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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저 너머의 하늘 #20.

by 이글로

전화를 끊은 지홍은 잠시 멍하니 앉아있었다. 들이붓듯 마셨던 술은 거의 다 깼다. 지금 그의 사고 회로를 방해하고 있는 건 분명 다른 종류의 무언가다. 머릿속에 자리 잡은 ‘찜찜하다’는 감각. 왜지? 대체 무엇 때문에? 조금 전 휘영과의 통화를 곱씹어본다. 얼핏 듣기에는 별로 이상할 것 없었던 대화. 문득 휘영이 뭔가를 감추려 하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렇다 할 근거가 없어 확신할 수는 없는, 글자 그대로 ‘느낌’.


“쩝, 확실히 목소리만 가지고 추측하기엔 부족하단 말이지. 언제 한 번 직접 찾아가야 되려나…”


어쩌면 자신도 감추고 있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상대방도 뭔가를 감추는 것처럼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생각을 읽어내는 능력이 있었다면 이런 상황에 매우 유용하겠지만, 지홍에게는 없는 능력이다. 다만 그는 지금껏 수많은 영들의 인도를 맡으며 그들의 표정이나 행동 등에 관한 패턴을 차곡차곡 정리해뒀었고, 그것을 기반으로 제법 그럴듯한 추측을 할 따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표정이나 행동이 아닌 목소리만으로 대화가 이루어지는 상황에서는 판단을 위한 정보가 부실할 수밖에 없다. 지홍은 잠시 고민에 잠긴다. 조금 전 백현과 신경전을 벌였던 일도 채 수습되지 않은 상황에서 또 하나의 문제를 만들어버렸다. 가벼운 의구심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을 원망해보지만 어쩔 도리는 없다.


무엇을 우선 해결할 것인가. 생각을 정리하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순서로 보나 중요도로 보나 백현과의 트러블이 먼저다.


사실 따지고 보면, 휘영의 목소리로부터 위화감을 느끼도록 한 것은 백현에게도 책임이 있다. 자신이 인도를 맡고 있는 영을 돌연변이로 단정 짓는, 그와 관련된 일체의 노력을 모두 ‘돌연변이 옹호’로 몰아가려는 백현의 태도. 그에 대해 화가 났고, 그 감정이 채 식지 않은 시점에 휘영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불안정한 감정 상태가 이성적 판단에 필요 이상의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 충분히 있다.


“흐음~ 그걸 감안하더라도 확실히 미심쩍긴 하지만…… 생각하니 또 화나네. 아, 그러고 보니……”


백현과의 통화를 떠올리니 짜증이 치밀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실무팀장을 통해 어떤 지시가 전달됐다면, 그보다 상부에서도 관련 내용을 파악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물론 백현이 단독으로 판단한 것일 수도 있지만.


지홍은 머리를 굴린다. 이 문제가 어디까지 올라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건 중요하다. 그 답에 따라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 그가 아는 한 가장 믿음직한 루트라면…… 지홍은 화상전화 앞에 다시 앉았다. 어딘가로 다이얼이 돌아가고, 곧 화면에 익숙한 노인, 해강현의 얼굴이 나타난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잘 지내시죠?”

[음? 이게 누구야. 오랜만이구만. 지난번 통화 때 종종 연락하겠다고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말이야.]

“하…하하… 면목없습니다.”

[허허, 농담일세. 자네 사정이 어떤지 모르는 바는 아니니 괘념치 말게나. 게다가 나도 요즘 돌연변이 이슈 때문에 도통 여유가 없어서…… 참, 자료를 검토하다 보니 지금 자네가 맡고 있는 케이스도 엮여있더군. 골치깨나 썩을 것 같던데.]

