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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T맘 Oct 24. 2024

부부싸움 후에 오는 것들

외롭지 않은 각성

 요즘 남편이 재택근무를 하고 있어서 오래간만에 아이 학원 픽드롭을 차로 다니며 편하게 지내고 있다. 어제 학원 마치고 나온 아이를 태우고 집에 오는 길에 날도 우중충하니 떡만둣국이나 해 먹자고 말하니 아이가 하는 말

 "나도 그거 먹고 싶었는데! 역시 엄마는 내 마음을 잘 안다니까? 엄마는 내 마음속의 여주인공!"

 그 말에 행복했던 여주인공은 남편이 칼국수나 먹자해서 사먹고 편히 잠들었는데 바로 다음 날은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어버렸다.


  

 사람이 바뀌는가 안 바뀌는가에 대한 문제는 성악설 성선설 성무선악설 등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사회과학적 다양한 이론까지 출현해야 하는 블록버스터다. 가끔씩 뉴스에  등장하는 밑도 끝도 없이 잔인한 인간들의 초상을 볼 때면 왜 저렇게까지 된 건가 더 들여다보니 환경이 많은 걸 초래한 것 같다. 그러나 환경 탓만 하기에는 더한 환경에서도 번듯이 사는 사람도 많아서 참 어려운 주제다. 그나마 가장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인생의 전반에 걸쳐 일어나는 사실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처리하는지에 대한 생물학적 기질을 포함한 개인적인 차이가 주요 요인이라는 것이다.



 40년을 살면서 선악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개념이지만 사람이 애초에 선악을 타고날 수도 있다는 것을 믿게 됐고, 원래 선한 사람은 악해진다 해도 결국 선하게 돌아올 수 있고 원래 악한 사람은 선해진다 해도 결국 악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즉, 바뀌는 것으로 보인다 해도 그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본성으로 돌아간 것이거나 어떻게 끝날 지 알 수 없는 과정의 일부분이다. 또한 처음 무의 상태에서 악이나 선이 구분될 때, 그리고 전 과정에서 그 모든 걸 조절한다는 측면에서 환경은 매우 중요하다. 어쩌면 이런 내 관념은 인간 같지 않았던 아버지에게 잠시 자라오다가 도망쳐 살아온 여자로서 특수하게 형성된 관념일 수 있겠지만 꼭 선악의 초점이 아니더라도 일상 다반사에서 그 관념은 점점 강해지고 있다. 왜일까?



 사람은 누구나 잘 형성될 수 있으나 이미 어떤 식으로든 형성되었다면 바뀌지 않는 것 같다. 바뀔 수 있는 것이었다면 이미 형성 과정에서부터 필시 수정을 거칠 텐데 그걸 그냥 넘겨버렸다면 그것은 그냥 그 사람은 그래야만 하는 인간인 것이다. 결국 사람은 바뀌지 않기 때문에 육아 전문가들이 '시기를 놓치지 말고 지금 노력하라'라고, 바뀔 수 있을 때 노력할 것을  부모들에게 늘 강조하는 것이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40년 살면서 몇 번씩이나 확인하고 또 확인한 일들이 많이 있었다.



 바로 어젯밤, 아무리 몇 번이고 말해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태도의 딸을 참지 못하고 볼을 꼬집는 바람에 대판 부부싸움을 한 나부터도 그렇다는 걸 또 새삼 확인했다. 우리 집은 어찌 된 영문인지 나는 주양육자이면서 옛날 권위주의적 아버지의 형국을 하고 있고 남편은 주양육자가 아닌데 아이를 감싸고도는 인자한 어머니의 형국을 하고 있는 웃긴 드라마를 쓰고 있다. 남편이 어쩌다 애를 혼낼 때는 '내가 혼내면 더 혼날까 봐'라고..



 남편은 너는 어쩜 변하지를 않냐고 했다. 나는 아이도 어쩜  이렇게 변하지 않는지 모르겠다라며 맞응수하며 줄줄이 소시지를 엮었다. 사실 지난 7살부터 서서히 낌새가 있더니, 지난 초1 신학기 내내 학교에서 허구한 날 산만하다는 전화를 받아가며, 담임으로부터 상담센터에 가보라는 권유를 받고, 내 공부도 내려놓은 채 아이가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도록 애쓰며, 다시 아이를 데리고 상담센터에 가게 될까 봐 미칠 것 같았던, 분명 부부 팀 과제인데 자료조사부터 작성부터 발표까지 모든 걸 혼자 떠안고 지낸 내 노력을 알기는 하느냐, 내가 별 문제없다는 듯 담담히 구니까 진짜 그런 줄 안 거냐며 악을 썼다.  노력들은 보지 않고 아이만 감싸는 것도 지겹다며 미운 마흔 살처럼 굴었다.



