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억울이의 낮은 울음
도시의 여름 오후는 무겁게 깔린 먼지와 햇볕으로 더더욱 지쳐 있었다.
변압기 위에 축 늘어진 고양이 한 마리, 이름은 억울이. 이름처럼 언제나 억울한 얼굴이다. 눈꼬리는 처졌고 입매는 내려앉았다. 그러나 억울이란 이름은 성격이 아닌 얼굴에서 비롯되었을 뿐, 억울이는 오히려 꽤 독립적인 고양이다. 혼자 있는 걸 즐기고, 누군가 다가오면 한 발짝쯤 물러난다. 다만 식탐만은 혼자일 수가 없었다.
“야아아옹...”
그날도 억울이는 사람들을 향해 크게 울어보았다. 누군가 간식을 줄까 기대하며, 몸을 세우고 돌돌 말린 짧은 꼬리를 움직였다. 하지만 발소리는 멀어질 뿐, 손길은 오지 않았다. 변압기 위, 훈훈하게 달궈진 철판 아래에서 억울이는 다시 엎드렸다. 이상하게 외로웠다. 항상 혼자 있어도 괜찮았는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해가 저물 무렵, 억울이는 익숙한 길을 따라 오래된 버려진 집으로 돌아왔다. 창문은 깨졌고 담쟁이가 벽을 타고 흐드러졌지만, 고양이 셋이 함께 머무르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마당 한 켠엔 엄마냥이가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조용하고 묵직한 성격의 고양이. 억울이와는 오래전부터 함께 밥을 나눠 먹어온, 억울이의 엄마였다. 얻은 건 별로 없지만, 잃은 게 많은 고양이라는 걸 억울이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엄마냥이 옆에는 루나가 앉아 있었다. 검은 털을 가진 고양이. 말이 없고, 눈빛이 슬프다. 루나가 처음 이 집에 왔을 땐 남자 고양이, 루루와 함께였지만 이제는 혼자다. 루루가 사라지고 난 뒤, 루나는 말수가 줄었고, 엄마냥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녀들이 나누는 침묵에는, 억울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루나는 앞발로 찢어진 전단지를 끌어당겼다. 루루의 얼굴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종이. 낡고 눅눅한 냄새가 났다. 그리고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들어 별을 바라보았다.
억울이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바싹 말라버린 밥그릇 옆에서 작게 중얼였다. “나도 누군가 기다린 적 있는데...” 그 말은 바람에 섞여 흩어졌고, 루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밤, 처음으로 셋이 나란히 앉아 저녁을 먹었다.
억울이, 엄마냥이, 루나
02 엄마냥이의 마음속 계절
도시는 잔인하게도, 계절이 바뀌는 법이 없다.
봄이 와도 따뜻한 건 사람들뿐이고, 여름이 찾아와도 고양이들에게 그늘은 드물다. 엄마냥이는 오래전부터 이 도시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왔다. 고양이답지 않게 조용하고 느리게 움직였고, 늘 눈빛에 먼 기억을 담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딸이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삼색이라고 부르는, 세 가지 빛 털을 가진 새끼 고양이.
언젠가의 봄날, 어쩐지 기운이 없던 딸을 품에 안은 채 작은 빈집 안을 서성였던 기억이 있었다. 그리고 꽃이 예쁘게 핀 어느 날, 딸은 조용히 잠들었다.
삼색이가 떠나기 전까지, 삼색이와 억울이, 엄마냥이는 서로를 다독이고 기대며 나름대로 열심히,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삼색이를 떠나보낸 슬픔은, 셋이 함께 쌓아온 시간만큼이나 깊고 커다란 것이었다. 슬픔에 빠진 엄마냥이는, 잠시 이 도시를 떠나려 했다. 하지만 떠나지 못했다. 떠나기 전날 밤, 한 고양이가 그녀 옆에 조용히 다가와 앉았기 때문이다.
검은 털에 흰 양말을 신은 루루. 그 고양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밤새 엄마냥이 옆을 지켰다. 가끔은 먹을 것을 나누고, 가끔은 등을 부비며 잠을 청했다. 그는 말 대신 온기로 위로하는 법을 알았다. 엄마냥이는 그 조용한 고마움을 오래 간직했다.
그러다 루루도 사라졌다.
엄마냥이는 그날 새벽, 루나가 혼자 남겨진 걸 보았다. 어디서도 루루의 냄새는 남아 있지 않았고, 루나는 더 말이 없어졌다. 엄마냥이는 루나를 챙기기로 했다. 사실 그 아이를 보며 잃어버린 딸이 자꾸 떠올랐다. 자책 같은 감정도 있었고, 또 하나의 잃음이 겹치는 게 두려웠다.
