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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ESIA Dec 24. 2020

<퓨리>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고, 여기 살아있음에 당신은 영웅이라 말하는 영화

이상은 평화롭지만 역사는 폭력적이다.
출처: 영화 <퓨리>

그들을 향해 살아남아 있는 것도 기적이라 말할 수 있다면, 그 기적이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기적일 것이다. 묵직하고 단단한 이 탱크처럼 다 덤벼보라는 듯 굳세어라 움직이지만 그 안은 상처투성이다. 탱크 내부는 그야말로 전장에서 죽고 살아남는 자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듯하다. 온갖 총알들을 비롯한 전투 장비들, 닦아내려 할수록 더 선명해지는 핏자국, 가족들을 향한 그리움이 담긴 한 장의 사진, 차마 지울 수 없는 파편처럼 남은 전우의 얼굴. 강철 같은 탱크 안에는 이렇게 갖은 아픔들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탱크 바깥에 쓰인 ‘FURY’. 이 탱크의 분노는 진정 어느 곳을 향해 장전되고 있나. 적진일까. 그게 아니라면 인간만큼이나 잔인한 이 현실일까.


아프리카에서부터 최고의 실력을 뽐내며 살아남아온 워대디와 그의 부대원들. 어느 날, 행정병이었다가 차출되어 전장에 대해 전무한 어린 노먼이 그들의 부대로 들어오게 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노먼은 전장의 공포와 살인에 대한 두려움에 익숙지 않았다. 이에 워대디와 그를 따르는 병사들은 그에게 가혹하게 명령을 내리며 싸우라고 소리친다. 하루빨리 이 전쟁의 현실을 보지 않으면 가장 먼저 죽게 되는 건 바로 이 아이일 테니까. 그 과정에서 노먼이 점점 잔혹하게 변하는 모습을 보자 워대디는 고뇌한다. 전쟁의 고통을 먼저 깨우친 윗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들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생각한다. 모든 것들이 터지고 불에 타 사라지는 이 전쟁 속에서도 끝까지 지켜야 하는 게 무엇인지를.


애초에 탱크 4대가 행군을 한 이유는 적군에게 몰려있는 아군 1소대를 구출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이 임무가 내려졌을 때 몇몇 하사들은 곧바로 베를린으로 가지 않고 아군을 구하러 돌아가는 것에 불만을 던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결국에 아군을 구하러 가는 길을 선택한다. 3대의 탱크가 무너지고 정작 본연의 임무를 완수해내지는 못하지만, 그리고 영화 말미 몰려오는 독일군에 대항해 남은 것이라곤 다 쓰러져가는 탱크 한 대와 노먼 하나뿐이지만, 워대디와 그의 병사들이 보여준 여정은 단순히 전쟁의 일면만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이렇게 잔인한 현실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이유를 찾아가는 데에 의미가 있다. 독일군이 지나간 후, 노먼이 탱크 밑에서 숨어있다 지쳐 잠이 들었을 때 흰 말이 지나간다. 우리는 이 흰말을 보면서 영화의 첫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 한바탕 싸움이 끝난 황량한 격전지를 말을 타고 유유하게 빠져나가는 독일군을 어디선가 나타난 워대디가 제 손으로 죽인다. 그리고 독일군이 타고 있던 흰 말은 자유로이 돌려보내 준다. 하지만 이는 워대디의 평소 모습, 적어도 자신의 부대원들에게 보여준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는 걸 이후 트레비스의 회상에 따르면 알 수 있다. 그가 알고 있는 워대디는 적군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몰고 있던 말들까지 전부 말살하도록 시켰다. 말을 쉽게 죽이기 위해서는 일부러 친밀하게 대해 마음을 산 뒤, 처참하게 총으로 쏴 죽였다. 그는 그렇게까지 했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그가 그때 흰 말을 살려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다시 마지막 장면으로 돌아가자. 흰말이 지나가는 시간의 길목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하나는 노먼과 비슷한 또래의 적군. 탱크 밑에서 노먼을 발견하지만 이내 모른 척하고 돌아간다. 또 하나는 탱크 문을 열고 노먼이 살아있음을 확인한 아군. 여기서 앞서 언급한 물음들을 떠올린다. 그가 흰말을 살려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워대디가 이 전쟁 속에서도 끝까지 지키고 싶었던 게 무엇이었을까. 이 영화가 워대디를 대신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아마도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무모한 순간에도 이 전쟁의 기운에 매몰되지 않겠다는 희망,

역사가 가르는 적군과 아군의 경계를 넘어서는 인류에 대한 희망,

그리하여 어디엔가 우리 편이 살아있으리란 희망.

그리고 그들이 험난한 길을 무릅쓰고 왔던 것처럼 이 세상 어딘가에 또 다른 나의 편이 나를 위해서 달려와주리라는 희망.


가망조차 없어 보이는 이 시간들 속에서,

감히 역사는 폭력적이라 말할 수 있는 이 시대에서 적어도 이 전쟁이 언젠가는 끝나는 날이 찾아오리라는 희망조차 남아있지 않다면, 우리는 더 이상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할 것만 같다.


평점: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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