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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 알고리즘 13 : 뜻밖의 변수

by 여기반짝


보호소의 가을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마른 흙 위로 흩날리는 단풍잎이, 햇살 아래 산책하는 개들의 움직임과 어우러져 필름 영화처럼 생동감을 자아냈다. 그 풍경 속에서, 지혁과 애수의 투닥거림에는 묘한 편안함과 부채감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지혁은 더 이상 데이터 빌런처럼 굴지 않았다. 오히려 둘은 제법 손발이 잘 맞는 파트너가 되어 있었다.


"숫자에 약한 것도 컨셉입니까? 겉면에 20KG라고 쓰여 있잖아요."

“아, 예예~ 인간 컴퓨터 강지혁 씨.”


지혁은 이어폰을 낀 채 무심한 척 그녀의 동선을 뒤따랐다. 그녀의 발걸음이 무거운 사료 포대 앞에서 주춤거릴 때, 그가 말없이 다가와 포대를 어깨에 둘러멨다. 그녀가 힘에 부쳐 보이는 순간마다, 그는 언제나처럼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손이 2개인데 연장을 6개나 들고 가는 건 무슨 자신감입니까?"

“그럼 그 손 여기 보태죠?”


지혁은 다치지 않은 왼팔로 연장 6개를 아예 한꺼번에 안아 들었다. 그리고 애수는 걱정스러운 손길로 그의 소매를 걷어주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팔뚝을 스칠 때, 그 뜨거움 때문에 둘 사이에 잠시, 어떤 말도 끼어들 수 없는 정적이 흘렀다.


애수의 발걸음이 보호소 뒤편의 낡은 창고 앞에서 멈췄다.

경찰의 폴리스라인은 사라졌지만, 그날의 기억은 재난의 알람처럼 떠올라 잊을 수가 없었다. 애수가 먼저 침묵을 깼다.



“그날… 창고에는 왜 오셨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작게 떨리고 있었다.


“왜… 저 대신….”


지혁은 대답 대신,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이라기에는 짧고, 씁쓸했다.


“그게 가장 효율적인 계산이었으니까.”

“네?”

"실패한 프로젝트는 폐기되어도 상관없지만, 가치 있는 데이터는 보존해야지. 그땐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이었습니다.”


‘실패한 프로젝트’.

그는 다시 그 단어를 꺼내 스스로를 아프게 베었다.

그의 목소리는 애써 담담했다. 처음이었다. 그가 자신의 가장 깊은 상처를, 이런 식으로 타인에게 드러낸 것은. 애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 말 뒤의 침묵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가 숨기지 못한 상처를 향해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단하게 손을 뻗었다


“아니요.”


그녀는 그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아주 단호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실패작이 아니에요, 지혁 씨. 내가 알아요.”


살아있다는 자체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 순간 애수의 시선 앞에서 그의 세상이 멈춰 섰다.

수십 년간 그를 옭아매던 코드가, 그녀의 그 한마디에 삭제되는 기분이었다.

애수가 잡은 그의 손을 놓고 돌아서려던 찰나, 그는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놀란 애수가 그를 돌아보기도 전에, 지혁의 얼굴이 성큼 다가왔다.


"당신의 두 번째 유혹, 제대로 접수하지."


짧은 숨, 가까워진 온도. 그리고 생각보다 부드럽게 닿은 입술.

어떠한 계산도, 이유도 없었다.
그건 생존을 향한 본능이자, 처음으로 자신을 용서받는 순간의 열망이었다.

애수는 과거의 환영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는 그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읽었다. 그리고 가슴을 밀어내던 애수의 손의 힘이 스르르 풀렸다. 그의 입술에서는 씁쓸한 커피 향과 희미한 위스키의 맛이 났다. 어른 남자의 맛이었다.

허락 같기도, 위로 같기도 애수의 그 움직임에 지혁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때 봉사자들의 일과 종료 알람이 축사 안 스피커에서 울렸다.

방금 전의 열기는 온데간데없고, 어색함만이 둘 사이를 채웠다.


“… 저, 가볼게요.”


애수는 도망치듯 떠났지만 지혁은 그녀를 잡지 못했다. 그는 멍하니 자신의 입술을 매만졌다. 아직 그녀의 온기와 향기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 데이터를 분석하고, 최적의 결과를 예측하던 지혁이었다.

그러나 오늘, 그는 가장 비논리적인 데이터를 스스로에게 입력했다.


그 순간은 도돌이표가 되어 매 순간 지혁을 멈추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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