2-3번까지도 마사지를 받았다.


내가 그곳을 찾은 것은 단순히 스파에서 받는 마사지가 주는 심적인 이완이나 만족감 같은 것을 얻기 위함이 아니었다. 전문 마사지사정성을 다해 해주는 마사지가 굳은 근육과 막힌 혈자리를 자극하여 온몸의 순환을 도와주었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척추 분절 하나하나를 풀어주는 동작들이 긴장과 통증에 갇힌 내 몸을 자유롭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곳에서 단순한 마사지를 넘어 치유에 가까운 무언가를 얻어오곤 했다.


'주마야독'하던 타이 마사지 스쿨 최고의 모범생

몇 번의 태국여행을 통해 마사지에 관심을 갖게 된 이후, 나는 직접 마사지 스쿨에 등록해 타이마사지를 배웠다. 스스로의 몸을 알기 위해 그리고 내가 느꼈던 평안과 치유를 다른 이들과 나누기 위해, 나는 며칠 간 하루 종일 진행되는 수업을 들으며 어느 누구보다 진지하고 열성적인 자세로 타이마사지를 배웠다. 그리고 여행을 하는 동안 함께하는 여행자들은 물론, 한국에 돌아온 뒤 내 주변 사람들에게도 내가 배운 마사지를 전해주며 그들의 건강상담을 자처하곤 했다.


단언컨대 내가 30살에 동남아 일주 배낭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5할이 요가요, 5할이 마사지 덕분이었다. 그이 없는 여행은 상상할 수 없기에 내 생애 '배낭여행'이라는 가장 다이나믹한 추억들을 만들어준 그 둘에게 참 감사하다. 덧붙여 그 여행을 허락해준 나의 몸에게 정말 고맙다. 여행을 하기 위해 건강해지고 싶었던 나는, 결국 '환자'에서 벗어나 어엿한 '여행자'가 될 수 있었다.


여행으로 얻은 것을 여행으로 잃다

2년 전 결혼한 우리 부부는 신혼여행으로 100일짜리 배낭여행을 계획했었다. 그 당시 첫 번째 국가였던 네팔에서 짧게나마 히말라야 트레킹을 시도할 만큼 나 체력이 올라왔었고, 처음으로 도전한 4박 5일간의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면서 신랑에게 다음번에는 15박짜리 ABC코스에 도전하자고 약속까지 했었다. 그러나 (나의 이전 브런치 글을 읽은 이들이라면 알고 있겠지만) 참으로 약속하게도 우리의 여행은 2번째 국가에서 당한 교통사고와 함께 끝이 났다.


그 당시의 상태를 요약해보자면 신랑은 갈비뼈 4대가 골절되었고 오른쪽 팔꿈치의 관절이 탈골 후 골절되었었다. 나의 경우 왼쪽 다리의 고관절이 탈구되면서 골반근육과 왼쪽 무릎 연골이 파열되었으며, 오른팔 뼈 2개가 모두 분쇄 골절되고 오른 발목과 정강이 조직이 괴사 되었다. 또한 임상적 추이었지만 차량 간 정면충돌로 인해 척추 전체의 굴곡이 흐트러지고 경직되어 장기간의 후유증이 예상된다는 의사 소견을 받았다.


오랜만에 찾아본 사고 당시 사진. 잊고있던 모습에 가슴이 철렁했다.

그 사고로 인해 우리 두 사람 모두 현지 병원에서 전신마취를 하고 뼈에 철심을 박는 수술을 했고, 1달간 오른팔에 통깁스를 하고 지냈다. 나는 탈골되었던 고관절의 붓기와 통증으로 1달간 혼자서 거동을 하지 못했으며, 1달 뒤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인천공항에서 바로 인근 병원으로 이송되어 다시 2주 간 입원 치료를 받았다. 이후 깁스로 굳어진 관절을 풀고 약해진 근육을 단련하기까지 1달, 다시 철심을 제거하고 원래의 기능을 회복하기까지 또 반년의 시간이 걸렸다. 사고는 찰나였지만 여파는 길었다.


그 한 번의 사고는 내게 많은 것을 앗아갔다. 계획했던 혼여행과 낭만 넘치는 신혼생활뿐만 아니라 사고를 처리하는데 들었던 무수한 비용과 시간, 그리고 모든 일상이 사라졌다. 그 많은 것들 중 무엇보다 안타깝고 속상했던 것은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던 7년여의 시간이 무색할 만큼 내 몸 상태가 다시 나락으로 곤두박질쳐졌다는 사실이었다. 사고 이후 마치 7년 전 환자였던 때로 돌아가버린 몸을 마주하며 나의 마음은 몸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여행이 가져다준 건강을, 또 다른 여행이 가져가 버렸다.


다시 시작된 치료의 여정

퇴원 후 집 근처 병원에서 본격적인 재활치료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치료는 그 뒤로 1년 반 가까이 이어졌다. 일주일에 2번, 1회에 2시간씩 굳어있는 근육을 손으로 짓이겨 가며 풀어주는 도수치료도, 전신에 기계를 주렁주렁 달고 온갖 열과 광선들을 몸으로 쏘아대는 물리치료도 정말 징글징글하리만큼 받았다. 그렇게 2019년 중순 사고 이후부터 2020년 말 마지막 철심제거 수술을 끝낼 때까지 우리 부부가 1년 반 동안 각종 치료를 위해 쏟아부은 돈과 시간은 차마 입에 담고 싶지 않을 만큼 어마 무시하다.


