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항 中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으려면>이라는 제목의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당시에 내 기분과 태도가 별로 좋지 않아서였을까.
나는 수년간 초등학교 앞에서 작은 교습소를 운영했었다. 새로 입주한 아파트 앞 상가에 영어는 딱 내 교습소만 들어왔다. 이사 오신 어머니들은 멀리 아이들을 수업하러 보내기 싫다는 이유로 등록을 하고 가셨다. 하나, 둘 아이들이 늘어가는 기쁨과 나의 열정도 비례해 규모도 커져 갈 무렵 몸에 이상징후들이 나타났다. 아프다고, 힘들다고 금세 사업을 접고 싶은 사장은 애초에 없다. 작은 가게라도 일단 시작하려면 수천만 원은 훌쩍 나가니 말이다. 어렵게 이뤄낸 결과물이 하루아침에 무너질까 마음도 점차 위축되었다.
감기라도 앓으면 일주일 정도 몸을 잘 쉬면 툴툴 털고 일어나서 밥을 찾고, 집안 일 하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어쩐 일인지 내 몸은 일주일이 지나도, 한 달이 지나도, 육 개월이 지나도 계속 좋지 않았다. 심한 목통증으로 대학병원까지 갔지만 병명을 찾지 못했다. 누군가와 한두 시간 이야기하고 나면 목에 근육통이 왔고 등은 매일 쑤시고 아팠다. 의사는 자가면역질환이라고 하셨다. 상대방이 아프다는 소리가 잦아지면 가족 간에도 매 번 어루만져주는 것이 버거워지는 시점에 이른다. 그럴 때면 늦은 밤 신에게 기도를 드렸다. 이 고통이 영원히 가지 않도록, 그리고 이 괴로움을 상쇄할 수 있는 즐거운 일들, 더 큰 부자가 되는 그런 허황된 기적을 바랐다. 하지만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신은 내가 그 어려움을 극복할 지혜를 주셨다. 간헐적 단식을 시작한 지 이제 10주가 지났다. 단식의 효과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여전히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고, 일상에서 마음을 쏟는 일이 되었다. 많은 준비가 필요하겠지만 꾸준히 지속할 수 있는 확신이 필요하다. 어떤 일이든 작심삼일이 되는 건 여러 이유가 있지만 결국 그 일이 지속되어야만 하는 타당한 이유를 찾지 못해서가 아닐까? 확실한 이유를 대지 못한다면 어느 상황에서도 이렇게 저렇게 흔들릴 테고, 또 쉽게 그만두게 된다. 바다 위를 떠가는 큰 배를 생각해 보자. 배가 파도로 들썩거릴 수 있으나 항로를 이탈하게 방관하고 있다가는 암초나 또 다른 배와 부딪치는 사고가 발생한다. 배를 운전하는 나는 현재의 위치와 나아갈 방향을 빠르게 찾아내야 하는 감각을 키워야 한다.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는 긴급하게 주위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나처럼 혼자 끙끙대지 말고.
가능한 집밥을 먹으며 다양한 영양소를 챙기는 생활이 점차 익숙해지니 외식은 줄여나가게 되었다. 그럼에도 끊어내기 어려운 관계는 여전히 존재한다. 나와 단박에 끊어내기 어려운 사이엔 경이 언니가 있다. 현재 내가 단식을 하고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는 상황이라 배려를 구할 수 있지만 그녀와 음식을 나누는 일이 마음을 나누는 일이라 생각하기에 같이 먹기로 했다. 외출 후 다시 단식시간을 재설정하면 그만이다. 과하게 먹었다 생각되면 20시간 정도로 여유 있게 단식을 지속한다. 내장지방이 즐어든 기념으로 나를 위한 검은 벨벳 원피스를 선물하는 기쁨을 누렸다. 나는 위 제목에 이렇게 추가하고 싶다. < 몸의 상태가 기분이 되고 나아가서 태도가 되는 것을 경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