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원계에 속한 여러 존재들. 그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수면 아래 날카로운 대립.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경계를 넘어 스멀스멀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대립의 원인을 제공한 휘영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 중간에서 일련의 정보를 전달해줘야 할 지홍은 지금 크나큰 혼란을 겪는 중이고, 그렇다고 휘영 측에서 그걸 따지고 들 입장도 아니다. 자고로 알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는 궁금해할 여지도 없는 법. 불완전한 각성 탓에 휘영은 근원계의 일에 의문을 갖고 뭔가를 추궁할만큼의 지식과 정보마저 없는 상태였으니까.
게다가 시간적인 여유도 없다. 형사로서의 일이 한가한 것도 아니었고, 마침 추진 중인 대형 프로젝트(?) 탓에 수시로 미팅과 회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홍과 안부 통화 직후, 휘영은 일전의 카페에서 현우와 다시 마주앉아 있었다.
“자료는 잘 전달 받으셨나요?”
“네. 덕분에 팀 지원도 받을 수 있었고, 작전 세우는 데도 도움이 많이 됐네요. 늦었지만 고마워요.”
“별말씀을. 전 계약대로 했을 뿐인데요. 아, 그건 그렇고… 혹시 언제쯤 움직일 예정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건… 왜요?”
본능적으로 경계심이 치고 올라온다. 대외적으로 봤을 때 현우는 제보자 신분. 어느 정도의 진행상황을 알 자격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 작전은 제보 내용을 토대로 경찰조직 내에서 세워진 2차 산물이며, 동시에 보안사항이기도 하다. 타겟 관련 자료를 준 장본인이니 모든 계획을 공유해달라는 논리라면 얼마든지 받아칠 수 있다는 이야기다.
현우는 이유를 되묻는 휘영의 표정을 살핀다. 경계심 혹은 의구심.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다는듯, 현우는 피식 웃으며 답한다.
“아아, 오해는 하지 마세요. 작전 관련 정보를 공유해달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다만…?”
“음…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정보 업데이트라고 하면 되겠네요. 최근 며칠간 타겟의 상태가 좀 불안정하다는 게 포착됐거든요.”
“…걔 원래 그러지 않았어요? ‘좀’이 아니라 많이 불안정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휘영은 손가락 하나를 머리 옆에 대고 빙빙 돌려보이며 말을 받았다.
“그거야 부정할 수 없습니다만, 이번엔 좀 다른 의미입니다. 움직임이 좀 부산스럽습니다. 이를테면… 곧 그 장소를 떠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라고 할까요.”
“무조건 제 쪽으로 올 거라면서요?”
“그렇긴 한데… 그거야 현장에 은 경위님이 계실 때 이야기죠. 설마하니 은 경위님이 현장에 찾아올 때까지 멍하니 죽치고 기다릴 거라는 의미로 이해하신 건 아니겠죠?”
“…하긴 그렇네요.”
“놈은 지금 매우 예민한 상태일 겁니다. 쫓기는 입장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데다가… 정작 자신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에는 제대로 접근조차 못하고 있으니까요. 은 경위님 기억으로는… 그때 한 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죠?”
‘목표’라는 단어를 언급하며 현우는 조심스러운 투로 질문을 던진다. 평소 그의 성격이라면 상대방의 기분상태 같은 건 개의치 않겠지만, 지금은 한시적이나마 협력관계에 있으니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예민한 질문이기도 했으니까. 휘영은 무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감정적인 반응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타겟 입장에서 봤을 때 슬슬 거점을 옮긴다 해도 이상할 건 없습니다. 형사 생활을 꽤 하셨으니 알겠지만, 큰일(?) 저지르는 놈들이 본거지 옮기는 거야 흔한 일이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죠. 그럴 때마다 저희 야근이 늘어나곤 하니까.”
“이 녀석도 비슷하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단순히 위치만 옮겨서 다시 숨을 수도 있고, 아니면 접근 방식 자체를 바꿀 수도 있겠죠. 하지만 어느 쪽이건, 위치가 바뀌어버리면 지금까지 진행했던 모든 게 허사가 될 겁니다. 그래서 서두르는 편이 좋겠다는 의미에서 작전 일정을 여쭤본 거고요.”
