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혁은 비장했다.
일생일대의 전투를 앞둔 사령관처럼, 그는 자신만의 갑옷을 꺼내 입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돈된 짙은 갈색의 포마드 헤어.
몸의 선을 날카롭게 드러내는 검은 실크 셔츠는 그의 움직임에 따라 옅은 빛을 발했다. 손에 걸쳐 든 이탈리아 장인의 수트는 그가 앞으로 마주할 비논리적인 세계에 대한 최소한의 방어막이었다.
단 1초의 시간도 낭비할 수 없다는 듯, 그의 손목을 감싼 갤럭시 워치가 차갑게 빛났다.
그의 눈빛은 레이저빔처럼 낡은 건물벽을 훑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낡은 건물의 계단을 오르며, 그는 자신의 구두가 삐걱거리는 소리마저 경멸했다.
비효율, 비체계, 비논리. 이 공간을 이루는 모든 것이 그의 신경을 긁었다.
마침내 꼭대기 층, '마음 클릭'이라는 간판의 상담센터 앞에 섰다.
그는 비아냥거리듯 중얼거렸다.
“마음 클릭이라. 촌스럽기 짝이 없군. 마우스 클릭하듯 마음을 제어해 주겠다는 뜻인가?”
그는 적진의 문을 박차고 들어섰다.
상담사는 그보다 먼저 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평범한 흰색 코튼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지혁의 예민한 시선은 무언가 다른 점을 포착했다.
블라우스의 단추. 첫 번째는 나무, 두 번째는 자개, 세 번째는 평범한 플라스틱… 전부 제각각이었다.
완벽한 균형과 대칭을 추구하는 그의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디테일이었다. 단추에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그 너머에 셔츠 너머에 존재할 여자의 이미지에 순간 호기심이 일었다.
'예측 못할 하룻밤을 선사하는 소울링크 캐릭터 정도로 추가해야겠군.'
애수는 남자의 시선을 의식했지만, 전문가 페르소나를 끌어올렸다. 투명 뿔테 안경 너머로, 애수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어서 오세요, 강지혁 씨. 신애수입니다.”
지혁은 그녀의 ‘비논리적인 단추’에서 시선을 떼며, 보란 듯이 소파 깊숙이 몸을 묻고 다리를 꼬았다.
애수가 그의 과거와 소울 링크 사태에 대해 조심스럽게 질문을 시작했다.
그는 준비해 온 시뮬레이션대로 영혼 없는 답변만 툭툭 던질 뿐이었다.
한참 동안 애수의 질문이 이어지던 그때였다.
-지이잉--.
지혁의 주머니에서 날카로운 진동이 울렸다. 그는 애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양해도 구하지 않고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발신인은 ‘최준원’이었다.
“왜.”
그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부터가 얼음장 같았다.
“일단 기자고, 사원이고 입단속부터 시키라고 했잖아. 도의적 책임을 지는 도덕적 기업이라는 코스프레 잊지 마. 앞으로의 배상 계획을 부풀려 보도해서 회사 이미지 실추부터 막아. 그리고 내 시간 낭비하지 마. 끊어.”
용건만 말하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리는 말투, 세상을 자기 발밑에 둔 듯한 오만한 태도. 애수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뇌리를 스치는 강렬한 데자뷔를 느꼈다.
어제 유기견 보호소에서 마주쳤던 남자. 개똥을 치우면서도 ‘똥덩어리’를 연발하던 돌아이.
'아까운 내 시간! 이 시간이면 처리할 버그가 몇 개인데!'라고 말끝마다 툴툴거렸던 소시오패스. 그 남자였다.
애수는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혹시… 똥덩어… 리?”
하지만 강지혁의 예민한 청각이 그 단어를 놓칠 리 없었다. 그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애수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에는 ‘네가 방금 뭐라고 지껄였지?’ 하는 살기가 번뜩였다.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망했다.
혼자 일하는 사무실에서 자문자답에 콘서트까지 열어 버렸던 습관. 그만 속마음이 기어이 새어 나와 버렸다. 하지만 그녀 역시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그녀는 프로페셔널한 미소를 애써 얼굴에 장착하며, 태연하게 받아쳤다.
“아, '응어리'진 감정들이 보인다구요. CEO로서의 책임감과 고뇌...에이..뭐, 그런 거 랄까.”
기가 막힌 임기응변이었지만, 지혁의 의심스러운 눈빛은 풀릴 기미가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낡은 상담실의 커튼 사이로, 오후의 햇살이 강하게 쏟아져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빛에 애수가 저도 모르게 눈을 찡그렸다.
순간, 지혁의 머릿속에서 어떤 이미지가 번개처럼 스쳤다.
어제 개똥밭에서 자신을 향해 손을 내밀던 여자의 모습.
그날의 햇살.
어지럽게 빛을 반사하던 투명한 안경테. 그 너머로 엉망으로 흩날리던 갈색의 머리칼...
모든 데이터가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다.
강지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눈앞의 여자를 다시 뜯어보기 시작했다.
제각각인 단추, ‘똥덩어리’라는 단어, 그리고 이 기시감.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습니까?”
“글쎄요. 강지혁 씨가 워낙 유명인이시라, 제가 어디선가 TV에서라도 뵙지 않았을까요?”
애수는 여유롭게 받아넘기며, 책상 서랍에서 낡은 타로카드 한 덱을 꺼내 들었다.
“자, 헛소리는 그만하고. 정리하기 전에 재미로 타로 한 장 뽑아 보실래요? 당신의 그 잘난 탑이 왜 무너졌는지, 이 그림 딱지들이랑 한번 이야기해 볼까요?”
애수는 '복채는 무료입니다.'를 센스 있게 덧붙였다. 뜻밖의 제안에 지혁은 무심히 카드를 뒤집었다.
무너지는 탑. [The Tower]. 추락하는 사람.
지혁은 대답 대신, 꼬았던 다리를 풀고 상체를 앞으로 당겨 앉았다.
그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이전의 지루함과 경멸은 사라지고, 예측 불가능한 상대를 만난 사냥꾼의 눈빛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 여자, 정체가 뭐지?
그의 완벽한 알고리즘에, 설명할 수 없는 버그가 발생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