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아모리 에세이 <두 명의 애인과 삽니다>
소유하지 않는 사랑에 대해 처음 생각하게 된 것은 열일곱 ‘윤리와 사상’ 수업 시간,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과 <소유냐 존재냐>에 대해 배웠을 때였다. 진정한 사랑이란 소유하는 것이 아닌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그의 이론에 깊이 감명받은 어린 나는 며칠 내내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사랑이 소유가 아니라면 내가 그동안 알고 있는 ‘정상적인’ 형태의 사랑은 뭘까?
나는 그동안 여러 미디어에서 익히 등장하는 ‘내 여자’ 혹은 ‘내 남자’라는 개념에 대해 고민해본 적 없었으며, 그래서 연애를 하게 되면 당연히 상대가 ‘내 것’이 된다고 생각했고, 그랬기 때문에 상대가 어디를 가는지 혹은 누구를 만나는지 사사건건 개입해도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정상적인 줄로만 알았던 연애 형태가 사실은 사랑보다 ‘소유’에 가까운 것이었다면? 열일곱 살의 나에게 에리히 프롬은 큰 시련을 준다.
‘어쩌면 누군가를 소유하지 않은 채 진정한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고민에 괴로워하던 내게 얼마 전 친구가 책 <두 명의 애인과 삽니다>를 추천해주었다. 책에는 놀랍게도 이상적으로나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내 고민에 답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등장한다.
“음, 그러니까, 한 여자가 생물학적 남자 애인 두 명과 동거하는 내용의 에세이야.”
책 내용을 묻는 사촌 언니에게 대답하자 돌아오는 반응.
“소설이 아니라 진짜 대한민국에 있는 일이라고? 나 같은 유교걸에겐 너무 충격적인 걸.”
실화다. 심지어 현재 진행형. 그리고 심지어 아메리카가 아니라 내가 이전에 거주하던 지역과 한 정거장 차이인 ‘달걀부리 마을’에서 일어난 생생한 일들이다. 책의 내용은 저자인 ‘승은’과 그를 둘러싼 생물학적인 남자 둘, ‘지민’과 ‘우주’의 동거에 관한 자전적인 이야기이다. 대부분 이들이 사는 삶의 형태를 들으면 사촌 언니의 반응과 비슷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들은 ‘비독점적 다자연애(폴리아모리)’의 형태를 지향하는 삶을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전에 명시된 '폴리아모리'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여러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는 연애 형태. 일부일처제를 신경쓰지 않는 것이 대표적인 폴리아모리의 특징이다. 기존에 관계를 맺던 상대방의 동의 하에 다른 사람과 연애감정을 갖는다는 점에서 불륜과 다르며, 성적 관계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스와핑과도 다르다. 이는 순전히 개인의 자유이기 때문에 폴리아모리라도 한 사람과의 관계를 꾸준히 유지할 수도 있고, 폴리아모리와 대조되는 신념을 가진 사람은 '모노아모리'라고 부른다."
얼마 전 한 예능에서 폴리아모리에 대한 패널들과 시청자들의 논의가 있었다. 반응은 대체로 분노에 가득 찬 것들이었다.
분명 각자의 개인적인 경험과 선지식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들을 나타내는 타이틀만 듣고도 눈이 뒤집힐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한 걸음 물러나 판단을 유보하고 그들이 어떤 삶의 방식을 살아내는지 들어보자.
폴리아모리는 앞서 내가 열일곱에 했던 ‘정상적인 사랑의 형태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시작된다. 대체로 정상적인 것은 보편적인 것과 연관된다. 그렇기 때문에 정상적인 사랑의 형태란, 가장 보편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일대일 독점관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관계 아래 행복한 보편의 모습보다는 상대의 폭력을 참기도 하고 합의되지 않거나 소통되지 않은 타자를 견뎌내기도 하며 또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는 보편적인 모습들을 더 많이 마주하곤 한다. ‘정상(正常)’을 지키기 위한 수많은 폭력, 희생, 혐오. 그것을 과연 정상이라 칭할 수 있을까? 책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정상'의 틀은 수많은 '비정상'을 만들 뿐만 아니라 그 틀에서 벗어난 존재에게 당연하다는 듯 권리를 박탈한다.
물론 처음에는 이들도 소유하고픈 독점욕에서 비롯된 다양한 감정들로 괴로워한다. 그러나 ‘넌 내꺼니까 당연하잖아?’가 아닌 ‘넌 내 옆에 있지만 언제든 어떤 모양으로든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서로에게 최대한 무해하고 덜 아픈 방향으로 나름의 사랑을 해나간다. 승은과 지민, 우주가 사는 비보편적인 삶은 예상과는 달리 평온하다. 그들은 수많은 조율을 거쳐 각자를 독립된 주체로 이해하고 존중하며 각자의 공간을 인정하고 따로 또 같이 살아간다.
만약 정상과 비정상을 보편적인 것과 비보편적인 것으로 나눈다면, 그동안 우리는 오히려 위험한 보편에 대해서는 묵과하면서 안전한 비보편들은 배척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성찰을 하게 한다.
책에서는 사랑의 모양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지 않는다. N명의 사람이 존재하는 만큼 N개의 각기 다른 형태의 사랑이 있을 뿐이고, 그 바탕에 소통과 존중 그리고 노력이 있는 사랑이 정상, 그렇지 않은 사랑이 비정상일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각기 다른 사랑의 모양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책 속의 ‘승은’이 지인에게 했던 질문이 파격적으로 뇌리에 박힌다.
“혹시 애인 있으세요? 있다면, 당신은 몇 명의 애인이 있나요?”
