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이 없는 문제, 정답으로 만들어가야 하는 문제
서로를 만나기 전, 아이 있는 삶을 원했던 남자와 아이 없는 삶을 원했던 여자가 결혼을 했다. 서로를 만나고, 우리는 어느 쪽으로 확고하게 결정하기보다는 상대방의 가치관으로도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 암묵적으로 동의되었다. 남자는 아이 없이 배우자와 둘이 살아가는 삶은 어떨지도 처음으로 생각해보게 되었고, 여자는 아이를 낳아 기르며 아이와 배우자와 함께 살아가는 미래는 어떨지에 대해서도 처음으로 현실감 있게 그려보게 된 것이었다.
우리는 결혼 후 이 문제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 가볍게 서로의 생각을 확인하고 공유하는 식이었다. 남편의, 아이를 낳고 싶어하는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그냥 그것이 순리고 본능이라는 것. 엄청난 이유가 있어서 아이를 낳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동시에 남편은 아이를 낳아서 기르는 일만큼 가성비가 떨어지는 일도 없을 거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이 순리이기 때문에, 그 비효율을 알면서도 내리는 선택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반면에 내가 아이를 갖고 싶지 않은 이유는 당장의 현실 문제였다. 아이는 아직 없는 존재였다. 아직 없기에 사랑하지도 않는 대상이었다. 아직 없는 존재를 굳이 만들어내서 이미 존재하고 있는 사람들의 에너지를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를 낳는 것이 생명체의 순리라는 것에는 동의했지만, 그것과 거스르는 선택을 해서라도 당장의 내 삶이 더 여유로울 수 있다면 그 선택이 훨씬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척박한 땅에서 혼자 힘으로 아등바등 버티며 살아온 것이 평생 고되다고 느꼈기 때문에 오랜만에 찾은 이 여유를 다시 놓고 싶지 않았다.
남편과 나는 둘이 지내는 이 생활이 무척이나 행복했다. 짜릿하게 행복한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지만, 별일이 없기에 유지되는 평화와 조용한 행복이 있었다. 남편과 나는 이렇게 평생 지금처럼 둘이 살아도 충분히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었다. 어느 한쪽으로 결정을 땅땅 끝낸 뒤, 하나의 선택을 함으로써 놓치게 될 그 기회비용에 대해서 완벽하게 아쉽지 않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서 우리는 자유롭지 못했다. 특히 내가 그랬다. 다만 두 가지 삶 다 나쁘지는 않겠다는 것으로 우리 의견이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이 분명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답이 없는 문제였다. 선택의 문제고, 그 선택을 정답으로 만들어가야 하는 문제.
우리의 경우는 어느 쪽이 정답에 가까울까, 어느 쪽이 모든 존재가 더 행복에 가까워질 수 있을까 그것을 점쳐보고, 그러한 선택을 함으로써 발생할 기회비용에 대해서도 각오를 해야 하는 문제였다.
결혼 후 1년의 시간이 다 되어가도록 시원하게 답을 내리기가 어려운 일이었다. 뭐가 됐든 지금 행복하게 살자, 그 생각이 더욱 뚜렷해지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