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워, 일단 진정하고. 말 좀 끝까지 들어봐.”
한없이 치솟을 것 같던 지홍의 감정이 어느 순간 일정한 흐름을 유지한다. 통제할 수 없이 치밀어 오른 화를 애써 이성으로 억누르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타이밍, 백현은 자세를 낮춰 들어간다. 오해로 불거진 상황에서 권위를 내세워봐야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
“후우…… 저도 모르게 울컥했네요. 말씀하시죠.”
“이걸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하나… 일단 너도 아는 부분부터 시작해보자.”
“……?”
“아주 예전 이야기, 생각나지? 두 개의 세계가 만들어졌고 지금의 근원계가 중심 역할을 하기로 정해졌던 시절.”
“근원계 역사 기초 과정이죠.”
“그때 이쪽 세계의 육체는 근원계의 영을 담기 위한 그릇으로서만 의미가 있었어. 네가 해강현님 밑에서 교육을 받고 인도자 일을 시작하기 훨씬 이전부터.”
“알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양쪽 세계는 물리적인 법칙부터가 다르니까. 근원계의 영이 이쪽 세계와 순환하려면 그에 걸맞은 형식이 필요했겠죠. 흠… 그것 말고는 딱히 필요성이 없었으려나? 잘 모르겠네요. 그 시절을 제가 안 살아봐서.”
“……난 공부하는 타입이 아니라서 어려운 말은 모른다. 굳이 나한테 리플레이할 필요는 없어. 아무튼! 그 시절에는 육체에서 영이 빠져나가고 나면 그걸로 끝. 이쪽 표현대로 하자면 ‘죽는다’라는 거지. 그 시절에는 예외 같은 건 없었어. 누군가 규칙으로 정해놓은 것처럼. ”
“‘그 시절’을 묘하게 강조하시는 것 같은데… 지금은 다르다는 말씀을 하려는 겁니까?”
“그래, 바로 그거다. 규칙이 바뀐 이유는 ‘두 세계의 건설’과 ‘중심 경쟁’ 이후에 있었던 어떤 사건 때문인데… 넌 아마 교육이나 자료로 접했을 거야. 워낙 대형 사건이어서 안 다룰 수가 없었을 테니까.”
지홍은 잠시 생각에 잠긴다. 과거 배웠던 것들을 찬찬히 되짚다 보니 불현듯 떠오르는 게 있었다. 두 세계의 완전한 분리를 시도했던 초유의 사건. 초대형 중에서도 으뜸으로 치는 사건이다. 지금이야 대순환 시스템을 바탕으로 두 세계가 연결돼 있는 만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하지만 그 대순환 시스템이 만들어지기 전이었다면 전혀 허무맹랑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근원계의 역사를 다룬 거의 모든 서적에서 빠지지 않는 메이저급 사건이지만, 지홍의 기억상 어떤 수업에서도 거론한 적이 없다. 교육뿐만 아니라, 그 외 현직에 있는 근원계인들도 하나같이 입에 담기를 꺼리는 주제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 양쪽 세계를 통틀어 최고 서열에 해당하는 이가 사건의 주동자였고, 현재까지도 그는 최고 서열을 유지하는 존재 중 하나이기 때문.
‘그래… 높으신 양반들 치부 감추려는 것쯤이야 익히 보던 일이지. 여기서나 그쪽에서나.’
지홍은 해강현의 몇 안 되는 직계 제자 중 하나였다. 기초 과정 수료 후 해강현에게서 심화 과정 지도를 받은 덕분에 역사 분야에서는 전공 학자들 못지않게 방대하고 체계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편이다. 그 사건에 관한 더 깊은 이야기를 궁금해할 동기는 충분했고, 그럴 기회도 있었다. 해강현 역시 서열로는 최고위급에 해당하는 데다가, 무엇보다도 그 사건을 직접 경험했던 당사자 중 하나. 보다 정확한 팩트를 확인하기에는 최적의 위치였다.