오늘도 해 질 무렵, 두 마리는 갤러리 앞 조명 아래에 나란히 앉았다. 예전엔 루루가 즐겨 앉던 자리였다.
“우리도, 괜찮아질까.” 루나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작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엄마냥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고개를 돌려 루나의 어깨에 이마를 가만히 부볐다. 그리고 아주 작게, 숨처럼 말했다. “조금은.”
03 루나의 밤 산책
밤이면 도시는 낮보다 더 조용해졌다. 가로등 아래는 바닥에 붙은 그림자만이 움직였고, 골목에는 냉장고 모터 소리만이 들렸다. 그 속에서 루나는 홀로 걷는다. 길을 정하지 않는다. 걸었던 길을 또 걷고, 냄새 맡았던 벽을 다시 맡는다. 희미한 기대감이 발걸음을 이끈다.
루루는 자주 그랬다.
“하루에 한 번은, 꼭 같은 자리를 돌자.” 무심한 척 말하고선 루나는 늘 따라다녔다. 그 자리에 뭐가 있는 건지 몰라도, 루루는 중요한 걸 두고 다니지 않는 고양이였다.
오늘 밤도 루나는 돌아다닌다. 쌓인 쓰레기봉투 위에 몸을 실어보고, 버려진 가구 밑에서 뜯어볼 풀을 찾아본다. 그러다 발길이 멈춘다. 산책할 때마다 보던 환풍구. 루루가 가장 좋아했던 자리였다.
환풍구에세 뜨거운 바람이 올라오고, 벽에는 작은 포스터들이 낡은 채 붙어 있었다. 거기, 그림자 하나가 앉아 있었다. 루루였다. 정확히 그 모습, 그 실루엣. 루나는 숨을 멈추고 다가간다. “루루...?” 그러나 그림자는 소리도 없이 사라진다. 남은 것은 따뜻하게 식어버린 철판 위 공기뿐.
비어 있는 자리.
비어 있는 마음.
루나는 천천히 몸을 돌려, 버려진 집으로 돌아간다. 마당 안에는 억울이가 먼저 들어와 있었다. 루나는 말없이 억울이 옆에 누워본다. 조금은 이상한 침묵.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넌 왜 혼자 다녀?” 루나가 물었다.
억울이는 하늘을 올려보고 작게 말했다. “다들 떠나니까.”
04 버려진 집의 비밀
억울이는 버려진 집 2층에 자주 오르지 않는다. 그곳은 오래된 먼지와 쌓인 낙엽, 깨진 창문 너머로 들이치는 차가운 바람이 전부인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무언가에 이끌리듯 계단을 타고 천천히 올라갔다.
방 안은 조용했고, 공기엔 오래된 고양이 냄새가 옅게 배어 있었다. 작은 쿠션 하나가 방 구석에 놓여 있었고, 그 위엔 옛날 털뭉치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억울이는 코끝을 가져다 댔다.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익숙한 냄새였다. 엄마냥이와 비슷하지만, 더 어린 냄새. 그리고 그 냄새를 따라, 잊힌 기억이 하나둘 떠올랐다.
이 집은 원래 누군가 살던 곳이었다.
엄마냥이가 잃어버린 바로 그 딸 아이. 억울이의 동생. 억울이는 그리움이 차올라 조심스럽게 쿠션 위에 몸을 말았다. 따뜻하지도, 편하지도 않았지만, 그곳엔 왠지 마음이 놓였다.
그가 다시 아래로 내려왔을 땐, 엄마냥이와 루나가 마당에서 마주 앉아 있었다. 잠시, 세 마리의 눈빛이 엇갈렸다. 누가 먼저 말을 꺼낸 건지 모르게, 억울이는 입을 열었다. “사실 난 혼자가 더 편한 줄 알았어. 근데... 같이 밥 먹는 게 좋더라. 매일은 아니더라도, 가끔은.”
엄마냥이는 조용히 억울이에게 다가와 고개를 부비고, 루나는 작은 숨을 토하며 억울이 곁에 자리를 잡는다. 대화는 길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밤, 버려진 집의 공기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찬 공기 속에도 어딘가 따뜻한 기운이 스며 있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세 마리는 알았다.
오늘, 우리는 처음으로 진짜 같이 있었다는 걸.
05 세 고양이와 여름의 끝
비가 며칠째 이어졌다.
