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면....
멜로물이라고는 하지만 원작 자체가 상당히 철학적이며, 느린 피치의 잔잔한 전개로 인해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영화.... 더구나 너무 자주 등장하는 플래시백도 이해를 어렵게 만드는 조금은 난해한 영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심오한 영화가 사실 토크를 하기에는 유익한 것 같다. 사랑, 여행, 힐링, 인생 그리고 이념....
주목하는 관점에 따라 다양한 감상평을 나눌 수 있어서 좋다. 시네마토크에서 다루기에 더 없이 적합한 영화라는 생각이다.
누가 그러라고 강요한 것도 아닌데 왠지 퍼실리테이션의 관점에서 영화를 감상하게 되었다ㅎㅎ
하지만 억지로 끼워 맞추기 식은 아니었던 듯 하다.
영화보는 내내 그런 관점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고, 사전 지식이 거의 없던 영화라서 사실 평소 보던 습관대로 이런 저런 생각과 의문을 가지면서 전개를 따라 간 것인데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퍼실리테이션의 관점으로 정리가 된 것이다.
이미 오래 전에 상영되었던 영화이니 약간의 스포를 감수하고 나의 관점대로 정리를 해 본다.
<스포주의>
5년 전 아내와 이혼한 그레고리우스(제레미 아이언스 분)는 스스로를 지루한(Boring)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스위스 한 대학의 문학 교수이다. 폭우가 내리는 어느 날, 그는 우연히 다리에서 투신자살을 기도하는 한 여인을 만나게 되고 그녀가 남기고 간 붉은 코트와 그 속에 있는 책 한권을 발견하게 된다.
그 책은 아마데우 드 프라도(잭 휴스턴 분)가 지은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책으로 포르투갈 리스본행 열차 티켓이 끼워져 있었다. 과연 책 속의 어떤 구절이 그토록 강렬하게 그레고리우스를 이끌었는지 모르겠지만, 강의 도중에 무작정 뛰쳐 나온 것도 망각한 채 출발 시간을 불과 15분 남겨 둔 그 티켓을 들고 노교수는 리스본행 열차에 몸을 맡긴다. 그리고 영화는 '왠지 나(그레고리우스)보다 큰 삶을 살았을 것만 같은' 아마데우의 삶의 흔적을 따라 긴 여행을 시작한다.
그레고리우스는 책에 있는 내용을 토대로 아마데우와 연관 있는 장소, 그리고 주변인물을 차례 차례 탐색해 나간다. 그러던 중 자전거와 부딪혀 오래도록 착용해 왔던 안경을 깨버리게 되며, 새로 안경을 맞추러 간 안과병원의 여의사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녀의 삼촌인 주앙을 통해 아마데우의 과거 행적의 실마리를 찾게 된 것.
독재가 하나의 현실이라면,
혁명은 하나의 의무다.
아마데우는 포르투갈 혁명(1974년) 당시 젊고 유능한 의사로 레지스탕스에 가담했다고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대부분의 젊음이 그러하듯 그의 혈기는 친구 조지의 영향으로 인해 잠시 혁명투사의 길로 들어서게도 했으나, 죽어가는 반역자 멘데즈를 수술해 주는 행위로 말미암아 동료들에게 배신자로 몰리게 되고, 조지의 애인인 스테파니와의 사랑에도 빠지는 등 우여곡절의 삶을 살아간다. 의료사업을 지극 정성으로 도와주던 여동생 아드리아나에게도 심한 마음의 상처를 남기고, 친구 조지와 당시 레지스탕스 동지였던 주앙도 그에 대한 오해와 복수심을 간직하고 있으며, 결국 사랑하던 스테파니와도 결실을 이루지 못한 채 아무도 모르던 지병 '동맥류'로 인해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밝혀진다.
노교수 그레고리우스는 이러한 아마데우의 삶의 여정을 하나씩 풀어 가는 과정에서 역사 속 그의 주변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그 곳은 아마데우가 머물렀고 지나갔던 '그 곳'으로 그가 '남겨두고 간 무엇'이 있는 장소이다.