책에서 설명된 폴리아모리는 페미니즘과도 닮은 부분이 많다. 가부장제에 기반을 둔 가족 형태를 파괴하고자 하는 맥락에서 동일선상에 놓여있고 이분화된 성별 역할을 탈피해야 한다는 점에서 공통된 의견이다. 실제로 셋의 동거 관계에서 각자는 본인이 자신 있는 역할을 맡아 수행하는데 공교롭게도 요리는 생물학적인 남자 두 명의 몫이고 정리나 청소는 승은의 몫이다.
그러나 혹자는 폴리아모리가 처첩 제도 혹은 ‘다자’ 연애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법이거나, 남자들만 좋은 일 시키는 건 아니냐는 등의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래서 결국은 폴리아모리가 사실은 여권을 퇴보시키는 생각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겠다. 이와 비슷한 의문들에 승은과 지민 그리고 우주 세 사람은 남성들, 특히 권력을 가진 이들의 폴리아모리는 특히나 더 섬세하고 까다롭게 숙고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인다. 그리고 폴리아모리뿐만 아니라 어떤 관계든 여성의 입장에 대한 깊은 고찰과 노력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흔히들 폴리아모리의 개념에 대해 이해하고 나면 그들은 질투도 미움도 없는 천상계의 인간일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이 책은 폴리아모리에 대한 그런 편견을 단번에 깨 준다. 그들은 여느 관계와 마찬가지로 질투하고 괴로워하며 가끔은 상실감과 열등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보편적인 남녀 관계에서 느껴지는 ‘질투’를 느끼면서도 그 분노가 상대를 향하여 잔인한 방식으로 표출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는 소통을 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우주와 지민은 인터뷰에서 질투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질투에 답은 없다. (단호) 다만, 그걸 스스로 잘 분석하면 좋겠어요. (중략) 내가 무엇을, 왜 질투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따져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분명히 위로받아야 하는 질투도 있지만, 스스로 의심하고 감내해야 하는 질투도 있다고 생각해요. (중략) 특정 상황에서 튀어나오는 질투나 관습화 된 감정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겠죠. 그러다 보면 실제로 해결되는 감정도 있더라고요.”
그들의 관계는 유니콘처럼 현실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 현실적 문제들을 극복할 '노력'을 기초로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노력은 비단 폴리아모리 관계뿐 아니라 모든 관계에 적용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자칭 수많은 ‘관대한’ 사람들은 그들을 향해 ‘조용히만 있으면 싫어하지 않아.’라는 입장을 내비치곤 한다. 그 말인즉슨 ‘소리 내면 싫어하겠다.’는 혐오 표현과도 맞먹는 것이다. 그러한 시선 속에 단지 자연스럽게 존재하기 위해 세 명의 동거인들은 자신들의 ‘무해한 사랑’을 알리려 용기를 낸다. 그러나 폴리아모리에 대한 지향성을 밝히고 나서 쏟아지는 무례한 질문들과 경멸 어린 시선들은 단단히 각오했던 그들조차도 참기 힘든 것이었다. 심지어 지민은 기독교 재단의 대학에서 정학을 받기까지 한다.
무례한 시선과 질문들은 특히 성생활에 관한 것이 많았다. 사람들은 승은을 문란한 여자라고 손가락질하기도 하고 우주에게는 판타지를 이뤄서 좋겠다고도 하며 지민에게는 악의 세계에서 나오라고 기도하기도 한다. 오죽하면 그들은 그들끼리 악플 읽는 밤의 시간을 가지기도 한다. 그러한 세간의 반응에 셋은 입을 모아 이렇게 이야기한다.
당신은 머릿속에 온통 섹스밖에 없습니까?
수많은 요소들의 복합적인 결정체인 ‘사랑’이 단순히 섹스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 개념으로 치환되는 부족한 성찰에 경종을 울리는 말이다.
아마 이 책을 접할 많은 독자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책을 읽으며, 폴리아모리라는 것이 상대에게 상처 주는 것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면 어쩌나, 또 나름의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범주 내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사랑하는 이들의 삶을 부정하게 하는 것이면 어쩌나 걱정했다. 하지만 승은과 우주와 지민의 삶은 그런 걱정과 반대되는 것이었다. 관계에서 어쩔 수 없이 받는 상처들을 인정하고 동시에 서로 최대한 상처 주지 않으려 노력에 노력을 거듭한다. 또한 폴리아모리가 아닌 다른 관계들 역시 그러한 성찰과 노력이 수반된다면 충분히 존중한다. 세 명의 애인이 공통적으로 정의하는 폴리아모리는 ‘끊임없는 의심과 성찰, 그리고 노력이 수반된 사랑의 과정’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이렇게 최대한 상처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관계에 대해서 우리는 비판할 자격이 있을까?
현재 진행형인 사랑의 과정을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낸 만큼, 구체적인 폴리아모리에 대한 고민들과 셀 수 없이 많은 시행착오들의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다. 또 그들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주변인들과 부모님이 어떤 과정을 겪고 그들을 받아들였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나아가 폴리아모리만의 이야기와 비슷한 여러 소수자의 입장을 다뤄 다채롭기도하다.
세 애인이 이렇게 용기 내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상세히 풀어낸 이유가 단순히 폴리아모리라는 개념을 무조건 지지해달라는 것에서만은 아닐 것이다. 단지 낯선 사랑의 형태를 첫눈에 판단하기 전에 그들이 살아가는 이야기에 잠시만 귀 기울여 달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책에는 ‘모르면 혐오하게 되고 알면 사랑하게 된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이 책을 읽고 그들을 사랑하게 될지 아닐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점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엄청나다는 사실이다. 폴리아모리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리는지는 여러분의 몫이지만 그들의 삶을 한 번이라도 자세히 ‘알고’ 난 뒤 판단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