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읏차~!”
집 뒤편 담을 가볍게 뛰어넘은 뒤, 휘영은 손을 툭툭 털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진우의 위치는 대문 바로 앞, 살짝 왼쪽. 아마 밤새 대문 근처를 주구장창 배회하고 있으리라.
“에휴… 대문만 딱 지키고 있으면 될 줄 알았니.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내가 미안해질 정도네. 아무리 내가 하루종일 멍한 모습으로 있었다지만 이 정도는 예상할 줄 알았는데 말이지… 미안하지만 심란한 건 심란한 거고, 머리 돌아가는 건 별개거든.”
저녁 퇴근길, 영태의 지시라며 진우가 따라올 때부터 이럴 거라는 걸 예상했었다. 진우를 달고(?) 집까지 오는 내내 휘영의 머릿속에는 몇 시 즈음에 어떤 경로를 통해 빠져나갈 것인가 하는 주제로 여러 가설을 세우고 있었다. 영태가 예상했던대로 오늘밤을 틈타 먼저 현장으로 출발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휘영의 집 뒤편 담장 너머로는 야트막한 야산이 자리하고 있다. 지형상 사람이 다니기에는 그리 친절하지 못한 구조. 하지만 옷과 신발이 더럽혀지는 것만 견딘다면 물리적으로 지나가지 못할 곳은 아니었기에, 휘영은 처음부터 이쪽을 유력한 경로로 생각해두고 있었다.
사실, 우려는 했었다. 일전에 할머니의 초대로 팀원 전부가 집에 와본 적이 있었다. 특별히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사람은 없었지만, 눈대중으로 대충 훑어만 봐도 이 정도 지리는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까치발을 들고 마당으로 나와 주위 동향을 살필 때도 행동 하나하나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진우는 대놓고 위치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도 보란듯이 대문 앞에 떡하니 서서. 긴장은 커녕 감시하러 온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안일한 모습. 아니면 속임수일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따금씩 담장을 따라 순찰하듯 움직이는 진우의 모습을 보고 이내 답을 얻었다.
“지켜보고 있겠다는 걸 대놓고 알려주는 거지. 처음이야 잠복 형식으로 하려고 했을지 모르지만… 어디 그런 게 나한테 통할 쏘냐.”
사실 휘영의 판단은 어느 정도 맞았다. 원래 진우는 잠복근무 형태로 지켜볼 생각이었고, 실제 영태에게도 그렇게 보고했었다. 하지만 어둠이 깔리기 직전, 시야가 좁아지는 정도를 파악한 뒤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쪽으로 판단을 바꿨다. 평소처럼 둘이서 한 조로 근무하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한 곳에 붙박이로 숨는 방식으로는 지켜볼 수 있는 범위가 너무 한정적이었기 때문.
“어찌됐든… 나로서는 운이 좋았던 거네. 방에 불을 켜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한 건 너무 고차원적인 문제였나. 하다못해 동선까지 저렇게 단순해서야… 아직 갈 길이 멀어. 쯧쯧.”
휘영은 언덕을 오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능선을 따라 몇 분 정도만 가면 걷기에 편한 산책로가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시간이 좀 더 지체된다. 이미 옷은 지저분해졌고, 이왕 일을 저지른 거 구태여 시간을 더 끌 필요는 없다. 재수없으면 괜히 돌아서 가려다가 눈에 띌 우려도 있었고.
흙더미가 부서지는 가파른 언덕. 풀더미를 움켜쥐고 베어진 나무 등걸 따위를 짚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오래지 않아 경사도가 완만해진다. 거의 다 올랐다는 신호. 지지대 없이도 서있을 수 있을 정도가 되자 슬쩍 뒤를 돌아본다.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집 마당. 감회가 새로웠다. 부랑자 같은 꼴이 되긴 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쉬웠다. 콧노래를 흥얼거릴 뻔하려던 걸 간신히 참아낸다.
휘영에게서 마지막 가족이었던 할머니를 빼앗아간 놈. 그러면서도 흔적 하나 남기지 않았던 놈. 어느날 밤, 떠올리기도 싫은 수모를 안겨줬던 놈. 구치소 면회실 벽 너머, 이해할 수 없는 소리만 지껄이던 놈.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해봐도 정체가 뭔지 알아내기는커녕 이렇다 할 실마리조차 찾아낼 수 없었던 놈.
그러다가 우연처럼 찾아온, ‘근원계’라는 곳의 인간들을 통해 단서를 잡았다.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비이성적인 이야기들과 알고 보니 그게 자신의 이야기였다는 공상과학 영화 같은 현실. 혼란을 넘어선 또다른 혼란이 계속되던 와중에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아니, 솔직히 지금도 균형을 잡은 게 맞는 건지 확신할 수 없다. 중요한 건, 이제 답이 가까이 있다는 것. 그 빌어먹을 놈을 직접 대면할 수 있게 됐다는 것.
