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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막물고기 Sep 19. 2020

우리 강아지가 보고 싶은 날

집 안 한켠의 빈 공간을 둘러보면 또아리를 틀 듯 몸을 웅크리고 자는 동글이가 아른거린다.


나의 털동생은 쌀쌀한 공기가 차오르기 시작하면 몸을 바들바들 떨기 시작하고 그 모습이 애처로워 이불을 덮어주면 보는 눈앞에선 잠시 덮고 있다가 이따윈 사치라는듯 금방 헤쳐 나온다.


털동생이 몸을 폭 담갔던 자리가 굴처럼 파여있고 그 곳에 손을 넣으면 온기가 따스하게 남아있었다.


나도 우리 강아지처럼 온 몸이 털로 뒤덮여 있다면 나의 체온으로 털이 이불이 되는 상상을 해본다.


그랬다면 어설픈 외로움과 충동적인 한기에 누군가의 곁을 찾아가 몸을 부비는 실수 따윈 하지 않을텐데.


가릉가릉한 콧소리를 내며 하루의 절반 이상을 잠만잤던 강아지지만 때때로 아니, 매우 자주 보고 싶어진다.


2년전에 무지개 다리를 건넌 털동생은 묻혀지지도 않고, 다시 떠올라 머리와 마음을 헤집고 부유하는것도 막을 수가 없다.


제 이름 처럼 동글동글하게 말아 놓던 몸이 딱딱하게 굳어 다리를 쭉 펴고 있던 마지막 누운자리가 생각난다.


따뜻함이 가신 작은 발을 꼭꼭 주무르며 다음에 꼭 다시 만나자고 그땐, 십삼년이 아니라 더 오래 보자고 건넸었다.


동글이에게는 잘못해준 일들만 수만가지 떠올릴 죄인이지만 한뼘이라도 달라진 사람이 되고자 지난하게 노력했던 적이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옷에 몸을 맞추고, 자주 담지 않던 말씨를 사용하고,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될 것 같은 일들에 시간과 돈을 쏟았따.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오래 만나왔다는 이유로 관계의 문제점을 허술하게 넘겼고, 싫다는 표현을 하지 못했다.


등신이었다.


그러면서, 어쨌든 애는 쓰고 끙끙대느라 고단했고 이 미천한 노력을 누가 알아줄까, 조금이라도 등을 토닥 거려 줄것 같으면 정신없이 마음을 주었다.


천치였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후회의 굴레속에 사는게 여느 평범한 이들의 삶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 말은 맞을수도 있고 틀렸다고 볼 수도 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해도 조금씩 가벼운 실수로 나아가는 사람이 있고, 둔감해지는 사람도 있으며 주변이들에게 상처를 빚내는 사람도 있다.


나는 한달의 십오일은 딱 이대로만 살고 싶을 만큼 원없이 평온하다가 반절의 십오일은 무기력에 시달린다.


널뛰기 초고수의 단오날 시연처럼 솟구치고 하강한다.


내가 달라질수 없는 사람이라, 실수를 반복하는 사람이라, 힘들었던게 아니라 (아니, 그런것도 있긴 하지) 쉬이 기대감을 품고 토라지며 퍽 하고 터지는 바람빠진 마음이 문제였다는 생각이 든다.


팔고, 다시 사고, 헤어지고, 만나고, 이불속에 숨었다가 방랑벽이 도지고 오락가락 돌아가도 회귀점은, 결국 나였다.


그리고 이런 나를 사는동안 기꺼이 매번 반겨주고 품에 안겨오는건 동글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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