‘선생님께서 알고 계시다는 건 역시……’


예상했던 거지만 직접 확인하고 나니 한결 더 불안해진다. 자칫하다간 그간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갈 수 있다. 투자한 시간이 아깝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일을 하다 보면 성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도 흔하니까. 게다가 그 역시 근원계에 소속된 만큼, 규칙에 어긋나는 존재를 무리해서 감쌀 이유는 없다. 다만, 확실한 증거도 없이 휘영을 몰아세우려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을 따름이다.


“안 그래도 그와 관련해서 여쭤볼 게 있어 연락드렸습니다.”

[그런가? 홀홀홀, 그렇구먼. 나도 이참에 궁금했던 점들을 채울 수 있었으면 좋겠군. 별로 큰 기대는 하지 않지만. 그래, 자네는 뭐가 궁금한가?]

“일단 이 말씀을 먼저 드려야겠네요. 사실 이것저것 여쭙고 싶은 게 많아서 꽤 오래전부터 고민했었습니다만……”

[왜, 내가 어떤 입장일지 의심스러웠나? 자네한테 들은 이야기를 불천에게 고자질이라도 할까 봐? 그런 거라면 잘못짚었네. 나 요즘 불천이랑 말 잘 안 하거든.]

“아,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이것도 농담일세. 오늘따라 유독 굳어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자네 성격에 아마… 내 입장을 신경 쓰느라 그랬을 테지. 바쁜데 괜히 시간만 뺏는 건 아닐까, 이 문제로 괜스레 나까지 덤터기 쓰는 건 아닐까. 뭐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지 싶은데. 그게 아니면 그냥 혼을 쏙 빼놓을만치 바빴거나.]

“…저를 손바닥 안에 두고 계시는군요.”

[허허, 그 정도도 못하고서야 어찌 자네에게 선생님이라는 칭호를 듣겠나. 그래, 자네라면 이제 내 입장은 대충이나마 눈치챘을 것 같은데. 본론을 말해보게.]

“제가 인도 중인 케이스 말입니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정확히 모르겠는데… 정말, 아주, 엄청, 매우 불안정합니다. 지난번 말씀드릴 때와는 방향이 좀 다릅니다. 마치…… 두 세계의 중간에 걸쳐있는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호오… ‘두 세계의 중간에 걸쳐있다’라? 참신한 표현이군.]


지홍의 표현을 따라 해 보던 해강현의 얼굴에 반색이 돈다. 제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낯선 듯 흥미로운 문구가 그의 귓가로 예리하게 파고든다.


“정확한 표현은 아니고, 대충 생각나는 대로 읊어본 겁니다. 일단 선생님께서도 관련 자료를 받아보셨겠지만, 기억이 불완전한 상태가 너무 오래 지속되고 있어요. 지금까지 꽤 많은 문헌을 뒤져봤는데,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현상입니다. 게다가 저도 잊고 있었던 게 하나 있었습니다.”

[잊고 있었던 것이라?]

“보통 각성 전후에는 한동안 정체성의 혼란을 겪지 않습니까?”

[그래, 그건 기억 누적 프로젝트 대상자들도 예외 없이 나타나던 현상이었지.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번 케이스는 그 기간이 너무 짧았습니다. 너무 자연스럽게 일상에 적응해버렸죠. 심지어 자기 능력을 금세 받아들이고 실생활에 응용하기까지 했습니다. 지난번 통화 이후로 따로 연락을 드리지 않았던 건, 문제가 됐던 현상들이 금방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해강현은 ‘희석된 악몽’ 가설을 설명하던 당시를 떠올리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애당초 가설일 뿐이니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으니, 금방 없어졌다 해도 이상할 건 없다. 희석된 악몽 이론은 그 날 이후로 연구에 진척이 없어 구석에 처박아둔 상태다. 연구대상이 충분하지 않은 것도 있었고, 요즘은 시간도 턱없이 부족했으니까.


[흠, 각성 후유증 기간이 짧게 나타나는 경우야 종종 있었네만?]