좁은 골목의 웅덩이마다 하늘빛이 일렁였고, 버려진 집의 지붕 위로 빗물이 똑똑 흘러내렸다. 고양이들에게는 참 지루한 날씨였다. 하지만 그날, 갤러리 앞에 작고 낮은 고양이 쉼터가 생겨 있었다. 누군가 버린 상자에 마침 천이 덮여 있었고, 안에는 따뜻한 천 조각들이 깔려 있었다. 사람이 버린 쓰레기였지만, 고양이들에게는 쉴 공간이 되었다.
그 위엔 낯익은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찢어진 전단지. 젖어 흐릿해졌지만, 루루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엔 작은 메모 하나가 붙어 있었다. “혹시 아직, 찾고 있는 이가 있다면.” 루나는 그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날 밤, 세 마리는 그 쉼터 안으로 들어가 몸을 말았다. 루나는 머리를 조용히 억울이의 몸에 기대고, 억울이는 놀라지 않은 척 눈을 감았다. 엄마냥이는 입구 쪽에 자리를 잡고, 작은 소리로 그들의 숨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말한다. “루루는... 최고의 친구였어.” 루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잃은 것들은 되돌아오지 않지만, 그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며칠 뒤, 비가 그치고 여름이 끝나갈 무렵, 세 마리는 함께 지붕 위로 올랐다. 도시는 그대로였지만, 그 위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억울이는 입을 열었다. “우리가 같이 있는 게 참 행복한 느낌이 들어.”
“어쩌면,” 엄마냥이가 말했다. “처음부터 이 집이 우리 집이었을지도 몰라.”
루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잃은 것보다, 남은 게 더 많을지도 몰라.”
세 마리는 그렇게 여름을 보냈다. 울지도, 웃지도 않았지만, 무언가 하나는 분명히 남았다. 그건 아주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조용하고 단단한 기억이었다.
외전: 비 오는 날의 엄마냥이
비는 느리게, 그러나 끊임없이 내리고 있었다.
지붕 위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철창을 때릴 때마다, 짧은 숨 같은 소리가 터졌다.
버려진 집 안은 축축했지만, 엄마냥이는 그 안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몸을 말고, 꼬리를 앞발 아래 넣고, 눈을 감은 채.
이런 날은 자꾸 생각이 많아졌다.
그리고 생각의 끝에는 늘, 그 아이가 있었다.
회색 털, 조그마한 발.
울음소리는 작았고, 눈빛은 너무 일찍 어른스러웠다.
그 아이가 마지막으로 숨을 고르던 날도, 지금처럼 비가 내렸다.
그날 이후, 엄마냥이는 자주 집을 떠났다.
떠나보려 했다, 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발걸음은 언제나 이 집으로 돌아왔다.
마치 어떤 인연이 고리를 틀어 묶어둔 것처럼.
루루는 그 시기에 나타났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가와 옆에 앉고, 곁에 있었다.
그는 떠나가는 것이 아닌, 머무는 법을 아는 고양이였다.
엄마냥이는 그의 온기 속에서 잠을 청했고, 언젠가는 그를 먼저 찾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역시, 사라졌다.
엄마냥이는 자주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자신이 가진 것들은 결국 다 떠나도록 되어 있는 게 아닐까.
자식도, 곁을 지키던 이도, 따뜻했던 기억들도.
비는 그런 생각을 더 쉽게 꺼내오게 했다.
그러던 중, 루나가 남았다.
그리고 억울이도 어딘가 모르게 그녀 옆에 있었다.
엄마냥이는 무언가를 바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가끔, 누군가의 몸에서 느껴지는 체온은 기대보다도 더 큰 의미를 품곤 했다.
비는 점점 더 세게 내리고 있었다.
문틈으로 바람이 불어오고, 얇은 박스 종이가 물에 젖어 흐물해졌다.
엄마냥이는 그 위에 놓인 루루의 전단지를 바라보았다.
이미 색이 바랬고, 모서리는 찢겨 있었다.
하지만 얼굴은 여전히 또렷했다.
다정한 눈빛, 부드러운 주둥이, 조금은 굽은 꼬리.
그녀는 그 종이 위에 가만히 발을 얹었다.
차가운 감촉.
그러나 마음 한구석은 이상하게 따뜻했다.
문득, 등 뒤에서 소리가 났다.
루나였다.
흠뻑 젖은 몸을 끌고 들어온 그녀가, 엄마냥이 옆에 조용히 누웠다.
엄마냥이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루나의 이마에 조용히 이마를 맞댔다.
아무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비는 계속 내렸고,
버려진 집 안은 그 어느 때보다 조용했지만,
오늘따라 엄마냥이는 덜 외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