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소설이 긋는 실존 곡선
요한복음 8:48~59[200주년 신약성서]
8:56 당신들의 조상 아브라함은 내 날을 보겠기에 신명이 났습니다. 과연 그는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8:57 그러자 유대인들이 예수께 말했다. "당신은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단 말이오?"
8:5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진실히 진실히 당신들에게 이릅니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나는 있습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장편소설 『죄와 벌』의 후일담 형식으로 전해지는 마지막 장면에는 시공을 초월한 만남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멀리 강 건너 언덕에서 노랫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햇빛이 퍼붓는 그 끝없는 초원 위에 유목민의 천막들이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점점이 얼룩져 있었다. 거기에는 자유가 있었다. 그리고 이곳 사람들하고는 조금도 닮지 않은 별개의 인간들이 생활하고 있었다. 거기서는 시간조차 걸음을 멈추고, 흡사 아브라함과 그의 가축 시대가 아직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라스콜니코프는 두 여성을 무참히 살해한 자였습니다. 그는 대학생 신분으로 초인 사상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모든 인간을 평범한 사람과 뛰어난 사람, 이 둘로 구분을 지어 생각했는데, 나폴레옹을 예로 들면서 ‘평범한 사람은 사회 법도와 질서를 당연히 따라야 하지만, 뛰어난 사람은 무법적으로 살아도 되며 옳다고 여겨진다면 살인을 저질러도 마땅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살인을 정당화하고 초인 사상을 구축하려던 그의 시도는 양심의 가책으로 실패하게 됩니다. 아무런 감흥이 없는 시체처럼 관 속에 갇힌 듯한 그였습니다. 살인 행위로 인해서 생긴 심리적인 압박감과 불안, 그리고 그가 속해 있는 세계와의 단절은 그를 삶의 끝으로 몰아붙였습니다. 종국에는 자신이 완전히 틀렸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살인 동기는 사회적 박탈감이 그의 주된 감정이었고, 현실도피였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구축한 사상에 의해 산산이 부서진 그를 구원한 건 다름이 아닌 기독교 신앙이었습니다. 그가 목초지에서 아브라함과 마주한 순간은 죽은 감각 너머로 다시 생명의 감흥을 느끼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이전보다도 자유롭고 살아 있음을 깊이 느끼는 삶이 되었습니다. 죄를 인정하고 주어진 형벌을 마땅히 받아들이며 소설이 끝납니다.
시공을 초월한 라스콜니코프와 아브라함의 만남은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낯선 이야기가 아닐지 모릅니다.
신앙은 내 힘으로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막다른 곤경 속에서 생겨납니다. 곤경에 빠진 자는 살아있는 상태도 죽어 있는 상태도 아닙니다. 살아 있지만 자신이 살아내야 하는 삶과 단절된 상태입니다. 그때는 더 이상 자신이 안전하다고 속일 수도 없습니다. 세상에 대한 적대감이 생기고, 삶을 지속하기가 불안하고, 자꾸만 외로움으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납니다. 막다른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과 화해하는 길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서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이삭을 번제물로 받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과 이삭을 향한 사랑의 열망이 그의 안에서 정면충돌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두렵고 떨리는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자기의 생각대로 삶을 스스로 구축하고 통제하려 했던 이전의 자신을 부정하고, 순종으로 하나님의 뜻을 자기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연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위협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던 세상은 사라졌습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 안에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그는 열방의 아버지, 믿음의 조상으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게 됩니다.
“내가 반드시 너에게 큰 복을 주며, 너의 자손이 크게 불어나서,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지게 하겠다. 너의 자손은 원수의 성을 차지할 것이다.” (창22:17)
예수께 귀신이 들렸다며 모욕하는 유대인들은 이 언약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유전적 혈족으로서 유대인의 수가 많아지는 걸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율법) 앞에 두렵고 떨리는 진실한 마음으로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신앙을 따르는 믿음의 후손들이 될 수 없었습니다.
51절, 진실히 진실히 당신들에게 이릅니다. 누가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겪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은 자기 존재로부터 소외된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완전한 연합을 이루신 분이기에, 소외된 인간이 겪는 불안과 곤경을 완전히 극복하셨습니다. 영원한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중재자 되신 예수님이, 존재 자체이신 하나님과 화해될 수 있는 새 길을 여신 것입니다.
56절, 당신들의 조상 아브라함은 내 날을 보겠기에 신명이 났습니다. 과연 그는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56절에서 저는 죄와 벌의 라스콜니코프가 시베리아 들판에서 자유로운 아브라함을 마주 볼 때 뜨거운 우수가 그에게 밀려오는 생명의 이미지가 떠올랐습니다. 라스콜니코프가 겪은 신비주의적인 신앙을 놓고 고민해 보니까, 신앙의 고백보다 삶과 심리에 영향을 받는 존재론적인 변화이면서 실존적인 회복이 같았습니다. 라스콜니코프의 그런 신앙적 변화에서 아브라함의 실존적인 체험, 그리고 이러한 진실한 신앙과는 동떨어진 유대인들의 착각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려졌습니다.
마지막으로 56절의 예수님과 아브라함이 만나게 되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소설 「시공을 초월한 만남」을 적어봅니다.
“시간조차 걸음을 멈춘 자리에서 한 무리가 예수라 부르는 청년이 아브라함의 눈에 들어왔다. 군중 앞에 열변을 토하는 그의 음성은 아브라함의 귀가를 날카롭게 때렸다. 그의 말들을 가만히 듣다가 아브라함은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이 만난 하나님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더 가까이 다가가 보기로 했다. 무리의 끝에 선 아브라함에게 예수의 말은 사자의 포효처럼 우렁찼고, 단어 하나마다 확신에 차 있었다는 걸 느꼈다. 숨죽이고 그의 강론을 얼마간 듣다가 아브라함은 가슴이 불편할 정도로 상당히 뜨거워졌다. 무엇보다, 예수를 둘러싼 무리의 모습을 보고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 자신을 감싸던 황홀함이 이곳의 모든 존재를 휘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브라함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생각했다. 이분은 하나님의 참된 아들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