모든 조건이 갖춰져 있었지만, 지홍은 말을 아꼈다. 민감하고 위험한 이야기는 차라리 모르는 편이 좋을 거라고. 가르치지 않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그렇게 여기던 시절이었다. 근원계 지배층 입장에서 보자면 일종의 반역과 같았을 테니, 쉬쉬하려는 게 당연하다며 자신의 호기심을 합리화의 그늘 아래로 감췄다.
“젠장…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일 줄 알았으면 그때 확실히 여쭤보는 건데…”
“응? 뭐라고?”
“아, 아닙니다. 그냥 혼잣말이요.”
만약 그때 그 사건이 어떤 식으로든 성과를 거뒀더라면 어땠을까? 두 세계를 연결하는 대순환과 그를 기반으로 하는 지금의 질서는… 애초에 자리를 잡지 못했거나, 일찌감치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냐. 애써 떠올릴 필요는 없어. 아마 교육이든 책이든 대충 언급만 했을 테니까. 가르치는 사람에 따라 대놓고 건너뛰었을 수도 있고. 소문은 워낙 많은데 제대로 확인된 내용은 거의 없는 사건이라.”
“그러네요. 저도 얼핏 근원계 전체가 뒤집어질 뻔한 이야기라고만 들었던 걸로 기억하거든요. ……잠깐, 그럼 혹시 형님은 더 아시는 게 있다는 겁니까?”
“아니, 그런 건 아냐.”
“…하긴… 알아도 모른다고 하셔야 할 입장이셨죠, 아마?”
“아오, 몰라! 진짜 모른다고! 똑똑한 놈들은 이게 문제야. 뭔 말을 해도 의심부터 하고 본다니까.”
“늬예~ 늬예~ 백현 팀장님은 모르시는 걸로 할 테니, 원래 하려던 이야기나 계속하시죠.”
지홍은 은근슬쩍 화제를 돌려 분위기를 바꾼다. 추궁당해서 좋을 것 없는 생각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젠장! 징계를 먹든 말든 이 기회에 꼬리 싹 자르고 모른 척해버릴 걸 그랬어. 얄미운 자식 같으니…… 뭐, 아무튼. 핵심은 이거야. 만약 그 사건 이전의 존재였다면 영이 회수되는 순간 육체는 100% 죽게 되는 게 맞겠지. 하지만 엄청나게 오래전 일인데, 그 시절에 존재하던 육체가 아직까지 살아있을 리는 없잖아? 미라처럼 누군가 방부제라도 채워서 보관해놓았다면 모를까.”
“보관해놨다한들 거기에 영을 배정할 수도 없었겠죠. 만약에라도 그게 된다고 한들 낡아빠진 관절 덜그럭거리면서 뛰어다니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고요. 이쪽 세계 인간들 신체조직이 무슨 기름칠하면 다시 쓸 수 있는 기계 부품도 아니고.”
“그렇지. 자,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네가 했던 질문을 다시 던져봐. ‘그 사건 이후의 존재들’은 영이 빠져나간 뒤에 어떻게 될까?”
“……다짜고짜 퀴즈입니까? 뭔 단서도 안 주시고… 어떻게 되는데요?”
“아까 내가 말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는 게 그 뜻이다. 무책임하게 나는 모르오~ 하는 게 아니고, 글자 그대로 알 방도가 없어. 좀 더 정확히는 ‘미리 알 수가 없는’ 거지만.”
“……그런 뜻이었군요. 처음부터 그렇게 좀 친절하게 설명해주시지. 하도 무책임한 말투라 울컥해서… 하마터면 제대로 한바탕 개길 뻔했네.”
“그랬으면 넌 최소한 피떡이 됐겠지. 뭐, 심하면 삼도천 건너갔을 수도 있고.”
“흠, 그럴… 까요? 저도 그간 놀고 있었던 건 아닌데. 지금 기준으로는 상대 좀 되지 않을까요?”
“…네가 꽤 오래 안 맞았더니 감을 잃었구나. 좋게 말로 하려고 했더니.”
