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말로 엉망진창이다. 난잡하게 어질러진 방 안 꼴도, 지칠 대로 지쳐버린 심신도. 며칠을 꼬박 쏟아부은 시간이 무색하게, 지홍의 노력은 아무런 결실도 거두지 못했다. 수많은 연구 기록과 논문을 샅샅이 뒤졌지만, 휘영의 증세와 연관 지을 수 있는 것은 찾을 수 없었다.
어려운 문제를 앞에 두었을 때 도전정신을 불태울 수 있는 사람은 종종 있다. 지홍 역시 그런 부류에 속한다. 그가 지금까지의 커리어를 완벽에 가깝게 쌓아올 수 있었던 건 타고난 성향 덕이 컸다. 그중에서도 일등공신을 꼽으라면 까다롭고 골치 아픈 상황을 피하지 않고 기꺼이 마주하려는 도전정신이다.
하지만, 아무리 도전정신이 투철하다 해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문제도 있는 법이다. 조금의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는, 접근 방향 자체부터 스스로 찾아내야 하는 상황. 지금 매달리고 있는 서류 작업은 그나마 찾아낸 최선의 방법이었다. 무미건조한 문체와 진부한 관용구로 가득한 활자 뭉치 속 숨은 힌트 찾기랄까. ‘비효율’이라는 말로도 한참 부족한, 오히려 ‘미친 짓’에 가까운 작업. 아마 도전정신이 꽤 투철하다 자부하는 이들도 상당수 손을 들지 않을까.
정확히 헤아리지는 않았지만 대략 4~5일 정도. 눈은 벌겋게 충혈되고 뻑뻑하게 아파온다. 화면을 가득 메운 활자들 사이로 헛것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시간이 갈수록 의욕이 급격히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지홍이 위안을 삼을 수 있는 건… ‘이 정도면 그래도 꽤 오래 버틴 편이 아닐까’ 하는 무기력한 자조뿐. 결국 그는 방전을 선언하고 소파 위에 길게 누워버렸다.
“……”
혼잣말 한 마디 뻥끗하기 힘들 만큼 힘이 쭉 빠진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저히 본능에 맡겨둔 채 무수한 서류와 씨름한 며칠. 이렇다 할 소득은 없고, 눈에 보이는 결과는 가관이다. 무엇 하나라도 건졌다면 이 정도 난장판이야 그냥 피식 웃고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이 시궁창이다 보니 이런 어지러운 꼴에 한결 더 짜증이 난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옷가지와 수건. 각종 인스턴트 음식에 딸려온 쓰레기와 산더미를 방불케 하는 빈 맥주 캔.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려봐도 깔끔한 곳이라고는 찾아볼 도리가 없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더 싱숭생숭해져 그냥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아…… 그러고 보니 요 며칠 신경을 전혀 안 쓰고 있었네. 별 일은 없으려나.”
문득 휘영 쪽이 신경 쓰였지만, 이내 잊기로 마음먹는다. 사실 구태여 따지자면,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것도 모두 휘영을 위한 일이다. 본래 지홍이 해야 할 역할은 그리 많지 않다.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깨달음을 위해 적당한 자극을 주는 것. 그리고 근원계로 무사히 돌아갈 때까지 필요한 가이드를 제공하는 것. 그 외의 업무라곤 그저 지켜보는 일에 치중돼 있다.
그런데 여기서 ‘불완전 각성’이라는, 그로서는 처음 겪는 현상이 끼어들었다. 언뜻 사소해 보이는 이 하나의 사건은 일파만파로 번지며 모든 일을 어그러뜨려 놓았다. 물론 휘영 본인이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지만, 이 지경까지 되다 보니 어느새 그녀는 모든 문제의 핵으로 자리 잡고 말았다.
근원계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그리하여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주목하고 있는 중요한 프로젝트. 그리고 때마침 심각성이 대두된 돌연변이 관련 이슈들과 연이어 터지는 돌발상황들…… 이 모든 건 그저 우연의 일치일까? 혹시라도 누군가 의도적으로 꾸며낸 거대한 판인 건 아닐까?
지홍의 영은 정보형을 베이스로 하고 있기에 수많은 정보들을 보유하고 있다. 게다가 최근 돌연변이 관련 연구 자료들을 열람하며 꽤 많은 추가 정보들을 더 얻었다. 그 모든 것들이 빠르게 이합집산을 반복하며 복잡한 생각을 이어나간다. 이 모든 것들이 어떤 식으로든 연결돼 있을 거라는 추론. 아직은 군데군데 구멍이 숭숭 뚫린 모양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꽤 그럴듯한 그림이다.