 요즘은 아이와 말하다 보면 자꾸 열이 뻗쳐서 가족 여행도 남편과 애랑 둘이서만 갔으면 생각할 때도 있다. 지난 여름휴가는 일단 태풍 때문에 망한 거지만 아이와 나의 갈등, 그로 인한 부부싸움으로 망한 것도 컸다. 집에서야 집이라 치고 여행 가서 돈은 돈대로 쓰면서 그러고 있으려니 아주 더 짜증이 나 미칠 지경이었다. 아이 때문에 지쳐서 아이가 조금 미워진 내가 작은 문제에도 먼저 발동이 걸릴 때도 있는 것 같다. 아이가 말을 안 듣고 우기고 버티고 짜증을 부릴 때마다 1학기 때의 기억들이 악령처럼 벌떡벌떡 튀어나오며 나를 겁주는 것이었다. '쯧쯧, 너의 노력으로는 결국 안 되는구나. 다시 상담센터를 가야겠네?'그런 식으로. 그리고 행여 '고칠 수 있는 시기'를 놓칠까 봐 불안한 것이다. 하지만 남편이 그건 너에게만 유효한 악령이라 네가 떨쳐낼 일이며 아이는 겨우 초1일 뿐이고 어차피 반복해야 할 훈육이니 벌써 진을 빼지 말라는 말에는 더 할 말이 없었다.



 네 노력은 알지만 아이에게 격려 같은 걸 할 줄 알긴 하냐는 남편의 말에 불현듯, 쓰레기 아빠에게는 물론 늘 유약했던 엄마에게도 제대로 격려를 받고 살아본 적은 없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다 큰 성인이 되어서야 엄마에게 따지고 울분을 토해내다 미쳐버려서 결국 일시적 자아분열과 언제 자아가 합쳐질지 모른다는, 해리성 인격장애진단을 받고 나서야 엄마에게 '너를 제대로 격려하지 못하고 살았다'는 인정과 사과를 받으며 서서히 정상인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19년 전의 과거까지. 그렇게 너무 늦게 받기 시작한 격려는 사실상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오래 받아온 사람들에 비하자면 체내에 녹아들지 못했음을, 그로 인해 아이에게 격려나 칭찬은 인색했음을 확인하며 눈이 퉁퉁 붓도록 울어댔다.



 아까 말한 40년을 살면서 확인하고 또 확인한 주변의 인간상과 내가 자주 과오를 저지르는 이런 건 확인이라고 해야 맞지, '깨닫는다'라고 말할 수도 없다. 깨닫는 건 진리나 원리 같은 것들이지 하찮은 인간이 돼버려서 하찮은 짓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지극한 사실 따위는 감히 깨달음의 영역에 들어갈 자격도 없다. 내가 체내에 아직 녹아들지 못한 그 격려와 칭찬이라는 것을 어떻게든 노력해 가면서 평정심을 잃고 꿀밤을 때리는 짓거리를 그만두게 된다면, 앞서 말한 관념에 비추어볼 때 나는 원래 착한 사람인 것이다. 늘 내가 주변으로부터 자주 듣는 '그래도(그렇게 살았음에도) 착해'그 말처럼 말이다. 이렇게나마 희망의 불씨를 지펴보련다.



 흔히 '사랑하니까 그래'라고 너무 쉽게 타인에게 개입하고 고치려 드는 문제들이 자주 발생한다. 나는 '부모니까 그래'라고 앞부분이 조금 바뀌었을 뿐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문제적인 어느 부분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감당하고 받아들일 수 없으면 관계를 끊으면 된다.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에서는 어느 정도는 개입을 해서라도 좋은 사람이 되게끔 만들어야 하는 부모의 역할과 동시에 자식이 자신으로부터 나왔지만 완벽한 개체임을 인정하고 대해야 하는 것 때문에 더욱 미묘하고 어렵다.



 누군가와는 관계가 끊어질만한 문제가 사사로운 것이라서 또 다른 누군가와는 썩 괜찮게 잘 지낼 수 있거나 그 문제가 전혀 사사롭지 않고 사회국가적 차원에서 다뤄야 하는 인간이거나, 그 양극의 수직선상에 사람들이 분포되어 있다. 즉 보통의 사람이라면 누군가에게는 좋은 사람이고 누군가에겐 별로인 사람이고 인간이 맞나 싶은, 모두에게 별로인 사람이 있다. 결혼이라 함은 보통의 사람 둘이 만나 이루어지는 게 보통이다. 안타깝지만 우리 어머니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다. 부부싸움이 아닌 일방적이고 잔인한 폭행이었던 세월. 나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기 위해 도망쳤다. 그런 면에서 나는 보통의 결혼에 성공했기에 이렇게 부부싸움이라도 할 수 있음에 때로는 변태적 이게도 감사한 마음마저 든다.


너와! 나의! 평등! 고리!