“그럴 리가요. 말로 하시려던 계획이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주먹을 들어 보이며 잔뜩 폼을 잡았지만 솔직히 백현은 뜨끔했다. 이 눈치 빠른 자식이 뭔가 낌새를 알아챈 걸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경계를 넘을 때 생기는 부작용에 관해 주워들은 정보가 있는 건가? 만약 그런 거라면… 지금 떠보는 건가? 확신만 있으면 두들겨 패서라도 제 갈 길 가겠다는 거? 온갖 상상이 피어올라 순식간에 백현의 머릿속을 빼곡히 채운다.
백현이 불안함과 긴장감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용을 쓰거나 말거나, 지홍은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펼쳐가고 있었다. 그의 설명이 어떤 의미인지를 혼자서 재조립해본다. 목적은 분명한데, 아직 아귀가 맞지 않는다. 지금 시점에 왜 이런 설명을 구구절절 늘어놓는 걸까? 백현과 지홍이 충돌했던 주제, 또 지홍이 계획하고 있던 향후 행동들과는 곧장 연결이 되지 않는다.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하나의 선상에 놓고 보기에는 빈 부분이 많다. 그가 그리는 그림을 완성하려면 조각이 좀 더 필요하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는데요. 그 이야기랑 제가 지금 담당 케이스를 포기해야 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죠? 딱히 관계가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그거 설명하려고 시작한 건데 도중에 네놈 페이스에 말려서 끊은 거잖아.”
“아… 그러셨구나… 저 때문에 끊으신 거구나… 그럼 네, 마저 이야기하시죠.”
‘저 표정 저거… 오, 불천님. 진짜 이 자식이 뭔가를 알고 저러는 겁니까? 아니면 허세에 제가 말려든 겁니까? 진심으로 딱 한 대만 콱 쥐어박고 싶은데… 지금 상태로 그랬다간 되려 신나게 얻어터지겠죠? 아아… 어찌하여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아……’
마음속으로는 이가 부득부득 갈리는 심정이지만 백현은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말을 잇는다.
“물론… 영을 회수한 뒤에 나타나는 결과에 따라 각각의 대처법은 마련돼 있어. 지난 사례들을 보자면… 첫 번째로는 사건 발생 이전처럼 그냥 죽음을 맞는 경우가 있지. 갑자기 픽 쓰러질 수도 있고, 사고 같은 걸로 처리될 수도 있어. 아니면 시름시름 앓다가 병에 걸릴 수도 있고. 어떤 형태든 간에 이게 제일 바람직한 결과야. 사후 처리할 일이 가장 적은 데다가 가장 흔한 케이스라 모든 절차가 갖춰져 있으니까.”
“다른 건요?”
“두 번째는 영이 나간 뒤 껍데기만 남은 무영無靈 상태로 남은 수명을 채우는 경우. 어쩌다 한 번씩 있는 케이스이긴 한데 넌 못 봤을 수도 있겠다. 최근에는 보고된 적이 없으니까. 우리 팀도 그렇고, 일직팀 월직팀 전부 다.”
“흠, 확실히 들어본 적 없는 사례네요. 뭐, 좀비Zombie 같은 겁니까?”
“그런 건 아냐. 영이 없어도 멀쩡히 살긴 살거든. 그냥 순간의 본능만을 따라서 살게 되니까 딱히 눈에 띌 일이 없어서 그렇지. 삶의 목표 같은 것도 없고, 하루하루 무난하게 사는 사람들 중에 이런 경우가 많더라고. 가끔 범죄 쪽으로 빠지기도 하는데 그리 흔하지는 않아.”
“우리 입장에서는 별로 관리할 필요가 없는 케이스군요.”
“노우 노우, 그건 틀렸어. 얘네들 중 일부는 다른 부서로 넘어가서 오히려 특별 관리를 받거든. 걔네가 무슨 일 하는 애들 인지도 모르겠고, 무슨 목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우리 쪽에 남게 되는 개체들은 따로 쓸모가 있지.”
“뭔데요?”
“그건 세 번째 케이스랑은 연관이 있으니 같이 설명해주마. 사실 여기가 제일 중요한 부분인데, 영이 빠져나간 뒤에 또 다른 인격을 부여하는 절차가 있다. 정해진 수명을 채우지 못한 영들을 마저 살게 해주는 거지.”
“흠, 그래요?”