“저도 그래서 관련 자료들을 좀 뒤져봤는데, 개인 차를 감안하고서라도 너무 짧았습니다. 솔직히, 거의 없었다고 보는 쪽이 더 정확할 겁니다.”

[흠…… 홀홀홀, 그렇구먼. 이 자료에 따르면 능력을 응용하는 데까지 걸린 기간도 터무니없이 짧군. 확실히 정상 범주 밖으로 봐도 될 정도야.]

“게다가 정작 각성 이후의 상태는 아이러니 그 자체입니다. 근원계 관련 기억은 불완전한데, 그렇다고 어떤 말썽을 일으킬만한 예후는 보이지 않으니까요. 제가 의문을 갖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합니다.”


화면 속 해강현은 서류뭉치 하나를 집어 들어 몇 장을 넘겨보며 수염을 쓰다듬는다. 지식과 깨달음의 상징과도 같은 그로서도 쉬이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이걸 단순히 돌연변이로 단정 짓고 배제해버리는 게 과연 옳은 걸까요? 저는 경솔한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보십니까? 고견을 여쭙고 싶습니다.”

[허어…]


희미하게나마 걸려있던 미소가 사라지고 이마에 패인 주름이 살짝 도드라진다. 해강현에게는 두 가지 입장이 있다. 먼저 근원계 연구조직 ‘새벽뫼’의 총괄이라는 지위, 그리고 조직과 무관하게 개별 학자로서의 본분. 하나는 근원계라는 사회 안에서 염두에 둬야 할 ‘외부적 위치’라면, 다른 하나는 그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하는 ‘내부적 본성’이다. 사회적인 입장과 개인적인 입장. 보통의 상황이라면 수시로 충돌을 겪겠지만, 근원계라는 특수한 사회에서는 딱히 충돌할 일이 없는, 다른 속성의 입장이다.


생각해본다. 지홍이 내민 문제가 만약 근원계 안에서 벌어진 일이었다면 어땠을까? 골치 아플 일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변칙적인 존재라 해도 그것이 일단 근원계 내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최소 단위의 세부 조건 하나하나까지 통제할 수 있다. 불천이라는 질서 강박증 말기 환자가 전권을 쥐고 있는 한, 말썽이 생길 확률은 한없이 0에 수렴한다. 아마 손발을 다 잘라서라도 말썽이 될 소지 자체를 원천 봉쇄해버렸으리라.


그러고 나면 이 존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의 문제만 남는다. 이때 해강현이 슬며시 나서서 학자로서의 본분을 들먹이며 연구해보겠노라고 고집을 부리면 그만이다. 불천이 규정에 어긋나는 처사라며 투덜거리겠지만, 못하게 막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기현상의 출발점이 근원계의 영역을 벗어난 곳이라는 데 있다. 외부의 영향이 강하게 작용하는 곳에서, 기존 질서의 테두리를 벗어난 개체가 발견됐다. 물론 지금껏 연구대상으로서 접해왔던 공격적 성향의 돌연변이들과는 다를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하지만 규칙을 벗어났다는 점에서 본질은 같다. 단 하나의 조건이 달라진 응용문제 앞에서, 해강현의 두 가지 입장은 순식간에 자석의 두 극과 같은 구도가 된다. 근원계의 질서와 안녕을 우선시할 것인가? 아니면 다소 리스크를 감수하더라도 학문적 가치를 우선시할 것인가?


높은 지위에 있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학자인지라 호기심이 앞선다. 지홍의 말대로 아직 위험요소로 단정하기엔 근거가 부족하다. 아니, 그가 축적해온 지식과 깨달음의 직관으로는 오히려 그 반대일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아직은 ‘촉’에 불과할 뿐이라 불천의 질서 강박 기질을 꺾기에 한참 부족하지만.


[거 참, 쉽지 않군.]

“……”

[보아하니 이 문제에 관해 위에서 뭔가 지시를 받은 모양이지?]

“…네.”

