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망은 어디까지나 로망일 뿐...
내 '단독주택 로망'은 텃밭이다. 마당에 미관을 해치지 않을 만큼의 자그마한 텃밭을 꾸며놓고, 밥 먹기 전 고추며 상추며 필요한 재료를 금세 뚝 따와서 신선하게 먹는 것. 파스타를 만들다 잠깐 나가서 바질 잎을 따 오는 것. 빨갛게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완숙된 토마토를 그 자리에서 뚝 따서 쓱쓱 닦아서 한 입 베어 무는 것- 뭐 이런 것들. 단독주택에 이사와 짐 정리가 끝나니 5월이 시작됐다. 더 늦기 전에 '로망'을 실현하기 위해 농사 계획을 세웠다. 마당 한쪽을 파서 텃밭을 꾸미면 그냥 시골집 뒷마당이 돼 버릴 것 같아서 '플랜트 박스'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단골 화원 사장님께 여쭤봤더니 한두 개 살 거면 맞추는 것보다 기성품 사는 게 낫다고 해서 네이버에서 목재 플랜트 박스 두 개를 주문해 마당에 놨다. 제일 신나는 단계는 모종 쇼핑! 로메인, 적상추, 깻잎에 고추는 매운 거 안 매운 거 하나씩, 방울토마토는 3개, 바질에 가지까지, 아주 그냥 '신나게' 모종을 사들여서 집으로 돌아왔다. 여기까지는. 참 좋았다.
막상 마당 어디에 플랜트 박스를 놓을까 살펴보니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마당에 생각보다 볕이 잘 들지 않는 거였다! 아파트 베란다에서도 방울토마토를 키웠으니, 마당 있는 집이면 그냥 야외 아무데서나 텃밭을 꾸며도 주말농장처럼 잘 되는 건 줄 알았다. 그런데 토마토는, 상추는, 고추는... 그냥 내가 데려온 애들 다, 햇볕을 정말 '종일' 쬐어야 건강하게 잘 크는 작물들이었다. 반면 우리 집 마당은 주변 집들은 물론 소나무나 보리수나무 등 키 큰 조경수가 드리운 그늘 때문에, 이쪽 몇 시간-저쪽 몇 시간 볕이 들고 해가 끝나버렸다. 아차차... 싶었지만... 일단 꽃이 잘 핀 목단 앞에 플랜트 박스를 놓고 모종들을 심어봤다. 그리고 약 두 달.
상추는 몇 번 뜯어먹었지만 곧 비실비실 힘을 잃었고, 토마토는 열매는 거의 맺지 않은 채 키만 계속 크고 있고 가지는 키도 크지 못한 채 열매 없이 꽃이 저버렸고 바질은 내가 파스타를 만들기도 전에 애벌레가 다 뜯어먹었다. 단독주택 이사 첫 해 텃밭은- 실패다.
아무래도 볕을 제대로 쬐지 못한 게 원인이지 않을까 싶다. 남향이어서 무조건 잘 될 줄 알았는데. 햇볕이 종일 충분히 들지 않는다는 점은 미처 생각 못했던 부분이다. 집을 구할 때 나름 신중하게 살펴본다고 했지만 '마당에 볕이 얼마나 오래 드는지' 같은 정보는 미처 알기 힘들다. 메인 차도 아닌 뒷길 도보 쪽으로 아담하게 자리 잡은 우리 집 마당은 사람들 시선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장점이 있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는데 각종 조경수로 그늘이 지는 건 몰랐다. 물론 그늘이 있어서 뀨가 한여름에도 밖에서 놀기 좋다는 점, 1층이 참 시원하다는 장점도 있다. 반대로 텃밭을 일굴 수 없다는 걸 새로 알게 된 거다. (그리고 한여름 시원한 만큼 한겨울에는 무척 춥겠구나- 싶다.) 아파트 살 때는 마당 있는 집이 부러워 마냥 '흙 한 뙈기만 있음 됐지' 했는데. 막상 이사와 살아보니 주택의 위치, 마당 모양새에 따른 장점, 단점이 세세하게 보인다. 이 또한 경험으로- 잘 쌓아둔다.
기대만큼 주렁주렁 방울토마토를 수확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하나 둘 맺힌 열매가 제법 익어간다. 수확의 기쁨은 뀨 몫. 마당 토마토가 귀하다 보니 맛을 본 것도 뀨밖에 없는데, 먹을 때마다 엄지손가락을 척 올린다. (열매 없이 키만 크고 있지만) 곁가지를 따줄 때 나는 토마토 나무 특유의 신선한 향이 참 좋다. 퇴근하고 마당에 잠시 나가 플랜트 박스에 물 주는 순간도 참 좋다. 텃밭을 포기하긴 아쉬우니. 내년에는 테라스 일부를 활용하고, 마당에는 음지 작물을 심어볼까 싶다. 단독주택의 여름은 참 좋은 날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