게다가 불안한 건, 여기에 휘영을 끼워 넣으면 비어있는 모든 조각이 일련의 가설로 맞춰진다는 사실이다. 만약 백현이 들려준 가설대로 휘영이 이 그림의 중심에 놓여버린 거라면…… 커져가는 불안함 때문에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성공 가능성 따위 애초부터 희박하기 짝이 없었던, 지루한 서류 작업을 시작한 건 바로 그 이유에서였다.
“……아, 다 귀찮아. 알 게 뭐야. 무슨 일 있으면 물어보러 오든 전화하든 하겠지.”
잠깐의 휴식 때조차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지홍은 왈칵 짜증이 난다. 뒤늦게 잠시나마 눈을 붙이려 했지만, 한 번 떠오른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따라붙는다. 결국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냉장고에서 맥주나 몇 캔 꺼내 마시자 싶어 몸을 일으켰을 때, 화상통화 착신이 들어왔다.
띠링- 띠링-
발신자를 확인한 지홍은 인상을 있는 대로 팍 구겼다. 백현이다.
“하아… 타이밍 하고는…… 당최 쉴 틈을 안 주는구먼. 이 양반은 분명 날 말려 죽이려는 게 분명해.”
평소에도 그리 달가운 적은 없었다지만, 상황이 그리 안녕하지 못하다 보니 한층 더 꺼려진다. 일단 지홍은 주방으로 향하던 걸음은 그대로 진행시켰다. 어차피 잠깐 정도 안 받는다고 쿨하게 끊어버릴 위인은 못 되니까. 여유롭게 냉장고를 열고 맥주를 꺼내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두 팔로 옮길 수 있을 만큼만 꺼내보자 하다가, 이내 마음을 바꿔 자그마한 바구니 하나를 챙겼다. 왠지 저 전화를 받고 나면 술이 많이, 아주 많이 필요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다.
[아, 왜 이렇게 늦게 받…… 응? 뭐야, 낮술 하냐?]
“새삼스레 뭘 놀라는 척하고 그러십니까? 한두 번 보는 광경도 아닐 텐데. 그나저나 당최 타이밍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맞추십니다.”
[왜, 보고할 거라도 있었냐?]
“아뇨. 항상 피곤해 죽을 것 같을 때만 먼저 연락하시니까요.”
[음… 그게… 어… 미안…?]
“……안 어울리게 곧바로 꼬리 내리고 그러지 마시죠. 되게 낯설거든요?”
[뭐, 엄밀히 말하면 그 ‘피곤해 죽을 것 같은’ 거에 나도 기여한 바가 있으니… 나름 양심에 좀 찔려서 그렇다고나 할까.]
“양심… 이라고요? 그 양심, 왜 이제야 이렇게 예민한 척 한대요? 기왕지사 처음부터 예민해줬으면 이 지경까지 안 됐을 텐데 말이죠.”
[이 지경이 무슨 지경인데?]
“……그냥 그런 게 있어요. 한데, 무슨 일입니까. 대낮부터? 가급적 용건만 간단히 해줬으면 좋겠는데요. 보시다시피 몰골이 이래서 좀 쉬고 싶거든요.”
평소와 같이 농담이 반쯤 섞인 인사가 오간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지홍의 촉은 끊임없이 불안하다는 신호를 보내온다. 만약 일상적이거나 별 것 아닌 용건이었다면 음성통화로도 충분했을 터. 구태여 화상통화를 걸었다는 건, 간접적으로나마 대면이 필요한 사안임을 의미한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전까지 우스갯소리를 주고받던 백현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음이 느껴진다.
[어…… 이게 간단히 될 용건인지 모르겠네. 노력은 해보마. 그… 최근에 네 이름으로 받아간 자료 리스트, 다 확인했다. 꽤 많던데.]
“그래요? 딱히 세지는 않아서… 닥치는 대로 요청하다 보니 좀 많아졌나 본데, 그럼 직속 팀장에게 리포트가 올라갈만하죠. 왜요, 먼저 보고 안 했다고 갈구려고요?”
[그런 거 아니야, 인마.]
시험 삼아 농담 한 마디를 슬쩍 끼워 넣어 봤지만 여지없이 튕겨낸다. 농담 속에 진담을 슬쩍 섞던 평소 대화와는 좀 다른 패턴.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막연한 불안감이 조금씩 짙어지며 형체를 갖춰간다.
