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앞에 수식어를 지우다

썰물이 빠진 자리에 정적만 남았다

by 난향C

33년이라는 세월은 결코 짧지 않았다. 그것은 청춘의 날실과 중년의 씨실을 촘촘히 엮어 하나의 거대한 태피스트리를 완성해가는 시간이었다. 그 긴 세월 동안 나는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나 자신을 단장했다. 단순히 화장을 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일이 아니었다. 거울 속의 나에게 '공직자'라는 가장 적절하고 신뢰감 있는 표정을 덧입히는 의식이었다.

나의 가방 속엔 늘 민원인들의 고단한 사연이 담긴 서류 뭉치가 들어있었고, 교육 현장의 미래를 위한 치열한 고민들이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사무실 책상 위, 내 이름 석 자 앞에 놓인 '민원담당관' 혹은 '팀장'이라는 수식어. 그 이름표는 거친 세상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주는 가장 견고한 성벽인 동시에, 내가 반드시 지켜내야 할 최전선의 진지이기도 했다.

그 성벽 안에서 나는 언제나 유능해야 했다. 때로는 감정을 숨긴 채 친절해야 했고, 무엇보다 어떤 거센 파도 앞에서도 흔들림이 없어야 했다. 엄격한 행정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찾아온 민원인의 갈라진 목소리를 따뜻하게 다독여야 했다. 교육의 백년대계를 설계하며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열정을 쏟았던 시간들. 그것은 명백히 내 삶을 지탱해온 가장 큰 자부심이자 긍지였다.

하지만 마지막 퇴근길, 익숙했던 사무실 문을 닫고 나오던 그날. 나를 정의하던 화려하고 단단한 수식어들이 마치 썰물처럼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집으로 돌아와 아무도 없는 텅 빈 거실에 앉았다. 무심코 내 손을 내려다봤다. 수만 장의 서류를 넘기느라 지문은 희미해졌고, 쉼 없이 키보드를 두드리느라 손가락 마디마디가 굵어지고 거칠어져 있었다. 이 투박한 손은 지난 33년 동안 누군가의 꼬인 문제를 해결해주었고, 누군가의 막막한 앞길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정작 나를 수식하던 모든 이름표를 떼어내고 나니, 이 손을 잡고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함이 밀려왔다. 이 손으로 이제 무엇을 어루만져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문장에는 오직 '나'라는 주어만 덩그러니 남았고, 뒤를 이을 서술어는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한참 동안 그 서늘한 정적 속에 머물며, 이름표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낯선 풍경을 바라보았다.

.

.

.




오직 '나'로 마주하는 용기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여전히 나는 연습 중이다. 습관처럼 누군가에게 나를 설명할 때 예전의 직업을 먼저 언급하려 하고, 아이들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대화의 문을 열곤 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스스로를 다독인다. "괜찮아, 지금은 그냥 너 자신으로만 존재해도 충분해."라고. 이름표를 지우는 것은 결코 상실이나 은퇴가 아니다. 그것은 나를 둘러싼 낡은 껍질을 깨고 나와, 진짜 알맹이와 마주하는 용기 있는 선택이다. 타인이 정성껏 붙여준 스티커를 다 떼어낸 뒤, 투박하고 조금은 거칠지만 온전한 '나'의 모습을 거울 속에서 발견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얻는다.

나는 이제야 타인의 시선에서 해방되어, 오직 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33년 공직 생활의 마침표는 내 삶의 끝이 아니다. 그것은 수식어 없는 새로운 문장의 서막일 뿐이다. 나는 이제 엄마라는 의무감도, 공직자라는 엄격한 책임감도 잠시 내려놓고, 오직 '나'라는 당당한 주어로 채워진 인생의 두 번째 책을 써 내려 간다.



이전 01화프롤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