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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ESIA Feb 09. 2020

<더 킹: 헨리 5세>

웃음이 광기가 되고, 승리가 패배가 되는 세상을 보여주는 영화

약속해줘요. 나에게 진실만을 말하겠다고.
출처: 영화 <더 킹: 헨리 5세>

뒷짐 진 손을 뒤로 숨겨야 할 게 많았다. 전쟁을 앞두고 나아가는 항해에서 그의 외로워 보이는 어깨를, 거짓된 명분의 전말을 알게 되었을 때의 분노 일지, 슬픔 일지 모를 그 복잡한 시선을. 가장 듬직한 오랜 친구를 전장에서 잃었을 때는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 옆에 철퍼덕 앉아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간신히 다스리는 것뿐. 수많은 병사들 앞에선 우리 모두가 하나의 잉글랜드라며 소리치고, 휘양 찬란하게 검을 휘두르며 돌격한다. 사람이란 참 부서질 듯 연약하면서도, 또다시 일어서고야 마는 강인한 존재다.


할은 선왕인 자기 아버지와는 다를 거라 했다. 그가 왕이 된 이상 세상은 달라질 것이라 자신했다. 확실히 그가 통치하는 방식은 달랐다. 무자비한 폭력과 전쟁의 시간을 잠재우고 평화의 길을 탐색하고자 했다. 무고한 이들이 피들이 피를 흘려야 하는 이 싸움의 본질이 싫어서 무모할 지라도 자기 목숨을 걸고 한 판 붙자고 제안한다. 방탕한 삶을 살던 과거를 청산하고 어쨌든 왕좌에 올랐을 때에도 주변 신하와 믿음직스러운 친구 존에게 몇 번이나 의견을 물었다. 이 길이 옳은지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기에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수 없이 질문을 던지고 다가오는 선택의 순간을 신중하게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허나 삶이란 게 참 공허하다. 할이 영화 초반부 여색과 술놀이를 즐기는 장면 속 웃어 보이는 모습에서 광기를 보았다. 전쟁도 그러하다. 누구는 명예라 하고, 누구는 정말로 그 전장에서 승리를 맛보곤 하지만 그것도 일순간 일 뿐이다. 결국에는 피로 물들고 잔인하게 죽어나간 목숨들만 자리한다. 웃음과 광기, 승리와 패배. 인간을 극과 극으로 몰고 가는 묘하게 닮은 듯 다른 이 간극은 깊게 빠져들수록 우리를 더 혼란스럽게 한다.


동생을 대신해 자처한 훗스퍼와 일대일 결투는 마치 어린 싸움 같았다. 전혀 멋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살려고 발버둥 치고 죽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건 영화 후반부에 보여지는 프랑스와의 진흙탕 같은 전쟁의 예고에 불과했다. 누군가는 명예 혹은 평화라 하는 이 전쟁의 실체는 이렇게나 처절하고, 구차하고, 유치하다.


한편으론, 할의 작고 왜소한 모습이 이런 삶 전체를 대변하는 것 같기도 했다. 부서질 것만 같은 몸뚱이로 오래도 버틴다. 전쟁에서는 무거운 철갑으로 온몸을 두르고 나가는 게 정석이다. 하지만 그 모든 걸 내던지고 날렵하게 적의 빈틈을 간파해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싸움에서 나름의 선방까지 치고 나갔다. 그 작은 것이 생각보다 강한 존재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무거운 마음을 가슴에 품었다. 혹자가 반드시 전쟁을 해야만 한다고 쉬이 이야기하던 것을 오랫동안 고민하고, 질문하고, 또다시 고민했던 할에게는 절대로 가벼운 마음이 아니다.


마지막에 할은 캐서린으로부터 가장 가까이서 자신을 지켜봐 왔던 사람에게서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해왔던 이 길이 실은 짜 맞춰진 명분에 불과했음을 알게 되었을 때의 심정이란 참, 이루 말할 수 없다. 자비는 없다. 대주교를 무참히 죽인 뒤, 그의 아내가 될 캐서린에게 다가와서 하는 말. 다른 건 몰라도 단 하나. 진실만을 약속해달라는 것. 그 말을 하는 할의 마지막 얼굴에서 앞으로 그의 삶이 얼마나 지옥 같을지 상상하게 된다. 숙고는 의심으로 바뀌고, 그 의심이 불신이 될 것이다. 초반부 헨리 4세의 그 차가움이 왠지 할의 마지막 표정과 맞물린다. 그의 아버지의 시작도 이러하지 않았을까.


죽음을 앞두고 할의 아버지는 자신이 무엇을 위해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전야의 전장에서 할 역시 같은 말을 했다. 비극적인 상황은 아무리 피하려고 돌고 돌아도 자꾸만 되돌아온다. 가장 피하고 싶은 이 순간으로 다시금 되돌아온다. 진흙탕 같은 삶에서 허우적대는 인간은 그 끝에 무엇을 기다리며 처절하게 안간힘을 쓰는가.


무엇을 위해, 이리도.


평점: ★★★★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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