1년 여 간의 재활치료를 마치고 환자 티를 벗자마자 나는 직장을 구하기 위해 고시생활을 시작했다. 겨우 일으켜 세운 척추와 골반이 감당하기에는 하루 종일 앉아있는 것이 버거웠지만, 병원비로 날린 돈을 메꾸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만 했다. 나는 통증에 몸부림치는 몸을 어르고 달래어 가며 1년 가까이 공부를 이어 나갔다. 그리고 공부를 하는 1년 동안 내 몸은 줄곧 비명을 질러댔다. 

1년 간의 공부를 끝낸 기념으로 철심과 함께 디스크도 함께 뽑아버렸다....

시험에 합격하고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병원을 찾았다. 공부를 하는 동안 방치해둔 몸이 악화된 탓이었다. 검사 결과 디스크가 삐져나와 신경을 누르고 있었고, 통증을 없애기 위해서는 신경을 도려내는 시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다행히 시술은 효과적이었고 1년 간 나를 지독하게 괴롭히던 저릿한 방사통 사라졌다. 통증이 줄어든 것을 느꼈던 그날, 나는 사고 후 처음으로 다시 몸이 나아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갖게 되었다.


퇴원을 하던 날 의사에게 다시 건강해질 수 있 물었다. 그는 환자를 크게 치료필요 환자군과 조금씩 운동이 가능한 재활군, 그리고 일반적 운동가능 정상군으로 나눌 수 있다며, 비록 나는 아직 환자지만 꾸준히 치료를 받으면 재활군을 넘어 정상으로 거듭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언제가 될지 얼마나 나아질 수 있을지 끝을 알 수 없는 여정이었지만, 나는 다시 한번 건강해져 보기로 결심했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10주년을 축하합니다)

올해 우리 부부가 서로를 만난 지 10년이 되는 해이다. 그리고 1편에서 언급했듯이 내 몸이 아픈지 10년째 되는 해이기도 하다. 나는 끝나지 않는 지긋지긋한 환자 생활을 지속하며 10년 간 아파왔던 나에게, 그리고 그 10년을 버텨내 준 내 몸에게 10주년을 맞아 무언가를 선물해주고 싶었다. 


운동치료를 시작하던 날 나는 신랑에게 다가오는 10주년 기념일에 바디 프로필을 찍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곧 사진을 찍으러 스튜디오로 향한다. 징한 시간을 버텨낸 우리들을 기념하며 몇 달 간 열심히 건강하게 만든 몸을 기록으로 남겨보려 한다. 비록 누군가의 바디 프로필처럼 어마어마한 근육질의 몸은 아니겠지만 그 몸에는 건강을 되찾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있을 것이다. 

건강을 향한 험난한 여정이 느껴지는가 (참고로 운동 전- 중 - 후 이다)

지난 6개월 간 병원 부속 재활센터에 등록해 치료사에게 PT를 받으며 운동을 이어왔다. 정상에 못 미치는 근골격 상태라 격한 운동은 할 수 없었지만 약해진 근육을 단단히 만들면서 차근히 무너진 몸을 다시 세워 올렸다. 가끔 숨이 차고 땀이 나게 몸을 움직인 날이면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무기력에 사로잡혀 생의 의욕을 잃은 이후,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조금이라도 무리를 하는 날에는 통증이 온몸 구석구석을 들쑤셨지만, 그럼에도 건강해질 수 있다는 기대감이 나를 계속해서 움직이게 만들었다. 


사고의 충격은 생각보다 강해서 우리의 척추와 골반을 제멋대로 어그러뜨려놓았다. 길이부터 각도까지 이리저리 어긋나 있는 사지육신을 다시 짜 맞추기 위해 내가 지난 시간 동안 치료실 배드 위에서 얼마나 울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후유증이 심한 교통사고 특성상 사고를 당한 지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온몸 구석구석이 시도 때도 없이 결리고 욱씬댄다. 그리고 날이 흐리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이 귀신같이 다친 부위들만 골라가며 다. 덕분에 신랑과 나는 궂은날이면 서로의 어를 주물러주는 30대의 노부부가 되었.


이제는 정말로 건강해지고 싶다. 이제 더는 아픔을 견뎌내며 마지못해 사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고 생기 넘치게 살고 싶다. 굶어가며 만드는 말라비틀어진 날씬한 몸이 아닌, 건강한 것을 먹어가며 튼튼하고 강인한 몸으로 키워가고 싶다. 나이가 들어서도 무너지지 않을 몸을 만들기 위해서, 통증으로부터 자유로운 몸이 되기 위해 신랑과 함께 꾸준히 건강한 삶을 만들어 보려 한다. 


지금으로부터 10년의 시간이 더 흐른 뒤 40대가 된 우리 부부가 더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20주년을 기념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탄탄한 근육질의 몸으로 건강미 넘치게 활짝 웃을 우리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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