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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 알고리즘 14 : 트라우마

by 여기반짝


지혁의 탑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는 서재에서 밤새도록 ‘입맞춤의 신경화학적 분석’ 따위의 논문을 검색했다.

옥시토신 분비, 페닐에틸아민의 작용. 어떻게든 그날의 사건을 데이터로 변환하고 분석해야 했다.


인간은 어린 시절 안전의 경험으로 학습한 패턴에 끌린다. 사랑은 신경계가 기억하는 알고리즘이다.


하지만 홀로그램에 떠오른 수많은 공식과 이론들은, 찰나의 충동을 1바이트도 설명해주지 못했다.

실패한 프로젝트가 아니라는 그녀의 말 한마디에 왜 수십 년간 쌓아 올린 방어벽이 무너져 내렸는가.

질문은 꼬리를 물었고, 애써 지운 20년도 더 된 그날을 떠올리게 했다.


어머니.

기억 속의 그녀는 낡은 책상에 앉은 뒷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돌아봐 주지 않던 분.

자유분방한 여행 작가였던 그녀는, 취재차 다녀온 남유럽의 섬에서 그를 갖게 된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고 했다. 그런 그녀의 자유에 생의 무게가 실려 날개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지혁이 유치원에서 돌아온 어느 날, 그는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는 것을 알았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거리를 헤맬 때, 친절한 아주머니가 없었다면 미아가 될 뻔했다.

아주머니는 지혁의 손을 잡고 주민센터에 갔고, 친척과 연락이 닿도록 도왔다.

흘러넘친 눈물때문에 얼굴이 선명히 기억나진 않지만, 투명 안경테에 부딪쳐 반짝이는 갈색 머리칼과 웃음만은 마음에 남았다. 그렇게 그는 친척들 손에 맡겨졌다.


그는 스스로에게 코드를 입력했다. ‘나는 실패한 프로젝트다.’

그런데 애수가, 그 근원적인 코드를 단 한마디로 삭제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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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수의 세상 역시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상담소 문을 닫고, 텅 빈 방 안에서 밤새 수십 번도 더 타로카드를 펼쳤다. 하지만 카드는 그녀의 마음처럼 엉망으로 흩어질 뿐, 어떤 답도 주지 않았다.

하릴없이 머리를 쥐어짜듯 감싸며, 이건 인지적 종결욕구라고 스스로를 진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친구 주희였다.


[주희]: 뭐해? 요즘 너 못 본지 백만년도 더 된듯.


애수는 잠시 미간을 짚었다.


[애수]: 전공 책 봐. 백만 년 만에… 나 요새 정신노동 치사량이거든.ㅠㅠ

[주희]: 뭐? ㅋㅋ 여긴 어디? 너는 누구? 소크라테스도 가물가물하다. ㅋㅋ 무슨 일인데?


애수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애수]: 여기에 너의 지분도 있다…

[주희]: ???

[애수]: 네가 부탁한 그 분, 준원 씨 상사랬나? 어떤 사이야?

[주희]: 아, 미안…. 힘들게 해?

[애수]: 상담마다 철저한 이론으로 중무장하고 있다. 내 사전에 논리라니….


잠시 후 주희에게 답장이 왔다.


[주희]: 미안… 준원 씨가 불러서. 음, 주말엔 봉사 갈 테고 금요일 저녁 알폰스 무하전 어때?


알폰스 무하. 애수는 그 이름을 잠시 곱씹었다.


[애수]: 그래, 나에게 필요한 건 사랑이 아니야. 예술이지..

[주희]: ,,,응? 애수야, 나 촉 좋은 거 알지? 조만간 나한테 고마워할 일이 생길 것 같은걸?

[애수]: 뭐? 알폰스 무하전 때문에?

[주희]: 됐다. 금요일에 봐. 아, 준원 씨가 너한테 고맙대. 모든 게 다 고맙고 미안하다는데?

[애수]: 아냐, 불경기에 고객 유치해 주셨으니 내가 더 고맙다고 전해 줘.



애수는 휴대폰을 뒤집어 내려놓았다.

AR 미술관으로는 도무지 대체할 수 없는,

알폰스 무하의 아우라를 어쩐지 빨리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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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상담 세션.


상담사는 매뉴얼대로 내담자를 위한 질문을 했다.

내담자는 질문에 성실하게 응하는 보통의 상담이었다.

