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에 이천만 원이 달하는 등록금을 부모님이 지원하느라 본인은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다고 했다. 본인을 위해 희생한 분들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면서 결혼은 부모가 정해주는 사람과 해야 한다고 했다. 친척형이 있는데 그 또한 피아노선생을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겠다고 부모에게 갔더니, 부모가 절연하자고 했다고 말했다. 친척형은 와이프를 임신시켜 결혼했고 부모와 절연했다. 명절 때도 안 오는 친척형을 보며 그의 부모는 '거봐라,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을 하니 명절 분위기가 이런 거 아니니.' 하면서 종용한다고 했다. 나는 그런 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부모가 반대한다고 해도 내가 확신이 있으면 끌고 나갈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내가 아닌 것이었다.
죽도록 싫었던 아버지 환갑날에도 마지막까지 가기 힘들어하자 같이 가주겠다고 한 사람이었다. 가족에게 사람을 보여준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서 그랬던 건지, 아니면 그냥 내가 힘들어하는 모습이 싫어 가주었던 건지 지금까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자리에 참석했고, 가족은 내가 그와 결혼하는 줄 알고 있었고, 나 또한 그가 그런 마음으로 그 자리에 오게 된 것이라 생각했다.
"후후. 언니가 만났던 남자 스타일과 다르네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아버지께 말했다.
"수 집까지 안전히 데려다주고 가겠습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기름 값하라고 10만 원을 건넸다.
"만났던 스타일이 어땠길래 동생이 그러는 거야?"
라고 그가 물었지만 그냥 웃음으로 흘리고 말았다.
그와 함께 간 결혼식은 그가 다닌 피아노 학원의 친구가 결혼하기 때문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녀는 그를 좋아했다고 했다. 하지만 거절했고, 그녀는 다른 사람을 찾아서 결혼하는 것이었다. 그는 본인의 차로 다 같이 가자며, 피아노학원의 친구들과 나까지 포함해서 총 5명이 그의 suv를 타고 갔다. 가는 날은 날이 화창했다. 계룡의 카페에서 커피를 픽업한 다음 대전에서 친구들을 만나서 서울로 다 같이 이동했다. 가는 길에는 주식이야기를 주로 했는데 현대차가 계속 오르던 시점이어서 한 사람은 계속해서 현차를 외쳤다. 그 후로도 신기하게 주가는 우상향 했다. 그리고 박사후삼전 연구원으로 취업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여자 친구를 만나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여자는 나보다 키가 작고 오늘 결혼하는 사람의 친구라고 했다. 친구가 좋아했던 사람옆의 새로운 사람이 나였고, 그에 따라 나를 만나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간 결혼식의 신부가 나보다 안 이쁜 것 같아서 안도했다. 우리는 결혼식에 갔다 다 같이 차를 타고 내려왔고, 운전은 남자 친구가 계속했다. 남자 친구는 인정이 많고 여유로운 성격이어서 그들의 하는 말에 맞장구쳐주고 일일이 내려주었다. 바보 같을 정도로 착했지만, 그게 또 그의 성격인 것이었다. 만나면서 처음에 좋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나중에 답답하게 느껴진다는 것도 알았다. 나는 그의 유함이 좋았지만 유하다는 건 공감능력이 좋고 대인관계가 좋지만 결정이 필요한 순간에는 우유부단하다는 것이었다.
그를 만날수록 나도 답답한 순간이 분명 있었다. 가령 리터당 몇십 원 차이나는 걸 아끼려고 일부러 먼 길을 돌아가는 행위가 이해가 안 됐다. 하지만 그건 그냥 그의 습관과도 비슷한 것이었다. 장을 볼 때도 몇 푼 아끼려고 하는 게 오히려 여자인 나보다도 꼼꼼했다. 나중에서야 그게 큰돈을 잃은 후의 상실감 때문에 그랬단 걸 알았고, 그런 그의 행동들도 뒤 돌아봤을 때 얼마나 자괴감을 일으켰을까. 언젠가 지나가면서 말했던 '내가 그 돈만 안 잃었다면 데이트통장을 만들지도 않았을 거고 한 번씩 통 크게 쏘기도 했을 텐데 그게 아쉬워'라고 했다.
