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엄마의 싸움에서 나는 아빠 편이었어. 일하고 돌아와 엄마가 방치한 집안일을 하는 아빠. 이혼을 해서 우리를 힘들게 했다며 미안해하는 아빠. 절대 바람 같은 건 피우지 않았다고 억울해하는 아빠. 엄마는 우리를 버렸지만 아빠는 그렇지 않았어. 그렇게 믿었어. 일말의 의심도 없었지.
어느 날이었어. 그날은 이상하게 대학교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과 놀지 않았어. 좀 일찍 집에 들어갔지. 집에 들어가 빈둥대고 있는데 도어락 버튼이 눌리더라고. 아빠가 들어왔어. 거실에 앉아 있는 나를 보더니 당황한 표정이었어. 그 뒤에 누군가 서 있었지. 파마머리에 곱상하게 생긴 아줌마였어.
아빠는 나를 보더니 아줌마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어. 나는 두 눈을 의심했어. 그동안 아빠는 춤은 한번 췄지만 절대 바람 같은 건 피우지 않았다고 했거든. 쫓아나갔지. 내 눈으로 확인해보려고. 아빠가 차에 시동을 걸고 있더라. 조수석엔 그 아줌마가 앉아 있었어. 나는 저 여자는 누구냐고 따졌지. 아빠는 제대로 답하지 않고 그 여자를 보며 민망한 듯 웃더라. 그러곤 떠났어.
그날 저녁. 아빠는 집에 들어오더니 내게 할 말이 있다고 하더라. 그러곤 하는 말이, 내게 말 버르장머리가 없다는 거였어. 자기 여자친구 앞에서 버릇없이 굴었다고. 여자친구라니. 이혼한지 한 달도 안 된 사람이. 그렇다면 이미 이혼 전부터 만나던 여자가 있었단 거잖아. 엄마 말이 맞았던 거잖아. 엄마가 망가질 동안,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아빠 편을 들었다는 거잖아.
“당신이 그러고도 아빠야?”
나는 울면서 소리쳤어.
“난 네가 남자친구 만나도 아무말 안했어. 그런데 나는 그러면 안 되니?”
그게 아빠의 대답이었어. 이제 엄마가 없으니 당당하게 여자를 만나겠다는 거였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빠는 이전에 알던 아빠가 아니었어.
속은 거야. 아빠에게. 열 세살때부터 스물이 될 때까지. 아빠는 우리를 속여야했어. 좋은 아빠가 되어야 이혼소송에서 유리하니까. 우리가 아빠 편이어야 하니까.
그런데 엄마 말대로 춤추러 다니고 그곳에서 여자를 만났던 거야. 이혼 후엔 더이상 거짓은 필요하지 않았어. 자유롭게 여자를 만났지. 그날 이후에도 아버지는 당당하게 여자를 만났어. 아버지 옆의 여자들은 번번이 바뀌었지.
아빠가 차린 고시원은 빚이 많았어. 고시원에 불황이 오면서 돈이 없었지. 고3이었던 내 학원비는 한달에 10만원밖에 줄수 없다고 했어. 그 돈도 힘들게 받았었지. 대학 등록금도 제대로 대주지 않았고. 장학금을 받지 않으면 학교를 다닐 수 없어서 코피나게 공부했어. 장학금을 못받은 학기엔 휴학하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를 마련했지.
그런데 여자를 만날 돈은 있었던 거야.
당신이 그러고도 아버지인가. 솔직히 나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 돈을 안줘서가 아니라 자식보다 자기 쾌락이 더 우선인 사람이어서. 자식보다 여자를 더 좋아한 사람이어서. 그걸 가면 속에 감춰온 사람을 , 아직도 친척들 앞에서 좋은 아빠 가면을 쓰고 있는 그 사람을 아버지로 인정할 수가 없어.
그 일은 내게 너무나 큰 영향을 줬어. 지금도 아빠를 생각하면 배신감으로 몸이 떨려.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됐지.
결혼하면 내 남편이 아빠같은 사람이면 어쩌지 하면서 불안할 거야. 오빠가 그런 사람이 아니란 걸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은 그렇지가 못해. 그 마음은 나도 어쩔 수가 없어.
그래서 나는 어쩌면 이상한 아내가 될지도 몰라. 이런 나를 오빠가 알아야만 해. 그래야 우리가 같이 발맞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
남편은 내 편지를 받은 후 답장을 해왔다. 완벽한 부모님을 가진 것 같은 남편에게도 상처가 있었다. 남편은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를 그 편지에 담아 내게 보냈다.
남편도 상처가 있어 좋았다. 안심이 되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상한 아내 이상한 남편이 될 수 있다는 거지. 그러니 괜찮다. 우리는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