하지만, 질문과 대답 사이의 공백이 길었다. 유난히 뻐꾸기 시계의 초침 소리가 크게 들렸다.

애수는 찻잔을 내려놓고, 캐모마일의 일렁임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지혁을 응시했다. 지혁은 평소와 달리 다리조차 꼬지 않은 어정쩡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날의 기억이 두 사람의 입가에 맴돌았지만, 쉽사리 언어가 되지는 못했다.


애수가 다음 질문을 위해 입을 열었다.


“이제 가장 최근의 일에 대해 얘기할까요? 요즘 인상적인 사건이 있었나요?”


지혁의 어깨가 미세하게 굳었다. 그리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채, 차갑게 말했다.


“할 얘기 없습니다. 실수였고, 해프닝이 있었을 뿐이니까요.”


애수 역시 말끝이 가늘게 떨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그럼 뭐라고 생각해야 합니까. 상담 과정에서 내담자가 상담사에게 감정을 투영하는 일은 흔하다고 들었는데. 전이(Transference)라고 하던가. 당신도 내게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면, 그건 역전이겠지. 그 편리한 전문 용어들로 정리하고 넘어가면 될 일을, 굳이 들출 필요 있습니까?”


애수는 조용히, 그녀가 짐작하고 있는 그의 가장 아픈 곳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래요, 그 해프닝. 그때 제 뒤로… 어머니를 보고 있었던 건 아니구요?”


지혁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무슨… 헛소립니까!”

“당신을 ‘실패한 프로젝트’라고 불렀던 어머니. 당신이 평생 갈구했지만 얻지 못했던 무조건적인 수용과 이해. 그걸 그 순간, 내게서 봤던 건 아닐까요? 당신이 키스한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 만들어낸 어머니의 환상이었을지도 몰라요.


그녀의 분석은 정확했다. 지혁의 유년기 경험이 만든 무의식이 현재의 차가운 벽을 형성했으리라.

그리고 지혁이 그녀의 분석에 동의하길 바랐다. 이 감정이 '진짜'라면, 애수도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고 있는 자신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기에. 하지만 지혁은 그 면죄부를 거부했다.


“아니!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 그건… 그건 그런 게 아니었어. 그냥… 당신이….”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당신이 나를 실패작이 아니라고 말해주었으니까’라는 진심을 차마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의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애수 또한 과거의 아픔을 떠올렸다.


“나도… 도망치고 싶었어요, 지혁 씨.”

“…그게 무슨..?”

“나한테도 있었어요. 내 세상의 전부였던 사람. 영원할 거라고 믿었던 사람. 그런데 어느 날, 그 사람이 그냥 사라졌어요. 아무런 설명도, 작별 인사도 없이. 마치 처음부터 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애수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녀가 처음으로 꺼내 보이는 자신의 트라우마였다.


“몇 년 동안 그 사람을 기다렸어요. 그러다 깨달았어요. 난 그 사람을 기다린 게 아니라, 내 세상이 무너진 이유를 납득하고 싶었던 거란 걸. 지혁 씨가 모든 걸 데이터로 분석하려는 것처럼, 나도 내 상처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녀는 지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더 이상 상담사의 연민이 아닌, 같은 상처를 가진 인간의 깊은 공감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


“그래요, 그 헤프닝 이후, 불안했어요. 그 절박한 눈빛이, 마치 과거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그리고...당신에게 빠져들면, 내 세상이 또 한 번 그렇게 무너져 내릴 것 같아서.”


고백이었다.

지혁은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아이. 연인에게 버림받은 여자.

두 사람은 서로의 눈 속에서, 닮아있는 심연을 보았다.


상담실에는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지혁은 처음으로 도망치듯 상담실을 빠져나오지 않았다. 그는 문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 애수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당신이 말하는 ‘의미’ 같은 건 아직 모르겠어. 하지만, 당신이 내민 그 손이 내게 절대적인 변수였다는 건 분명합니다.”


그 말을 남기고, 그는 조용히 돌아섰다.

그리고 지혁은 그녀에게 처음으로 개인적인 메시지를 보냈다.

수만 번의 시뮬레이션을 거쳐 보낸, 세상에서 가장 서툰 한 문장이었다.


[저녁. 먹었습니까?]


그것은 그의 세상에서 새로운 알고리즘을 짜기 위한 첫 번째 코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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