지홍도 몰랐던 이야기다. 지금까지 그가 인도를 맡아왔던 영들은 모두 정해진 수명을 마치고 돌아갔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이쪽 세계는 근원계에 비해 문명 발달이 빨랐지. 어쩌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모든 사건사고를 우리가 통제할 수는 없게 되더라고. 예상치 못하게 비명횡사하는 영들도 꽤 많아지고. 근데 그걸 전부 복귀시킨 다음 다시 배정 절차를 밟자니 너무 비효율적인 거야.”
“그래서 일종의 편법을 마련했다 이거군요.”
“그렇지. 넌 이쪽에 꽤 오래 있었으니 보궐 선거 같은 걸 생각하면 그럭저럭 이해가 될 거다. 대순환 관리 부서 주관 하에 수명을 못 채운 영들을 재배정하는 거지. 절차는 약식으로 처리하고, 대상은… 앞서 말한 첫 번째 케이스에서 급사하지 않은 개체들과 방금 말한 두 번째 케이스 중 우리 쪽에 잔류한 개체들. 이해되냐?”
“네, 딱히 어렵진 않네요. 그럼 뭐… 그대로 계속 관리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필요하면 담당 인도자만 바꾸면 될 테고.”
“그렇지. 이론상으로는 그런데… 역시 문제가 있더라고. 보궐 배정이 안 된 개체에서 다른 인격이 감지되는 일이 생긴 거야. 처음에는 굉장히 드물게 나타나는 현상이라 그냥 서류 처리만 하고 무시했거든? 근데 어느 순간부터 부쩍 많아지더라. 특히 최근엔 더 많아졌고. 이쯤 되면 짚이는 게 있지? 뭘 거 같냐?”
“……돌연변이네요.”
“빙고. 지금까지 거의 다 그랬어. 돌연변이가 아니었던 건 어쩌다 한둘 정도? 비율이 역전된 셈이랄까.”
“뭐 그런 일이…… 원인은 밝혀졌어요?”
“100%는 아니고, 그중에 몇몇이 ‘잠복’이었던 걸로 밝혀진 사례가 있지.”
“잠복?”
“전염병 같은 거 보면 잠복기라는 개념이 있잖냐. 그거랑 비슷해서 그렇게 불러. 영이 배정된 초기부터 각성 전까지의 기간 동안 돌연변이의 영향을 받았다는 거지. 그동안 성공적으로 관리한 경험이 있으니 오류가 발생할 시 원칙은 알고 있겠지?”
“생 정지, 영 임의 복귀, 모든 절차는 선 조치 후 보고로 처리. 단, 프로젝트 대상자일 경우 우선 보류. 유사시 선 보고 후 조치로 변경 적용.”
“역시, 똑소리 나는구먼. 아무튼, 각성 과정 또는 그 이후에 오류가 발견되면 우리로서는 영을 회수하는 게 당연해. 회수할 때 감염된 돌연변이는 같이 딸려 나오는 게 일반적이고, 그럼 우리가 제거하고 돌려보내면 되는데… 가끔, 그게 안 되는 경우가 있다.”
“안 되는 경우?”
“기생하고 있던 돌연변이가 남아서 껍데기를 차지해버리는 거지.”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가능하고 자시고가 중요하냐. 실제 벌어진 일인데. 지금으로서는 잠복기 동안 본래 영보다 몸의 주도권을 빨리, 더 많이 확보했기 때문인 걸로 분석할 뿐이야.”
“아… 뭐 이렇게 변수가 많아요? 점점 머리 아파지네.”
“그 잘 돌아가는 머리도 아플 정도인데 나는 어떻겠냐? 하루하루가 죽을 맛이다, 아주. 그러니 제발 말 좀 고분고분하게 들어라. 네놈이 자꾸 기어오르고 신경 긁어주지 않아도 충분히 골치 아프니까.”
지홍은 이야기가 점점 예상 가능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느낀다. 프로젝트 대상자라던 휘영이 순식간에 돌연변이 감염체로 강하게 의심받고 있는 상황. 물론 서류 상으로 나타난 각종 오류의 내용과 발생 빈도를 보면 위에서 그런 판단을 내린 것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서류와 현실에는 언제나 괴리가 있게 마련이니까.