세상의 가장 높은 곳에 가서 경치를 감상하고 싶었다. 그럴 때면 조망할 수 있는 건물에 가서 비를 구경했다. 그와의 추억은 다 잊었다고 생각했다. 찍은 사진을 다 지웠고 기록 같은 것도 없었다. 하지만 다 잊었다고 생각한 그런 건 떠올리면 수면 밑바닥에 가라앉아있던 것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곤 했다. 그렇게 폭우 속을 헤치며 드라이빙했던 것, 운전을 가르쳐준다며 공터를 배회하며 불안한 내 운전에 더 불안해하곤 했던 그는 어느 날 말했다. 아무렇지 않게 카페를 간 날이었다. 그날은 그가 본가를 다녀오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다.
"우리 잠깐 시간을 갖자"
"그게 무슨 말이야? 시간을 갖는다는 게 무슨 의민지 몰라서 하는 말이야?"
그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주말 오후에 그런 말을 했다. 나는 머릿속이 둔탁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시킨 빵을 우적우적 씹다가 이해가 안 된다는 양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가 말한 기간은 2주였다.
2주가 지났다. 그가 우리 집으로 왔다. 그는 결국 통보했던 것이다. 나는 아무런 준비도 안 됐는데 그렇게 이별을 준비하고 본인의 감정을 내가 받아들이길 바라고 있었다.
"후회할 거야"
그는 울고 있는 나를 내버려 두고 집을 나섰다. 한 시간 정도 우니까 눈물이 말라서 나오지 않았다. 그럼 그동안 쌓아온 시간들은 뭐였지? 옆에 있어달라고 했던 건? 그는 그냥 본인의 아픔에 내가 필요했던 것이었다. 한순간도 나를 사랑한 게 아니었다. 어쩌면 남에게 보일 그럴듯한 애인을 원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나 또한 그의 사회적 지위로 내세우기 위해 그를 사귀었던 것이었다. 외모도 내가 원하는 것에 못 미치고, 그 밖의 것들이 부족한데 그가 가지고 있는 건 타이틀밖에 없었다.
그는 6개월 정도 있다 회사 앞에 나타났다. 어느 날과 다를 것 없이 퇴근하던 날이었다. 그가 갑자기 앞에 나타나선 잠깐 이야기 좀 하자고 했다. 말없이 차로 가 시동을 켰다. 그와 헤어지면 필요할 것이란 생각에 구매한 흰색 k5였다. 삼겹살 집에 가서 고기를 구웠다. 그는 잘 지냈냐고 했다. 그는 나와 함께 간 치과에 치료를 받으러 갔다 들렀다고 했다.
"나 이사했어. 서울로."
"잘됐네. 레지던트 생활은 어때?"
"바쁘지. 정신없고."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그를 역으로 데려다줬다. 항상 그의 차를 탔었지만, 이젠 내 차에 그를 태우고 갔다. 나는 그와 헤어질 거란걸 알고 차를 사야겠다고 결심했다. 그와 함께 움직이는 삶이 아닌 내가 주체가 되어 움직이는 삶이 필요했다. 그러려면 차가 필수였다.
그와 역에 도착했다.
"갈게"
"그동안 너무 힘들었어."
라고 말하는 순간에도 내가 들었던 생각은 '철저히 나를 피해자로 만들 것'이었다. 그런 나의 마지막 모습이 그의 뇌리에 박제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동안 그가 잘못한 점이나, 마음에 안 들었던 것들을 비난하듯 쏟아낼 수도 있었는데 그냥 그렇게 했다. 본능적으로.
그날 이후로 그의 연락은 없었다. 나 또한 그에게 연락하는 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