휘영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일단 현우의 말에 딱히 틀린 부분이 없으니 구태여 사족을 달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얼마나 서둘러야 하는가? 이 질문을 입력하자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작전 일정을 앞당기려면 영태에게 또 어떤 식으로 이야기해야할지 막막하다.
“대략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까요? 녀석이 어딘가로 이동하기까지 남은 시간이.”
“그걸 추정할 수 있었다면 제 성격에 처음부터 이야기했겠죠? 게다가 이동할 거라고 확정짓는 것도 좀 곤란합니다. 어쩌면 정말… 말씀하신대로 은 경위님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굉장히 비합리적인 패턴이지만… 애초에 ‘합리적’이라는 표현과는 거리가 먼 녀석이니까요.”
“흠… 그러니까 일종의 보험 같은 거네요. 어딘가로 이동해버릴지 아닐지도 장담할 수 없고, 이동한다 해도 얼마나 빨리 행동에 옮길지 모른다… 그러니 그냥 가능한 한 빨리 움직이는 게 최선이라는.”
“그렇습니다. 여기까지 와서 놓쳐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니까요. 만약 이번 작전이 무산돼 버리면…… 두 번째 기회는 없을 겁니다.”
“네? 그건 무슨 뜻이죠?”
“만약에 이번에 놈이 위치를 옮겨버리면 다시 찾아내서 그냥 제 손으로 없앨 예정이거든요. 다시 판을 짜고 은 경위님과 정보를 공유하고 또 기다리고…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봐도 그것보다는 제가 직접 해결하는 편이 훨씬 경제적이라서 말입니다. 다소 리스크가 있긴 하지만.”
“…그거 계약 위반 아닌가요?”
“글쎄요. 저는 약속한 걸 다 지켰습니다만. 제가 뭐 어긴 거라도?”
“……”
반박할 수가 없다. 현우의 말대로 저쪽에서는 약속한 걸 모두 지켰으니까. 하긴, 생각해보면 이 계약은 처음부터 휘영 쪽이 아쉬운 입장일 수밖에 없었다. 핵심 정보와 자료는 저쪽에서 쥐고 있었고, 그걸 제공받은 다음에야 구체적인 행동 계획을 세울 수 있었으니까. 게다가 문득 생각해보니, 지금과 같은 변수가 있을 때 애프터서비스를 해준다는 언급은 없었다. 뭔가 거하게 한 방 먹은 기분이 들었지만, 이제 와서 그걸 따지고 들어봐야 이 깐깐하고 까칠한 작자에겐 씨알도 안 먹힐 게 분명하다. 꼼꼼하게 따져보지 않은 휘영의 잘못이라고 하겠지…
“그런 최악의 상황이 오지 않도록 이렇게 알려드리러 오지 않았습니까? 오, 지져스! 이렇게 친절할 데가!”
“…그딴 데다 예수님 찾지 마시죠. 예수님 믿지도 않는 분이.”
“종종 듣는 말이긴 한데, 어감이 좋아서 쓰게 되네요. 아무튼 전할 말은 다 전했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래뵈도 제가 꽤 바쁜 몸이라서. 아, 차 값은 제가 내고 가지요.”
자기 말을 마치자마자 현우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휘영도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더 앉아있는다고 달리 할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원래 현우의 성격이 그렇다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익숙해진 터다.
“하여간에 성질 급하기는… 근원계라는 곳 인간들은 이놈이나 저놈이나 하나같이 마이 페이스인 건가…”
“아, 맞다!”
“……!?”
지홍을 떠올리며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리던 휘영은 하마터면 마시던 차를 뿜을 뻔했다. 작게 말한다고 했는데 혹시 들린 건가? 조심스레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현우는 바로 앞까지 다가와있었다. 또 한 번 간담이 서늘해짐을 느낀다. 이 인간, 다른 건 몰라도 심장 건강 안 좋게 만드는 데는 확실히 일가견이 있다.
“혹시라도 제가 뭔가 계약을 안 지킨 게 있다면 꼭꼭 숨겨뒀다가 말씀해주세요. 달리 해드릴 건 없고, 위약금이라도 두둑하게 챙겨드릴테니.”
“참 세속적인 말씀이시네요. 돈 많으신가봐요?”
“부족하지 않을 만큼은 있습니다. 저야 딱히 돈이 필요없는 입장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여기 사람들에게는 많을수록 좋다죠?”