게다가 돌연변이 문제로 안팎이 시끄러운 나날이 이어지다 보니 실무팀장의 사전 체크에도 한계가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백현이 본래 일처리를 느슨하게 하는 편이라 으레 그랬겠거니 생각했었는데,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는 것. 날카롭게 일어섰던 반감이 조금은 누그러지는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백현의 의견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감염 여부를 미리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까?”
“글쎄. 새벽뫼라면 뭔가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제거할 방법이 없는 이상 미리 아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 우리로서 최선은 발견된 직후 최대한 빨리 손을 쓰는 거지. 감염된 영을 그대로 방치하다가 정해진 수명을 채우고 복귀하게 되면… 오메, 상상도 하기 싫다 진짜.”
백현이 기나긴 이야기를 시작한 건 처음부터 지홍을 설득하기 위한 포석. 그걸 알고 있었기에 지홍은 이야기를 듣는 내내 자신만의 대응논리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제 그림은 거의 완성됐다. 여전히 빈 조각이 몇 개 있긴 하지만, 전체를 이해하는 데는 지장이 없다. 호흡을 가다듬고, 지홍은 화두를 꺼낸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래, 생각은 좀 바뀌었냐?”
“안타깝지만 아니네요.”
“……휴우.”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단호한 대답. 백현은 한숨을 푹 내쉰다. 할 말 있으면 어디 해보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어차피 강압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으니까.
“팀장으로서의 형님 입장도 잘 알았고, 해주신 이야기도 논리적으로 틀린 건 없습니다. 전화로 지시하실 때는 영들 개개인을 무슨 소모품처럼 취급하는 듯해서 엄청 화가 났는데, 그것도 의도한 게 아니었단 걸 알았고요. 하지만 저는 아직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은휘영 씨는 프로젝트 대상자고, 그것만으로도 원칙에서 예외 처리를 적용받을 자격은 충분하죠. 아직 시간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그래, 프로젝트 대상자는 어느 정도 오류가 생겨도 감수하도록 돼 있지. 그만큼 더 꼼꼼하게 관리하려는 의도에서 인도자 한 명을 전담으로 붙이는 거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 리스크가 너무 커졌다는 생각, 안 해봤냐?”
“……”
“아까도 말했다시피, 지금 회수를 진행한다 해도 돌연변이가 같이 따라 나온다는 보장은 없어. 시간을 더 지체하면 주도권을 뺏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 리스크를 예측했으면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너나 나나 가중처벌을 받아도 이상할 게 없어.”
“하지만…”
“아직 돌연변이 감염이 확정된 건 아니지 않냐고 반박할 수 있겠지. 백 번 양보해서 아니라고 치자. 단순히 이상현상일 뿐인데 어쩌다 우연이 겹쳐서 그럴 수도 있다고 쳐. 하지만 그걸 어떻게 증명할 거지? 단순히 시간 투자해서 노력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거, 지난번에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나? 너 스스로도 느끼고 있을 거고.”
“윽……”
틀린 말이 없다. 백현은 리스크를 최소화하자는 논리를 펴고 있고, 그에 따른 근거도 충분히 가지고 있다. 반면 지홍은 누가 봐도 억지를 부리는 모양새다. 본인은 나름의 확신이 있다지만, 객관적으로 보기에는 그냥 개인적인 ‘감’ 일뿐이다. 지홍이 흔들리는 듯한 기색을 보이자 백현은 다시 말을 잇는다. 쐐기를 박을 타이밍이다.
“잘 생각해. 프로젝트 대상자는 여러 생을 거치는 존재라 누적되는 기억량 자체가 엄청나. 그 말은, 그들이 돌연변이의 영향을 받았을 때 발생하는 문제 역시 더 클 수밖에 없다는 거야. 비율은 같더라도 전체 파이가 크면 실제 값도 커지게 마련이니까.”
“……”
“나라고 안타깝지 않은 건 아니다. 멀쩡히 잘 살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것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논리로 죽어야만 하는 존재의 입장도 모르는 게 아냐. 다만, 보다 큰 그림을 보자는 거다. 넌 근원계 소속이잖냐. 네 입장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해.”
