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 같은 시간
- 오늘은 어디 갈까?
- 교보문고나 갈까?
주말에 우리가 자주 가는 곳, 쇼핑몰, 도서관, 그리고 서점… 가끔 산. 짐짓 고민하는 척하지만 결국은 이곳들 중 하나를 가곤 한다.
이번 주말에는 아침 일찍 교보문고로 향했다. 거의 오픈 시간에 도착한 서점에는 사람이 아직 없어 한산한 분위기였다. 서점에 가면 그냥 마냥 기분이 좋은데, 이렇게나 한산한 서점이라니… 더할 나위가 없다. 나한테는 여기가 휴양지다. 독서에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있는 것도 좋고, 예쁘고 쾌적한 분위기도 좋고, 무엇보다 읽고 싶은 책들, 궁금한 책들이 가득한 것이 제일 좋다.
시립 도서관에 읽고 싶어 예약해 둔 책들이 있었는데 아직 순번이 오지 않아 못 읽고 있었던 두 권과 또 구미가 당기는 책 두 권을 신중하게 뽑아 자리에 앉는다. 앉은 자리에서 후닥 세네 권을 속독한다. 그러면 남편은 유아차에 아기를 태운 채, 서점을 몇 바퀴 돌며 핫트랙스 구경도 하고 겸사겸사 시간을 벌어준다. 아기 밥 먹을 시간이 되면 수유실에 가서 챙겨 온 이유식도 먹이고, 기저귀도 갈아주고, 이번 주말에는 다이소에서 쇼핑도 했더라. 그동안 나는 세상 모르고(모른 체하고), 덕분에 꿀이 흐르는 행복한 두 시간의 휴가를 갖는다. 그렇게 주말마다 나는 살아난다. 마치 시들었던 식물이 단비를 맞은 것처럼 다시 싱싱해진다.
소장해야겠다 하는 책은 구매를 마치고, 우리는 이제 맛있는 걸 먹으러 간다. 커피랑 독서로 피가 잘 도는 기분을 충전한 뒤 맛있는 식사를 하는 시간, 내가 주말을 손꼽아 기다리는 이유이다.
결혼 전에는 가끔 한 번씩 길게 떠나는 여행이 나를 살렸는데, 결혼을 하고 나니 이런 단비 같은 매주말의 시간이 나를 살게 한다. 두 시간 만에 만나는 아기는 더욱 귀엽고 반갑다. 더더 사랑스럽다. 더 잘해줄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무럭무럭 자란다.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도 차곡차곡 쌓인다. 달콤한 미래에 대한 꿈도 꿔본다.
아이가 좀더 자라면 주말에 이렇게 함께 도서관에 와서 각자 읽고 싶은 책도 읽고, 그 후에는 좋은 데서 맛있는 것 먹으며 수다를 떨고 싶다. 요새 좋아하는 남자 아이에 대해 듣고 싶고, 요새는 뭐할 때 제일 즐겁고 행복한지 궁금할 것이다. 그즈음 내가 하는 고민이 있다면 아이에게 짐짓 어른인 양 상담도 요청해보고 아이의 견해도 구해보고 싶다. 아이가 원한다면 숲으로 바다로 언제든 훌쩍 다녀오고 싶다. 세상이 넓고 아름답다는 것을 나도 여행을 좋아하는 부모님 덕분에 일찍이 알았는데, 나도 이것을 아이에게 잘 알려주고 싶다. 되도록 어린이일 때, 마음 안에 신남이 가득 차는 경험들을 최대한 많이 만들어 주고 싶다. 봄은 봄만이 가질 수 있는 특유의 설렘으로, 여름은 생명력 가득한 초록의 싱그러움으로, 가을은 또 가을만의 청명함과 충만함으로, 겨울은 낭만으로 기억될 수 있도록 계절에 어울리는 경험들을 사시사철 같이 하고 싶다. 내 부모가 어린 나에게 그렇게 해주었듯이. 아이가 화장품에 관심이 생길 즈음에는 차라리 비싸더라도 좋은 화장품을 쓸 수 있도록 권할 것이고, 이왕 화장하고 다닐 거면 예쁘게 어울리게 잘 하고 다닐 수 있도록 화장품 고르는 방법에 대해 알려줄 것이다. 공부는 소질이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어릴 때는 시키지 않을 것이고, 정말 흥미를 느끼며 달려야 할 몇 년을 위해 잘 비축해두고 싶다.
꼬까옷을 골라 입고 나름대로 예쁘게 꾸미고 나가, 아이랑 좋은 것들을 보러 다니며 세상에 예쁜 것들을 함께 누리고 싶다. 아이가 중학교 1학년 생이 되었을 때는 나도 1년 휴직을 하고, 함께 비엔나에서 한 달 살기(가능하면 조금 더)도 해보고 싶다. 내가 가본 도시 중 가장 인상적이었기도 하고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꼽힌다는 비엔나에서 지내보며 도시가 주는, 그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주는 느낌이 어떻게 다른지 느껴보고 이렇게도 살아가는 풍경과 품격이 다를 수도 있음을 체화하고, 나중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어느 도시에 살든 그때의 마인드를 장착하고 높은 기준을 지향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 그곳에 거점을 잡아 살면서 날씨 좋은 주변 도시들도 한 번씩 여행하며, 세상이 넓고 아름답다는 걸 또 한 번 진하게 알려주고 싶기도 하다. 내가 해봤던 여행의 형태 중 가장 좋았던 형태였다. 그걸 남편과 아이랑 꼭 같이 해보고 싶다.
아이에게, 조금 더 살아본 사람으로서 유일하게 정답이라고 느끼는 단 하나는 오직 나답게 사는 삶이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말해주고 싶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거나 부모나 교사의 말에 순종하지 않아도 된다고 진심으로 알려주고 싶다. 다만 네 선택에 스스로 책임만 질 수 있으면 된다고. 평생에 걸쳐 이룰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은 오직 나 자신이 되는 일이고, 누가 뭐라고 하든 나답게 사는 삶이 가장 후회가 없고 행복에 가깝더라는 것을 아이가 최대한 일찍 알고 실천하는 삶을 살았으면 한다.
그렇게 이것저것 달콤한 미래를 다시 꿈꾸게 하는, 달콤하기만 한 주말이 또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