[방금 말한 자네의 의견이라는 건 그 지시와 반대되는 것일 테고?]

“……”

[허어, 이 정도 세월을 살았는데도 이토록 어려운 문제라니…… 자네도 고생이 많구먼.]


해강현은 말없이 눈을 감더니 생각에 잠긴다. 이따금씩 수염을 쓰다듬는 움직임이 없었다면 잠든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평온한 표정이다. 깊은 사색 중에도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그 경지가 지홍은 못내 존경스럽다. 한편으로는 부럽다는 생각도 들고.


[흠…… 내 입장을 먼저 생각해 연락을 미루고 있을 정도였다면 어느 정도 예상했을지도 모르지만…… 사실 나 역시 자네에게 내려진 지시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네.]

“……알고 있습니다.”

[그건 서운하게 생각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아닙니다. 지금처럼 특수한 상황에서 내부에 불안요소를 떠안은 채 갈 수 없다는 건 충분히 합리적인 판단이니까요.”

[그래. 대외적인 입장은 그렇고……]

“……?”

[난 양쪽 모두 납득할 수는 있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정 가운데에 서서 아무 의견도 내지 않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야. 만약 내가 학자가 아니었더라도 말이지.]


지홍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진다. 직설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결국 해강현은 지홍과 뜻을 같이 할 수 있다는 뉘앙스를 내보인 것이다.


[명색이 학자라고 자처하면서 어떤 이유로든 불확실한 걸 대충 넘겨짚고 포기할 수는 없지. 내가 그런 성향이었다면 여기 있는 연구자료들 중 대부분은 애당초 태어나지도 못했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선생님.”


백현과의 다툼이 못내 신경 쓰였던 지홍이다. 나오는 대로 질러버리긴 했지만, 사실 그로서도 고민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아무도 지지해주지 않는 의견을 홀로 고수해나간다는 건 쉽지 않은 일. 더군다나 힘의 논리가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근원계에서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까딱 줄 잘못 섰다간 맞아 죽기 십상이라는 뜻이다.


그러던 와중에 스승 해강현이 자신을 지지해주자 가뭄에 단비를 만난 듯했다. 그가 근원계 내에서 가지는 영향력 때문이기도 했지만, 일단 누구라도 자신의 뜻을 이해해주는 이 하나가 있다는 게 못내 감사하다. 만약 스승마저 회의적인 시각을 보였다면 지홍은 진지하게 포기를 고려했을지도 모른다. 그럼 백현에게 다시 연락해 잔뜩 굽히고 들어갔어야 했을 테고…… 그 뒤에는 폭풍 같은 잔소리가 이어졌을 것이다. 좀 전에 한껏 까칠하게 대들었던 것까지 포함해서.


[감사는 무슨. 이제부터가 진짜 큰 문제인데.]

“혹시 이 문제를 불천님도 알고 계십니까?”

[내가 이 자료를 보고 있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아직 불천은 모르네. 이 자료는 내가 개인적으로 구한 것들이야. 자네가 받았다는 지시는 아마 실무팀장으로서의 판단이었겠지. 허나…… 자네가 반발하는 낌새를 보였다면 불천에게 보고가 올라가는 건 시간문제겠지?]

“아……”


스스로의 경솔함을 후회하는 지홍이다. 낌새 수준이 아니라 아예 대놓고 한바탕 쏴 댔으니까. 대충 듣는 척만 하고 바로 스승에게 연락했다면 꽤 넉넉한 시간을 벌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지나간 일을 후회하는 건 지금으로선 아무 의미가 없다.


“그건 그렇고… 제가 검토했던 자료들 중에는 이런 현상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어려워하시는 걸 보니, 제가 못 찾은 건 아니었나 봅니다.”

[현상의 원인을 밝혀낼 수 있다면 기존의 자료를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만. 현재 상황만 놓고 보자면 전무후무한 일이라네.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내가 흥미를 느끼는 거지만.]