대꾸할 말이 없다. 휘영 개인의 입장을 생각해본 적 있냐는, 그나마 몇 안 되던 공격 수단도 사전에 차단돼 버린다. 툴툴거리긴 하지만 매 순간 진실되게 자신을 대하던 휘영의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문득 후회라는 감정이 밀려든다. 병원에서의 그 날, 자신이 의심을 품지 않았더라면 달라졌을까? 의심은 했을지언정 백현에게 자문을 구하지 않고 혼자서 방법을 찾아봤다면 달라졌을까? 자신이 택하지 않았던 갈림길 하나하나가 다시 떠올라 집요하게 지홍을 괴롭힌다. 그 한복판에서, 지홍은 최후의 협상카드를 생각해낸다.
“그럼, 이건 어떨까요?”
“음?”
“지금 저랑 같이 가시죠. 가서 형님이 직접 확인하세요. 가까이 가서 보시든, 멀리서 지켜만 보시든 그건 알아서 하시고요.”
“…나름의 타협안이라 이건가?”
“그렇죠. 실무에서 손을 뗐다고는 해도 저보다 경험도 훨씬 많고, 돌연변이를 상대해보신 적도 많을 테니 달라도 뭔가 다르지 않겠습니까? 마침 여기까지 직접 오셨으니 딱이네요.”
“흠하하하, 이제야 말이 좀 통하는구나. 게다가 이 몸의 위대함도 알아주는 것 같고.”
아부하는 뉘앙스를 섞어 몇 마디를 털자 바로 효과가 나타난다. 자신이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인지, 백현은 대번에 우쭐해진다. 이 정도 아량을 베풀어주겠다는 듯, 그는 순순히 지홍의 제안에 동의했다.
“좋아. 어차피 널 설득하든지 두들겨 패서 반쯤 죽여놓든지 둘 중 하나는 했어야 하니까.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어서 다행이구만. 네놈 쥐어패는 건 영 내키지 않았거든.”
“그나저나 형님. 그냥 육체파인 줄로만 알았는데 의외로 역사 지식이 풍부하십니다?”
“이 자식이…… 팀장을 뭘로 보는 거야? 다~ 자리에 맞는 교육을 받고 시험도 보고 해서 뽑는 거거든. 운 좋아서 됐다고 하니까 진짜 운빨이라고만 생각한 거냐?”
“솔직히 일처리 대충대충 하시는 거 보면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죠.”
“아오, 이래서 티 안 내고 일하면 나만 손해라니까. 앞으론 생색 좀 팍팍 내야겠어.”
문득 지홍은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다. 졸지에 거물급 혹을 달고 가게 됐지만, 어쨌거나 의도했던 방향으로 결과를 만드는 데는 성공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시간이 많이 지체됐네요. 피곤하시겠지만 내친김에 바로 처리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래, 그러지 뭐. 이 정도쯤이야 피곤한 거 축에도 못 끼지.”
“일 끝나면 가시기 전에 제 가게에서 좋은 술 대접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짜샤. 가보자고.”
몸을 돌려 골목길 밖으로 걸어나가는 백현을 보며 지홍은 피식 웃음을 흘린다.
“힘 약해진 거 알고 있다는 티를 그렇게 냈는데…… 여전히 눈치는 꽝이시군. 어차피 싸울 생각 같은 건 없었으니 상관없으려나.”
여기저기 밥벌이 쪽 탈출구를 찾느라 한 주를 건너뛰었습니다. 역시 쉬운 게 없네요. 비정기 연재라고는 하지만 가급적 일주일에 한 편씩은 올리려고 했는데 말이죠.
요즘은 심심할 때 후기에 쓸 내용을 적어보고 있습니다. 아직 결말까지는 전개 분량이 꽤 남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무지하게 많을 것 같아서 말이죠. 가능하면 폼나게 그림을 곁들이고 싶은데, 연습삼아 그려보는 일러스트 꼬라지(?)를 보면 아무래도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하하하;;;
전체 연재작은 매거진 : 자칭 B급 판타지 소설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