“참 뭐랄까, 부럽기도 하고 뭔가 재수없기도 하고 그렇네요. 아~ 부럽다. 아~ 좋겠다.”
영혼없는 표정으로 비꼬는 듯 박수를 친다. 물론 현우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그래봐야… 제가 계약을 어길 리가 없잖습니까? 별 쓸데없는 돈이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은 경위님에게 뜯길 일은 없을 것 같군요. 후훗.”
“……바쁘다고 하시지 않았던가요? 그런 재수없는 멘트에 더 재수없는 바람소리 낼 시간 있으면 얼른 좀 가버리시죠.”
“네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큰길에서 뻗어나온 작은 길들이 또 한 번 작은 길로 나뉜다. 그 과정을 몇 번 반복하다보면 어느새 인적 드문 골목길이 나타난다. 큰길을 따라 움직이던 수많은 인파들도 잘게 쪼개진 길을 만날 때마다 저마다의 목적지로 흩어진다. 그러다보면 인적이 드물다못해 을씨년스럽다는 수식이 더 어울리는 구불구불한 소로가 생겨나기도 한다.
거미줄처럼 뻗어들어가는 한 골목길의 초입. 비교적 돌아나오기 쉬워보이는 어느 모퉁이에서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살짝 아지랑이가 일렁이는가 싶더니 허공에 자그마한 공간이 열린다. 그 틈으로 주위를 살펴보기라도 하는듯 잠시 시간이 흐르고, 곧이어 큼직한 공간이 입을 벌리며 사람이 튀어나왔다.
“헤에… 이거 참 신기한 느낌이네.”
백현은 자신의 손과 발을 살펴보며 감탄한다. 불천의 방에서 혼돈 속으로 몸을 던진 그가 경계를 넘어온 것이다. 낯선 공간을 지나며 뭔가 이질적인 느낌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별 탈없이 경계를 넘는데 성공했다.
“어디 보자…… 우리 말썽꾸러기 후배 녀석이 어디에 짱박혀 있으려나.”
구체적인 주소는 몰라도 상관없다. 영에서 피어나는 기운을 따라가는 건 모든 근원계인의 기본 능력 중 하나다. 물론 개인마다 감지할 수 있는 거리에는 차이가 있다. 탐색 계통의 능력이 뛰어날수록 더 먼 거리까지 볼 수 있고, 더욱 정밀한 위치까지 알아낼 수 있는 시스템. 하지만 이 정도의 가까운 거리라면 비전공자인 백현도 충분히 탐색이 가능하다.
“저기구만.”
백현은 골목길 안쪽 바로 근처에서 지홍의 기운을 포착해냈다. 외관상으로는 지어진지 꽤 오래된듯 보이는 3층짜리 건물. 정확히 몇 층에 틀어박혀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개의치 않는다.
“그 놈 성격상 아마 이 건물을 통째로 쓰고 있을 게 뻔하니 1층부터 차근차근 뒤져보지 뭐. 그나저나… 능력은 어느 정도까지 가능하려나? 어디 적당한 게……”
먼저 주위를 한 번 더 살핀다. 일반인이든 근원계인이든 누구에게라도 보여서는 안 되는 장면이다. 주위에 느껴지는 근원계인의 기운은 지홍 뿐이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 한 번 더 신중하게 둘러보기로 한다.
예감이 별로 좋지 않다. 몸 안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확연히 줄어있다. 백현은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 하나를 주워 손아귀에 쥐었다. 살짝 힘을 줬다가 펴본다. 순간 그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 마치 놀리기라도 하듯 손바닥 안에 멀쩡한 모습으로 남아있는 돌멩이. 부아가 치밀어 다시 한 번 움켜쥔다. 방금보다 더 힘을 넣어서,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힐 정도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손을 펴자, 딱 반으로 쪼개진 돌이 그를 맞이한다. 약올리듯 방긋 웃고 있는 것만 같다.
“이런 미친? 대체 얼마나 줄어든 거야?”
솔직히 불천이 부작용에 대해 이야기할 때, 반은 농담으로 들었던 게 사실이다. 설령 있다고 해도 그리 심각한 수준은 아닐 거라 생각하고 건성으로 들었던 백현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펼쳐진 황당무계한 상황은 무엇인가.