어느 장소에 간다는 것은
스스로에게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우리가 그 곳을 떠나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남긴다.
그가 만난 인물들은 모두 그 시대의 상처와 마음의 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레고리우스는 단지 아마데우의 삶의 행적을 찾아내기 위해 그들과 만났겠지만, 정작 그 만남을 통해 그들의 마음이 열리고 오해가 풀어진다. 마침내 아마데우의 연인인 스테파니를 만나게 되고, 미스테리했던 인생역정을 모두 풀어낸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다리 위에서 투신하려던 그 여자는 다름 아닌 멘데즈 - 민족의 반역자이자 아마데우에게 생명의 빚을 진 사람 - 의 손녀딸이었던 것!!! 정말 실타래와 같이 얽히고 섥힌 세상사를 단면적으로 보여 주는 것 같다.
자신의 모든 생활을 내팽겨치고 미로와도 같은 리스본 여행에 몸을 내맡겼던 지난 몇 일간을 돌아 보며 다시 스위스로 돌아가려는 노교수 그레고리우스 앞에 또 한 여자가 배웅을 나와 있다. 바로 이 여행에 친밀한 동반자가 되어 준 여의사 마리아나다.
열차에 막 오르려는 그레고리우스에게 그녀는 말한다.
"그냥... 여기 머물지 않으시겠어요...?"
친밀함은 우리의 마지막 안식처다.
이 영화를 두 번째 보신 분이 있었다.
첫 번째 봤을 때는 이념의 문제에 깊이 빠졌었다고 한다.
나 역시 충분히 그럴 개연성을 느꼈다.
그가 저술한 책의 여러 명언들도 그러하거니와 젊은 아마데우를 그리는 과정에서도 너무 강렬한 신념들이 다가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두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퍼실리테이션의 관점에서 해석되었다.
사실상 리스본 여행의 과정에서 보여 준 그레고리우스의 모습은 퍼실리테이터와 무척이나 유사하다고 느껴진다.
그는 오해와 증오로 가득 찬 -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그에게 무례하게 대하거나 냉소하기도 하는 - 인물들을 직접 찾아간다. 그들이 처해 있는 '현장'으로 말이다. 그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인다. 요구를 들어주며 진정성을 보인다. - 실제로 조지를 만나서는 짖굳은 그의 요구대로 못 마시는 술을 마시고, 못 피우는 담배를 피우며 기침을 토해 내기도 한다. 적절한 질문... 그러나 대답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마음이 열릴 때, 다시 찾아와서 듣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당사자가 미처 깨닫지 못 한 하나의 진실을 전해준다. 그로 인해 당사자는 오해가 풀리고, 마음이 열려, 마침내 자기 스스로를 용서하기에 이르른다.
이 영화의 초반, 그의 안경이 깨지는 모티브가 나온다. 또 그 후에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새 안경에 조금씩 적응해 나가는 모습도 두어 번 비추어 준다. 그 장면들을 보면서 '과연 이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스스로를 지루한 사람이라 생각해 온 그레고리우스는 지난 며칠 간의 삶은 전혀 지루하지(Boring) 않았다고 말한다.
리스본 여행을 통한 새로운 삶으로의 전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경은 그 전환을 암시하는 모티브라고 여겨졌다.
퍼실리테이터로서의 삶...
영화 초반에 들었던 또 한가지 의문은 '그토록 강렬하게 그를 이끈 결정적 동기는 무엇일까?'하는 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누적된 그의 지루한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말대로 그것은 '지루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 삶의 축적이 있었기에 책의 어떤 구절을 읽고,
또 리스본행 열차티켓을 손에 쥐었을 때 과감히 모든 현실을 극복하고(내팽겨치고?) 삶의 전환점을 부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언젠가 다시 한 번 꼭 보고 싶은 그런 영화이다.....
사진 출처 : 네이버영화 http://movie.naver.com/movie/bi/mi/detail.nhn?code=1031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