[너 말이다. 그 자료들 왜 검토하는 건지 내가 대충 감이 와서 말인데.]
“감은 무슨… 초짜 실무자들이 봐도 알 거 같은데요.”
[짜식, 말 끊기는…… 아무튼, 그만둬라. 그거.]
“네네, 그만두……예? 지금 뭐라고…?”
[그만두라고.]
“……”
[너, 지금 네가 얼마나 위험한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는 거냐?]
“위험한 짓? 글쎄요. 전 제 포지션과 그에 따른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뿐입니다만.”
[하아……]
백현은 한숨을 내쉰다. 그래, 원칙대로 보자면 맞는 말이다. 현계로 내려간 영을 인도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고, 관련 사례와 그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필요한 자료를 뒤져본다. 일반적인 경우였다면 지홍은 그저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돌연변이’라는, 불안하고도 민감한 메가톤급 이슈가 끼어있는 탓이다.
[너도 알다시피… 이번에 네가 맡은 케이스는 특별해. 그것도 아주 많이. 까놓고 말해서 ‘특별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지. 팀장이랍시고 그걸 대충 보고 냅다 떠맡긴 내가 이제 와서 이런 말 하는 게 스스로도 쪽 팔리는 일인 건 아는데… 이제라도 잘못된 걸 알았으니 바로 잡아야 하지 않겠냐.]
“오늘따라 유난히 양심선언 자주 하시는 걸 보니 진심인가 보네. 그래, 대체 뭐가 어느 부분에서 위험하다는 건데요? 어디 들어나봅시다.”
[지난번에도 말했잖냐. 이번에 네가 맡은 케이스는 돌연변이와 연관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난 또 뭐라고…… 그래서 지금 이러고 있는 거잖아요. 그렇지 않다는 걸 증명하려고.”
[증명…? 수천수만 건의 연구자료와 논문을 다 뒤져가면서? 그래, 그거 다 뒤져보면 증명이 되는 거냐?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케이스면 어떡할 건데?]
“……”
정곡을 찔렸다. 지홍이 내내 우려하던 부분이었고, 백현 역시 알고 있을 거라 예상은 했다. 지홍과 달리 전투형에 가까운 백현이지만, 팀장이라는 자리에 올랐다는 건 그만큼의 경험과 통찰을 인정받았다는 의미다. 그것도 불천, 다른 이도 아닌 근원계 모든 이에게 하늘과도 같은 바로 그 존재로부터.
[확신도 없는 일에 괜한 에너지 낭비하지 마라. 이건 누가 봐도 뻘짓이야. 그러다가 괜히 잘못 엮이면 커리어 망가지는 선에서 끝나지는 않을 거라고. 다 너 걱정해서 하는 소리야, 인마. 모르겠어?]
“……”
[……지금 좀 아슬아슬하다. 이대로 네가 자료 열람을 계속하면, 곧 더 윗선에도 보고가 들어갈 거야. 만약 해강현 님에게까지 보고가 올라가면… 불천님께서 알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겠지. 아는지 모르겠지만, 그분은 예외가 생기는 걸 아주 싫어하신다. 이번 일에 이름 거론되면 너 찍히는 거라고.]
“……그럼 뭐, 이제 와서 그만두면 다 없던 일로 해주신답디까?”
[이 자식이? 이제까지 말한 건 어디 귓등으로 들었냐? 되니까 그만두라는 거지. 아직은 내 선에서 커버칠 수 있을 정도니까, 지금 멈추면 특별히 따로 문책당하거나 하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이 이상 올라가면 나도 손쓸 도리가 없어.]
“팀장님. 아니, 형님.”
[알아. 안다고. 속 쓰리겠지. 이거 한 방에 완벽했던 커리어가 작살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네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나도 잘 아니까. 근데, 이거 하나 때문에 완전히 엉망이 되지는 않을 거다. 달리기 하다 보면 발 좀 헛디딜 수도 있고, 삐끗할 수도 있는 거 아니냐?]
“……”
[이건 진짜 아니다. 고작 이런 자료 몇 개 들춰보는 게 뭐가 문제냐 싶겠지만, 윗분들에게는 네가 돌연변이를 옹호하려 하는 걸로 비칠 수 있어. 너 인마, 앞으로 갈 길이 구만 리 창창한데 이런 사소한 문제 때문에 발목 잡힐 거냐?]
“……네네, 걱정해주시는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잘 한 번 생각해볼게요.”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게 없다니까? 지금 멈춰야 돼.]