백현은 본래 전투에 특화된 타입, 특히 순간적으로 폭발적인 힘을 낼 수 있는 스타일이다. 마음만 먹으면 이런 돌멩이 같은 건 그냥 손을 가볍게 쥐었다 펴기만 해도 가루로 만들어 흩날릴 수 있을 정도여야 옳다. 그런데 얼굴이 찌푸려질만큼 힘을 썼는데 고작 반토막이라니.
“…하…하하, 불천님. 아무래도 제가 신기록을 쓴 것 같네요. 이 정도면 100분의 1, 아니 1000분의 1은 족히 되고도 남겠습니다……”
그나마 장기라 할 수 있는 힘이 이 정도라면 서브 역할을 하는 민첩성은 더 형편없는 수준일 것이다. 멘탈이 와르르 무너져내릴 것만 같다. 이대로는 지나가던 불량청소년 대여섯 명에게도 승산을 장담하기 어렵지 않을까.
“건방진 우리 후배님께서 이걸 알면 옳다꾸나 하고 때려죽이려 들텐데…… 저 눈치빠른 놈 속여넘기는 것부터 일이겠구만.”
어쨌거나 넘어온 이상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 백현에게 돌아갈 길 따위는 없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지홍과 담판을 지어야만 한다. 인적 드문 골목길 어귀에서 백현은 자신이 지나온 곳 못지 않은 혼란을 겪고 있었다.
“……형님?”
한 켠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 당황한 백현은 얼른 표정을 감추고 몸을 돌렸다.
당황스럽기는 지홍도 만만치 않다. 해강현과의 대화를 통해 시간이 촉박하다는 걸 깨달은 그는 바로 행동에 나섰다. 일단 휘영을 만나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곧장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연락은 움직이는 도중에 해도 될 것이다…라고 상황을 정리하며 건물 밖으로 나왔는데, 골목 입구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인 것이다.
“어, 오랜만…이다?”
“오랜만이라니…… 지금 그런 인사나 하고 있을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렇긴 하지.”
“어쩐 일로 여기까지 넘어오셨는지는… 물어볼 필요가 없겠군요.”
“너도 네가 사고를 친 건 아는 모양이지? 그러게 전화라도 바로 받지 그랬냐. 그럼 이렇게 서로 당황스럽게 마주치는 시츄에이션까지는 없었을 텐데. 수화기를 아예 내려놓은 건지 계속 통화 중이더라?”
“아… 그건 진짜 통화를 한 건데요. 그래봐야 변명밖에 안 되겠지만.”
“근원계 직통 라인이 통화 중이었다고? 직속팀장인 나 외에 네가 통화할 만한 곳이라면… 해강현님이겠군.”
“……”
역시 백현은 지홍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직속팀장이 되기 이전부터 교류가 있었던 관계니 당연한 일이다. 바꿔말하면, 서로 대립할 때는 그만큼 상대하기 까다롭다는 의미도 된다.
“평소라면 그냥 안부인사나 드렸겠거니 하고 넘어가겠다만… 지금은 아니지. 안 그러냐?”
“……잘 아시네요.”
“후우……”
“그건 그렇고… 형님, 아니 팀장님께서 여기까지 직접 오셨다는 건……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보면 되는 겁니까?”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냐. 전화로 할 때보다 상황이 심각해진 건 맞지만.”
지홍은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해본다. 백현이 여기에 와 있다는 건 경계를 넘어갈 권한이 있는 이에게 허락을 받았다는 뜻. 그의 선에서 닿을 수 있는 존재라면 불천 또는 해강현 뿐이다. 하지만 해강현은 아니다. 그가 경계 이동에 관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공식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니까. 게다가 백현이 경계를 넘어올 당시까지 해강현은 자신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답은 불천 뿐이다. 그것은 곧, 이 모든 상황을 불천도 알게 됐다는 의미. 언제나 원칙에 근거해 일을 처리하는 불천이 경계 이동을 허락했다는 건, 어쩌면 자신에 대한 징벌이 이미 기정사실화됐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일이다. 물론 최악의 경우를 상정했을 때의 이야기지만. 그런 생각을 읽기라도 한듯, 백현이 말을 덧붙인다.
“오해할까봐 미리 말하는데, 널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온 건 절대 아니다. 상황은 급한데 연락은 안 되니까 답답해서 넘어온 거지.”
“제가 통화를 좀 길게 하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너무 성급하셨네요.”