“저에게는 오히려 호재였군요.”

[결과적으로는 그렇구먼. 어쨌거나… 자네가 하고자 하는 바를 정리해보면, 자네가 맡은 이 케이스가 돌연변이 카테고리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는 건가?]

“당장은 그렇습니다. 이후 상황에 따라 다른 조치가 필요할지도 모르겠지만.”

[목적은 간단명료해서 좋군. 방법이 터무니없이 어려워서 문제지.]

“그래서 말씀인데…… 혹시 기억을 조작하는 방법은 안 될까요?”

[흠…… 자네 위치에서는 꽤나 위험한 발상이라는 점,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선생님이니까 이런 말씀도 드릴 수 있는 거죠.”


해강현은 손가락으로 머리를 툭툭 두드리며 생각에 잠긴다. 기억 조작의 술을 응용해 불완전한 부분을 채우고, 각성이 뒤늦게 완전해졌다고 보고한다면? 아주 말이 안 되는 방법은 아니다. 불천과 그 휘하 실무자 입장에서는 하나라도 신경 쓸 일이 줄어든다면 오히려 반가워할 테니까. 직접 나서서 자세한 내막을 알아볼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적어도 당장은.


[어디 보자… 불완전한 기억에 손을 대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세. 내부적인 반대가 당연히 있겠지만, 그건 안 걸리면 되는 문제고.]

“…선생님께서도 몰래 하셔야 하는 일이 있군요.”

[자네가 몰라서 그렇지, 이 자리에 있다 보면 몰래 처리해야 하는 일이 생각보다 많다네. 덕분에 뒤로 꿍꿍이 채우는 기술만 늘었지.]

“하…하하…”

[어쨌든, 기억 조작 시술 부분은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다고 치고, 문제는 따로 있다네.]

“어떤 겁니까?”

[당사자를 여기로 데려와야 한다는 거지.]

“……네?”


지홍은 순간 귀를 의심할 뻔했다. 하긴, 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기억 조작은 무척 세밀한 작업. 게다가 휘영처럼 본래 각성 시기를 놓친 경우는 쌓여있는 기억의 총량이 많아 더욱 섬세한 컨트롤을 요한다. 해강현 정도의 경지라면 간단한 기억 조작쯤 원격으로 처리할 수도 있겠지만, 이 정도의 정밀 작업을 원격으로 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다른 기억 조작 능력자를 파견해주실 수는 없습니까?”

[음… 그건 어렵네. 알다시피 작업 자체의 난도가 높지. 단순한 조작이 아니라 기존의 기억을 내버려둔 채 불완전한 부분만 채우는, 일종의 응용 기법이니까. 즉, 그걸 할 수 있는 이는 한 손에 꼽을 정도야.]

“아……”

[백 번 양보해서 나가는 데 성공한다고 치세. 하지만 행적이 노출되는 건 시간 문제지. 그 정도 지위에 있는 존재가 움직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니 금방 눈에 띌 수밖에 없다는 거야. 아마 내가 나가는 거랑 별 차이가 없을걸? 즉, 내가 나가는 거나 그쪽을 이리로 데려오는 거나 리스크는 똑같고… 그렇다면 이 늙은이가 움직이는 것보다 쌩쌩한 젊은 남녀 둘이 이쪽으로 넘어오는 게 바람직하지 않겠나?]

“……”


문득 화면 속 노인의 얼굴이 무척 두껍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걸 따지고 들 수는 없는 노릇. 막막하다. 그렇다면 정말 휘영을 근원계로 데려가는 방법밖에 없다는 건가? 하지만 무슨 수로? 이 모든 상황을 그녀에게 이해시키는 일도 어렵지만, 근원계에 관한 기억이 거의 비어있는 영을 데리고 근원계로 들어가는 건 더 어렵다. 게다가 그냥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잠입’ 해야 한다지 않은가. 그야말로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일이다. 또, 들어간다고 끝나는 일인가? 시술이 끝나고 다시 나올 때까지 들키지 않아야 하는, 그야말로 완전범죄(?)가 돼야 한다. 지끈지끈 머리가 아파온다.