“형님, 이건 저한테 주어진 일입니다. 담당 실무자로서 판단은 알아서 합니다. 당연히 그에 따른 책임도 알아서 질 거고요. ……용건 끝나셨으면 이만 끊겠습니다.”
[뭐? 야, 야 인마! 너 진짜……]
지홍은 일방적으로 통화를 끊어버린 뒤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하고 싶은 말은 훨씬 더 많았지만, 막상 백현의 얼굴을 보고 뱉어내려니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들고 있던 맥주 캔을 한 번에 비워냈지만, 착잡함은 가시질 않는다. 또 다른 캔을 집어 든다. 다시 걸려오는 화상통화. 하지만 받지 않는다. 그저 연거푸 술만 들이켤 뿐.
“그래~ 당신한테는, 그리고 저~기 위에 계신 분들한테는 사소한 일일 수도 있겠지…… 뭐? 예외가 생기는 걸 아주 싫어하신다고? 그래, 원칙이고 질서고 다 좋다 이거야~ 근데…… 직접 현장에서 부대끼다 보니…… 그게 다가 아니더라고.
단 한 가닥이라도, 할 수 있는 게 있으면 다 해봐야 맞는 거 아냐?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라니, 그게 말이 돼? 모든 영은…… 똑같은 권리를 보장받아야 하는 거잖아. 우리는 모든 영에게 그 권리를 보장해줘야 할 의무가 있는 거고…… 하여간에 책상머리에서 떠들기만 하는 것들이 문제라니까……”
취기가 어느 정도 오르자, 누구에게 하는 건지도 모를 혼잣말이 중얼중얼 쏟아져 나온다. 어쩌면 아까 백현을 마주하고 있을 때 쏘아주고 싶었던 말들일지도 모른다. 이 자리에는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없다. 아니, 오히려 듣는 사람이 없으니 더 좋은 말일지도 모른다.
신호음이 계속 간다. 하지만 응답은 없다.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것도 모자라 애프터 신청(?)도 쿨하게 씹어 주시는 건방진 후배님이시다. 그 자리에 퍼질러져 있으면서 일부러 안 받는 게 분명하다. 아니면 누워있거나. 조금 전 화면 너머로 맥주 캔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봤으니, 지금쯤 그걸로 나발을 불어대고 있겠지. 안 봐도 비디오다.
“아, 이 자식 진짜 막 나가려는 모양인데. 평소엔 냉정하게 잘만 했으면서 갑자기 웬 감성파 휴머니스트 행세? 이런저런 문제 해결해주다가 정이라도 든 거야 뭐야. 아, 이 나사 빠진 새끼. 알아서 책임을 지긴 개뿔, 이거 잘못되면 1+1으로 같이 얻어터질 내 걱정은 손톱만큼도 안 하나? 진짜 골치 아프네…”
홧김에 내지른 거라면 차라리 다행이다. 그런 경우라면 시간만 조금 주면 곧 이성이 돌아올 것이고, 다시 설득해볼 여지가 생긴다. 하지만 통화 내내 보였던 지홍의 표정 변화가 영 마음에 걸린다. 휘영을 담당하는 동안 그녀로부터 뭔가 영향을 받은 걸까? 설마 그 영향이 돌연변이의 능력에 노출되면서 따라오는 건 아닐까?
“젠장. 내가 지금 무슨 막장 같은 생각을 하는 거야. 말도 안 되지. 그래, 조금만… 조금만 더 지켜보자. 아직 선을 넘지는 않았으니 기회는 있어.”
백현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힌다. 지금은 두 가지 수를 생각해둬야 할 때다. 하나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가는 지홍에게 제동을 걸 수, 다른 하나는…… 끝내 선을 넘어버린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수.
사실 지홍과의 친분을 생각하면 결코 내키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그에게도 주어진 본분이라는 게 있으니 어쩔 수 없다. 가만히 손 놓고 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지옥으로 끌려갈지도 모를 일이니까.
“제발 좀…… 내 손으로 널 끊어내게 하지는 말아줘라. 이 뼛속까지 못돼먹은 후배놈아.”
“후우…… 침착하자. 침착하자.”
서울 시내에서 번화가라면 빼놓을 수 없는 강남대로 한복판. 휘영은 잠시 눈을 감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천천히 눈을 뜨자, 지나가는 사람들 머리 위에 보이는 붉은 아지랑이가 시야에 한가득 들어온다.