 그런 보통의 부부라면 반드시 같아야만 하는 것은 바로 '코드'다. 유퀴즈 온 더 블록에서 장항준 감독이 부부가 웃는 포인트가 같으면 일상이 즐겁고 울거나 화나는 포인트가 같다는 건 세계관과 이데올로기가 같은 괘를 갖고 있는 것이라 한 말에 공감한다. 난 웃겨 죽겠는데 쟤는 저게 뭐가 웃겨 이러고 내가 한 개그를 쟤가 하나도 이해 못 해서 개그를 설명해줘야만 해서 슬퍼지고 난 지금 이 세상 돌아가는 꼴이 아주 미칠 지경인데 쟤는 뭐가 문제냐는 식이면 정말 같이 살 맛이 안 나는 거다. 그런 코드가 정말 다른데도 그게 매력인 줄 알고 결혼했거나 그 중요한 건 보지 않은 채 다른 조건에 매력을 느껴 결혼한 사람들은 해가 갈수록 서로에게 지쳐간다. 특히 좀 더 유쾌한 쪽이 매사 진지한 쪽보다 쉽게 지쳐 눈을 다른데 돌릴 수 있기 때문에 결혼 생활에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



 비록 이렇게 부부싸움을 진탕하고 글을 쓰고 있지만 우리 부부는 그런 코드 면에서 봤을 때 꽤나 여러 개의 코드들이 잘 맞는 편에 속한다. 가끔씩 둘이 술 한 잔 하는 일상을 즐기고 좋아하는 음식도 비슷하고 책임감을 중요시 여기며 사람과 사회를 보는 관점 등이 비슷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코드가 잘 맞는다고 해서 완전하게 행복한 것은 아니며 코드라는 것은 한두 개가 아니라서 다 맞기도 힘들다. 또한 코드가 안 맞는다고 해서 아예 못 살 이유보다는 같이 살아야 하는 이유나 현실이 더 클 수 있는 게 부부다.



 이번 부부싸움은 싸움이라 해야 할지 나의 심리분석이라 해야 할지 모르게 억장이 무너지듯 울며 고해성사를 하는 생경한 내 모습으로 막을 내렸다. 남편은 웬일로 '나라도 격려를 해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면서 발톱을 숨기고 바짝 세운 털들을 차분히 내렸다. 하, 결혼 전의 내 별명은 미친 개였는데...! 어지간해선 싸우지 않지만 한 번 눈깔이 돌면 내가 다치더라도 끝장을 봤다. 그런 내가 이토록 울며 퉁퉁 부은 눈으로 어제 못 한 떡만둣국을 끓여 같이 먹으며 그 몰골로 마주 한 채 가을여행 계획을 짜는 모든 게 딱히 창피하지도 않고 자연스러운 이 결혼생활의 경이로움이란...! 자신의 고귀함을 유지하고 싶은 자에게는 결혼을 말릴 것이며 자신의 모든 국면을 깨부수고 새롭게 태어나고 싶은 자에게만 결혼을 추천하겠다. 혼생활에 대한 지혜를 더 잘 알고 싶다면 아래 링크글도 읽어보길 바란다.


나 돌게 하지말라고 했지....!

https://brunch.co.kr/@duwjstk85/27

 

 딸아이가 학교를 마치고 집에 들어왔는데 엄마가 퉁퉁 부은 눈으로 문을 여니 직감적으로 뭘 안 듯이, 말로는 엄마 어디 아프냐고 모르는 척 묻는데 딸아이의 눈은 한 껏 커져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대 놓고 '아프긴 뭘 아파 너 때문에 속상해서 울었지.'라고 말하는데도 평소 같으면 '내가 뭘 어쨌다고?' 할 법한데, 아무런 말대꾸 없이 그저 가만히 듣더니 정해진 휴식시간도 알아서 지키고 제 방에 스스로 들어가 공부를 한다. 저럴 때 보면 속이 다 꽉 찼는데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인가 싶다. 기억 속 악령은 좀 떨쳐내고 여유 속의 훈육을 위해 재정립이 필요하다.



 부부 싸움 후에 오는 것들은 외롭지 않은, 온 가족의 각성이다. 그리고 눈 뜨자마자 세수도 양치도 안 한 채 끔찍한 몰골로 싸우다 심지어 막 울기까지 해서 더욱 끔찍한 몰골이 된 얼굴을 마주하고 같이 밥을 먹는, 진정한 사랑이 온다. 절대 연애 때처럼 단장을 한 채로  예쁘게 울지 않았음에도 난 여전히 여주인공인 것이다. 30년은 고통과 위기를 숱하게 버티고 10년은 점점 어른이 되어가며 어떻게나 힘들게 얻은 여주인공 자리인데, 놓칠 수 없다. 조만간 식도락과 단풍구경 겸 남쪽으로 여행 갈 예정인데 조금은 두렵지만, 워크숍이다 생각하고... 쟤는 내 딸이 아니라 우리 가족 신입이니 차분히 잘 가르쳐주자... 쟤는 잘 모를 수밖에 없으니 열받을 것도 없다... 차라리 그 마음으로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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