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일 죽고 싶은 마음과 어떻게든 살고 싶은 마음속에서 갈등한다
뭐랄까, ‘충만하다’ 혹은 ‘충분하다’는 것은 가장 평안과 행복에 가까우면서도 동시에 가장 죽음에 가까운 상태인 것 같다. 근래의 나는 모든 것이 충분했다. 욕심이 크지 않은 탓도 있다. 애인과 친구, 가족들이 딱 이대로만 유지되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충분했고, 일 년 정도는 죽지 않고 살 만큼의 여윳돈이 충분했고, 미천한 글솜씨를 몇 만 명의 사람이 읽어주고, 각자의 소회를 남겨준 일이 충분했다. 사실은 너무 충만하고 평화로워서, 그냥 이대로 이야기가 끝나버렸으면, 아무런 변화나 극적인 사건이 추가되는 일 없이 종료되었으면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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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시간은 흘러가고 생은 이어지니, 이대로 죽음 같은 평안에 잠식될 수는 없었다. 그래선 안 된다고 온 세상이 들리지 않는 소리를 질러대는 듯했다. 나는 또 일어나서 움직이고 일을 해야 하고 사람을 만나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이런 생 속에서 평안을 깨뜨리는 변동과 예기치 못한 사건들은 당연한 것이었다. 난 그게 너무 괴로웠다. 겨우겨우 충분해지고 평안해진 내가 또 흔들리며 살아가야 한다는 게 두려웠다. 나는 또 무언갈 욕망할 것이며 변할 것이며 잃고 아파할 것이며 또 성장하겠지. 그게 너무 싫었다. 알량하게 쥐고 있는 내 소중한 삶이 끔찍이도 애틋했기에 역설적으로 더 살아있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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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내게도 다시 생(生)은 온다. 나는 또 소소하게 욕망하는 게 생겼다. 깨고 싶은 알이 생겼다. 위로를 줄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 세상 밖으로 꺼내고 싶어 졌고, 모두가 비웃거나 이상하다고 생각해도 내 속에 부유하는 음률들을 느낄 수 있는 감각으로 치환하여 공유하고 싶어졌다. 또 내게 소중한 관계들을 꼭 쥐고 놓고 싶지 않아졌다. 위태롭고 흔들릴지라도.
임인건의 노래. ‘바람이 부네요’의 한 구절처럼, 산다는 건 참 신비한 축복이다. 나는 매일 죽고 싶은 마음과 어떻게든 살고 싶은 마음속에서 갈등한다. 한강 시인의 시 ‘파란돌’이 생각난다.
(…) 난 죽어있었는데
죽어서 봄날의 냇가를 걷고 있었는데
아, 죽어서 좋았는데
환했는데 솜털처럼
가벼웠는데
(…)
거기 있었네
파르스름해 더 고요하던
그 돌
나도 모르게 팔 뻗어 줍고 싶었지
그때 알았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때 처음 아팠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난 눈을 떴고,
깊은 밤이었고,
꿈에 흘린 눈물이 아직 따뜻했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