“그건 나도 인정. 솔직히 넘어오기 직전에 살짝 후회했거든. 하지만 어쩌겠냐.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그건 그렇군요.”
“난 너처럼 정보형도 아니고,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라서 빙빙 돌리는 복잡한 말싸움 같은 거 못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마. 지금도 안 늦었어. 그 케이스, 포기해.”
역시 예상했던 흐름이다. 지홍은 한숨을 내쉬며 대꾸한다.
“…제가 포기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끊어내는 거지. 프로젝트 대상자라는 건 좀 아깝지만… 더 큰 리스크를 피하려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하지 않겠냐.”
“……”
백현은 한쪽 손바닥을 다른 쪽 손날로 툭 치는 제스처를 취하며 말한다. 지홍은 순간 속에서 뭔가 울컥 치미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 이게 싫었던 거다. 한 개인을 한낱 미물처럼 취급하는 태도. 그들의 모습에 화가 나는 건 지금껏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감정이다. 지홍은 맡았던 인도를 완벽하게 처리해왔고, 실수가 없었던 만큼 그가 맡았던 영들이 이런 식의 취급을 받을 이유도 없었으니까.
실패는 커녕 조그마한 실수 하나도 용납하지 않았던 성향. 치밀하고 꼼꼼하면 마냥 좋기만 한 거라 생각했었다. 단 한 번의 변수로 이 정도 감정적 동요를 겪을 수 있다는 건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그저 이렇게 계속 꼼꼼하게 일을 처리해나가면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외부적 요인으로도 얼마든지 깨질 수 있는 것. 완벽이란 건 애초에 허상과도 같았다는 깨달음을, 최근 경험으로부터 얻어가는 중이었다.
화가 난다. 이유는 모른다. 조금의 변수도 용납하지 않았던 자신의 신념이 어리석었다는 자책 때문인지, 아니면 눈앞의 이 사람을 비롯한 근원계 존재들의 무감각한 태도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이유 때문인지. 그저 화가 난다.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끊어내면요?”
“근원계와 연결이 끊어지면 영은 회수될 테고… 대순환 시스템에서 돌연변이와 관련해 검사를 한 뒤에 알아서 처리하겠지. 너도 다 알고 있을 텐데 왜 자꾸 묻냐?”
“그럼 그 영이 들어가 있던 육체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 그건 너도 잘 모르겠구나. 하긴, 그렇겠지. 그 뒤의 일은 인도자들이 신경쓸 문제가 아니니까. 음… 근데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도 잘 몰라.”
“……모른다고요?”
이런 무책임한 말이라니, 다시 한 번 화가 치밀어오른다. 조금 전의 분노는 희미했지만 이번엔 한층 짙어졌다. 백현도 그걸 느꼈다. 지홍의 영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파동이 몸 밖으로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순간 백현은 흠칫했다. 다른 때 같으면 지홍이 백현에게 진심으로 화를 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팀장과 팀원이라는 지위를 고려하면 하극상이 되기 때문이지만, 사실 단순하게 능력만 놓고 따져봐도 그렇다. 전투형 베이스인 백현과 정보형 베이스인 지홍의 싸움이라는 게 애초에 미스매치일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경계를 넘어온 페널티로 백현의 힘은 대폭 줄어든 상태. 아마 지금 상태로 지홍과 싸움이 벌어진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다. 평소 해강현과 교류가 잦은 지홍이라면 이 페널티에 대해 알고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백현은 꿀꺽, 침을 삼킨다. 최대한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요즘 밥벌이가 불안정해져서 글이 손에 잘 안 잡힙니다. 특히 감성 글이 더더욱 안 써지네요. 그나마 소설은 기존에 잡아놓은 설정들이 있어서 어느 정도 진행이 되긴 됩니다만, 그래도 둔해진 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열심히 해서 전업으로 먹고 살 수 있는 수준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합니다만, 취미가 직업이 되면 어떤 부작용이 나타나는지를 이미 한 번 경험해본지라… ^^;;
지금 진행 중인 부분은 초반 기획에서도 꽤 비중있게 잡아놓은 부분이라 앞으로도 꽤 길게 전개될 듯 보입니다. 최대한 지루하게 느껴지지는 않도록 신경써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전체 연재작은 매거진 : 자칭 B급 판타지 소설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