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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자유 Jan 18. 2023

응답하라 청춘이여. 4-2

나의 허 샘

희한한 것은 내 성적이 그 모양인데도, 공부 못하고 멋 내고 튀는 행동을 하는데도, 허 샘은 나를 날라리 취급하지 않으시는 것 같았다. 째려보는 그 눈빛 속에는 다정함과 온화함이 있었고 특이한 웃음 속에는 나를 편안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 녹아 있었다. 무엇보다도...


“저번에 보니까 자유, 너 책 좋아하는 거 같더라. 많이 읽는 습관은 참 좋은 거야. 그거 되게 힘든 건데 책을 좋아하면 다른 것도 다 잘하게 되어 있어.

“오늘 입은 옷 센스 만점이네 자유 감각 있다.” “국어 시간에 글 쓴 거, 선생님 칭찬이 자자하더라. 재능이 많아서 넌 잘해 낼 거야. 선생님은 믿는다.”


이렇듯 나의 좋은 점만 보시고 항상 칭찬하고 격려하고 지지해 주셨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괜찮은 사람이었나. 내가 정말 잘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들면서 선생님 믿음에 화답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마음을 추스르고 나니 수업이 재미있어졌다. 수학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지만, 나머지 과목은 얼추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업 시간에 딴짓하지 않고 놀러 다니지 않고 잠을 줄이고 나니 기말고사에서 23등을 했다.


조회 시간에 허 샘은 활짝 웃는 특유의 웃음으로

“얘들아. 12개 반중 우리 반은 9등 했다. 근데 말이야 기분 좋은 소식이 있어. 글쎄 자유가 이번에 26등을 올렸단다. 이게 말이 되니? 자유야, 앞으로 나와 봐. 자, 선물이야 수고했어. 장하다 정말.”

선생님은 노력하는 아이들에게 주셨던 책을 나에게도 선물로 주셨다. 애들 앞에서 칭찬은 으쓱하기도, 약간은 머쓱하기도 만들어서 더 열심히 하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허 샘은 3분 이야기(아이들이 나와서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3분 동안 말하기)로 수업을 시작했다. 이면지로 생리대 예쁘게 포장해서 휴대하는 법, 소중한 곳이 닿기 때문에 손은 화장실 나올 때뿐만 아니라 들어가기 전에도 꼭 씻어야 한다 등 다른 샘께는 절대 배운 적 없었던 여학생 에티켓과 질풍노도 시기인 우리에게 자유와 미래, 자아와 가치관에 대해 한 번 더 일깨워 주고 함께 고민해 주는 너무나 훌륭하신 분이셨다. 나는 분에 넘치는 좋은 성적을 거두며 중학교를 졸업했다.




“혹시 허경선 선생님 아니세요? 맞죠? 저예요 자유. 별나라여중 3학년 11반 이자유. 저 모르시겠어요?”

“어머! 알지 알다마다. 이게 몇 년 만이니? 여기서 근무하는 거야? 몰라보겠다.”

“네. 여기 병원 영양사로 있어요. 선생님은 어쩜 그대로세요. 너무 뵙고 싶었는데. 어느 학교에 계세요?”

“그래 정말 반갑다. 우리 반 참 재밌었는데. 지금은 하늘고에 있어.”

“못 찾아봬서 정말 죄송해요. 그런데 병원엔 어쩐 일이세요? 어디 편찮으세요?”

“아니, 시아버님이 편찮으셔서 입원하셨는데 다른 건 못 드시고 죽이 드시고 싶다고 하셔서 찾아보는 중이었어. 혹시 병원 상가에 죽 집이 어디 있니?”

“어쩌죠 선생님. 지하에 있었는데 얼마 전 폐업해서 근처에는 죽 파는 데가 없어요.”


환했던 선생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선생님, 병실이 어디세요?”

“왜? 어쩌려고?”

“제가 금방 만들어다 드릴게요.”

“아니야 너 바쁜데 그럴 순 없지.”

“아니에요. 제가 해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오랜만에 만나서 이렇게 민폐를 끼쳐도 될까 모르겠네. 정말 괜찮겠니?”

“그럼요 선생님. 제가 선생님 덕에 대학까지 간걸요. 병실에 계세요. 어서요.”


서둘러 재료를 준비했다. 대장암에 좋은 전복을 드시기 쉽게 잘게 썬 후 불린 미역을 넣고 미역 전복죽을 만들었다. 그리고 선생님도 함께 드실 수 있도록 보기 좋은 사기그릇에 두 그릇 가득 담아 면 보자기로 덮어 병실로 갔다. 할아버님이 한입 크게 떠 맛있게 드시는 모습을 보고 인사드리고 나오려는데 선생님의 눈에서 촉촉한 무언가가 반짝였다.


그 시절, 허 샘과 비슷한 나이만큼 자란 내가 선생님께 정성 들여 만든 죽으로라도 보답할 수 있어서 벅찼다.


이튿날 여느 날과 다름없이 새벽 출근을 하고 출근 카드를 찍으려고 향하는 내 시야에 말끔히 비운 두 개의 사기그릇과 에세이 책 한 권이 눈에 띄었다. 너무 고마웠다는 메모와 함께 책 마지막 장에는 이 문장이 쓰여 있었다.      

                             

        나눌 줄 아는 어른, 따뜻한 마음, 참 곱다.                                           

                        2003. 허경선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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