두근두근-
심장의 펌프질이 빨라진다. 매우 급격하게. 머리로 밀려드는 혈류량이 많아지자 뇌가 느끼는 감정도 덩달아 커진다.
두렵다…
무서워…
도망쳐!
지금 당장!
본능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귓전을 맴돈다. 이 곳을 벗어나라고, 아니면 최소한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감으라고. 어떻게든 이 불편함으로부터 피하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끝까지 버텼다. 지금 휘영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이것뿐이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그리 머지않아 팀 전체가 매우 위험한 임무에 나서게 될 것이다. 바로 자신이 밀어붙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만약 그곳에 가서도 꼴사납게 제 몫을 못해낸다면, 평생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본래는 강력범죄자 등에게서 볼 수 있는 짙은 핏빛 아지랑이가 필요했다. 일반 수준의 붉은색은 이제 그럭저럭 버텨낼 수 있는 수준. 그 이상의 것을 마주했을 때 본능이 어느 정도로 반응할 것인지에 대한 테스트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어렵다. 경찰서 유치장에 들어오는 잡범들에게서는 그다지 진한 아지랑이가 보이지 않는다. 교도소에 가면 제법 괜찮은(?) 소득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애초에 마음대로 들락거릴 수 있는 곳은 아니다. 게다가 이런 비상식적인 이유를 설명하려 했다간 100% 미친 X 취급이나 받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이거였다. 일반 정도의 붉은 기운이라도 한꺼번에 여러 개를 보는 건 아직 좀 버겁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패턴을 보면, 이 능력(사실 본인은 이걸 능력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이라고 생각하지만)은 분명 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단 한 사람의 아지랑이에도 이불을 뒤집어써야 했던 때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을 이룬 상태니까. 즉, 노출빈도가 많아지면 더욱 빨리 적응할 수 있을 거라는 제법 그럴듯한 근거를 두고 하는 짓이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안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요란한 진동을 전해온다. 눈에 잔뜩 힘을 준 채 행인들의 머리 위를 쳐다보던 휘영은 고개를 몇 번 휘휘 저어 주의를 환기시킨 뒤 전화를 받았다.
“네, 은휘영 경위입니다.”
[어이구~ 은휘영 경위님, 아주 바쁘신가 봅니다? 발신자 확인도 안 하고 받으시는 걸 보니. 어디냐?]
“아, 팀장님. 강남 쪽에 잠깐 나와있어요.”
[거긴 왜? 땡땡이 치러?]
“……하아~ 저도 그랬으면 차~암 좋겠는데요. 안타깝게도 빡빡하신 어느 분 덕분에 그런 습관은 안 키웠네요.”
[그 빡빡하신 분이 누군데? 재한이냐? ……설마 나는 아니지? 설마, 아닐 거야. 내가 니들 풀어주느라 위에서 얼마나 깨지면서 사는데.]
“네네~ 편하실 대로 생각하십쇼.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이세요?”
[어, 일정 정리됐다고 알려주려고. 오늘 퇴근하기 전에 팀 회의 한 번 할까 생각 중이니 적당히 놀고 들어와. 그나저나 놀러 갈 거면 진우 녀석도 좀 데리고 가지 그랬냐. 노트북에 머리 처박고 졸고 있던데.]
“노는 거 아니라니까요!”
[늬예늬예~ 그러시겠죠~ 끊는다. 올 때 메로나.]
뭐라 할 새도 없이 전화가 끊어진다. 또 한 방 먹은 기분. 종종 있는 일이지만 당할 때마다 새로운 기분이라 약이 오른다.
“아, 진짜…… 올 때 메로나라니. 이번엔 또 어떤 고전 커뮤니티에서 놀다 오신 거야.”
예상했던 것보다 일의 진행이 빠르다는 점은 만족스럽다. 오늘 회의까지 하고 나면 좀 더 뚜렷한 윤곽이 드러날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게으름 피울 여유가 없지.”
복귀 시간을 대충 가늠해본 뒤, 휘영은 다시 눈을 부릅뜬다. 조금이라도 더, 이 거슬리는 광경에 익숙해져야 하기에.
이제 곧 후반부 스토리로 들어갈 듯하네요. 한 회 분량을 조절하려다가 글이 늘어지는 건지, 아니면 나름대로 스토리 개연성을 갖추려고 필요한 이야기를 죄다 서술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용이 지지부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첫 습작은 편안한 마음으로 쓰려고 노력 중입니다. 어차피 이 세계관은 한동안 푹푹 우려먹을 예정이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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