[머리 쥐어뜯는 중에 미안하네만, 어찌어찌 여기 와서 시술을 마친다 해도 그게 끝이 아니네.]

“또 뭐가 있습니까?”

[기억 조작이라는 게 말이지. 결국은 영들을 순환시킬 때 쓰는 기억 봉인과 같은 원리거든. 바꿔 말하면 기껏 기억을 만져놓아도 이게 언제 어디서 어떻게 풀릴지 모른다는 이야기야. 그렇다고 완전 조작을 해버리면 애초에 아무 의미 없는 짓이 되지 않나? 존재 자체가 바뀌어버리는 셈이니.]

“그…렇네요.”


힘겹게 대답은 했지만 사실 지홍은 거기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다.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하는 것도 될지 안 될지 모를 마당에 그 뒤에 있는 문이 강철 문짝이든 다이아몬드 문짝이든 무슨 상관인가? 무엇보다도 침착하게 준비할 시간이 없다. 휘영과의 통화 내용에 따르면 그리 머지않아 중요한 작전에 돌입할 예정. 그렇다면 당장 오늘이라도 휘영을 찾아가 일을 진행시켜야 할지도 모른다.


[하나 묻겠네. 자네는 왜 이렇게까지 그 처자를 도우려는 건가?]


그러고 보니 그렇다. 왜 지홍은 이렇게까지 휘영의 일에 발 벗고 나서는 걸까.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성격’을 핑계로 내세우기엔 이미 말이 안 된다. 휘영의 영을 인도하는 임무는 벌써 군데군데 구멍 투성이. 하나같이 지홍의 지위로는 결코 채워 넣을 수 없는 것들이다. 완벽함을 자랑하던 커리어는 이미 어그러진 상황. 그렇다면 자신은 왜 이토록 휘영에게 집착하는가? 오늘이 아니라도 몇 번을 생각했던 의문이지만 이렇다 할 결론을 얻지는 못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이게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건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이유가 뭐든 상관없이 그래야 할 거 같은 느낌이 든달까요.”

[홀홀홀, 사모하는 것만 아니면 되네. 조만간 자네 임자를 만날 일이 있을 것 같은데… 음, 사모하는 게 아니라면 별로 재미는 없겠구먼.]

“서…선생님…?”

[허허허허, 농담이야 농담. 워낙 심각하게 머리를 쥐어뜯고 있기에 분위기 좀 돌려보려고. 결심이 서면 다시 연락 주게. 아,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할 일인가?]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나야 크게 준비할 건 없으니 언제든 상관없네. 출발 직전에 연락 주면 내부 경비들은 좀 치워줄 수도 있겠군. 그보다 자네 직속 팀장도 막아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건 내가 도와줄 수 없는 부분이니 알아서 잘 해결하도록 하고…… 난 불천을 만나서 밑밥이라도 깔아놓든지 해야겠네. 에잉, 그 노친네도 요즘 성깔 보통이 아니던데. 여러 모로 피곤해지겠구먼.]

“……”

[오래간만에 재미있었네. 그럼 난 이만.]


화면이 툭 꺼진다. 긴장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스승의 모습과 달리 지홍은 깜깜해진 화면을 바라보며 있는 힘껏 한숨을 내쉰다. 그 까마득한 화면이 앞으로 닥쳐올 자기 운명처럼 느껴진다.




마음을 최대한 비우고 편안히 쓰는 중입니다. 개연성을 챙기려다 보니 처음 계획에는 없었던 장면들이 자꾸 늘어나네요. 아무래도 올해 안에 완결 짓는 건 물 건너 간 듯합니다. 중간에 몇 개월씩 게으름 피우지만 않았어도 충분히 완결을 봤겠지만… 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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