‘딱 하루’도 길었다. 오늘 밤만 지나면, 아니 이미 새벽이니 곧 해만 뜨고 나면 공식적으로 현장에 갈 수 있다지만, 그 하루조차 휘영에게는 너무 길었다. 조급함에 마음을 빼앗겨 있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걸 인정해버린 뒤에도,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었다. 잠깐이라도 멈추면 모든 게 다시 저만치 멀어져버릴 것만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현우에게서 들었던 도주 가능성이, 그녀가 듣기엔 이미 현실로 다가온 것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잡은 실마리인데… 그동안 저지른 각종 삽질들을 생각해서라도 절대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한시라도 서두르고 싶었다. 그래서 가기로 했다. 모두가 잠든 이 시간이 끝나고 나면, 놈은 이미 자신의 시야 안에 있을 것이다.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
“휴우~ 뭔 놈의 생각이 이리 많지… 가야지, 얼른. 이러는 사이에 도망가면 어떡해.”
“그러게요. 그러고 있을 사이에 얼른 가시지 그랬어요.”
“……!?”
등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 깜짝 놀랐다. 보통 경찰이라는 게, 특히 강력팀 형사라는 게 놀랄 일이 그리 많지 않은 사람들이다. 일단 죄짓고 살 일이 없으니 제 발 저릴 것이 없다. 가끔 삐딱선을 타는 사례도 없진 않지만… 세상에 잡아처넣어야 할 불순분자들이 워낙 많다보니 어지간해서는 나쁜 짓 꾸밀 시간조차 나지 않는다.
게다가 일을 하다보면 웬만한 사람은 까무러치고도 남을 장면들을 수도없이 본다. 그렇게 수 년의 경력을 쌓다 보면, 인간의 담력 한계가 대체 어디까지인지 새삼 놀랄 때도 있다.
휘영 역시 마찬가지다. 본의 아니게 어릴 적 슬프고 끔찍한 경험을 했었고, 경찰대 시절부터 현직 임관 후에도 온갖 더러운 꼴을 많이 겪어봤다. 다른 건 몰라도 담력 하나는 오만하다 싶을 정도로 자부하던 그녀다. 거짓말 좀 보태서 어지간한 불량배나 치한 같은 건 손가락 까딱하고도 이길 수 있다고 자신했었고, 실제로 그 대담성을 입증한 적도 꽤 있었다. 그 만만치 않은 경험과 이력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정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오 형사, 너… 너… 왜 여기…”
“음? 글쎄요. ‘왜’ 라기보다는 언제부터 있었냐고 물으시는 게 더 합리적인 질문이 아닐까요. 그건 그렇고, 은 경위님은 왜 여기 계시죠?”
“……”
“솔직히 너무 쉽다고 생각하셨잖아요. 그쵸? 설마 이 정도도 예상 못했겠습니까? 절 너무 호구로 보시는 거 아니에요? 와, 이거 좀 섭섭한데. 파트너로 호흡 맞춰본 게 몇 번인데.”
“……”
젠장, 망했다. 빌어먹을. 그냥 뒤돌아볼 것 없이 뛰었어야 했다. 혹시 진우 녀석이 낌새를 채고 와있던 거였어도, 그대로 큰길까지만 나갔다면 어떻게든 됐을 텐데. 멍청하게도 감상에 한껏 빠져서는…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이놈의 새벽 센티멘탈은 정말 도움이 안 될 때가 많다.
“무슨 생각 하시는지 대충 알 거 같은데. 아마 안 됐을 거예요. 꽤 한참 전부터 여기 있었거든요. 심심해 죽는 줄 알았네. 덕분에 낑낑대고 언덕 올라오시는 거, 재밌게 봤습니다.”
“다 봤다고…? 어떻게…? 설마…?”
“그러게, 집앞을 서성거리는 게 누구였는지는 정확히 파악하셨어야죠. 체형만 비슷하다고 어림짐작하시면 됩니까? 쯧쯧, 저한테 한 수 다시 배우시는 게 좋겠는데요.”
“…칫…”
고개를 푹 숙였다. 한 마디도 대꾸할 수가 없다. 맞는 말이다. 실제 용의자들이 쓰는 뻔한 수법이고, 그만큼 많이 간파했던 방법이다. 그걸 알면서도 치밀하게 확인하지 않았다. 방심하고 있었던 건 오히려 휘영 쪽이었던 거다. 한껏 상해버린 자존심이 가슴부터 목 언저리까지를 꽉 죄어들었다. 한 마디 말도 내보내지 않겠다며 오기를 부린다.
“은 경위님. 왜 그렇게 서두르는 건데요? 이유나 좀 들어봅시다. 이제 몇 시간 남지도 않았잖습니까. 네?”
“……”
“……에휴…… 그래 뭐… 1분이 1시간 같을 때. 1분 1초가 아까울 때. 그럴 때도 있긴 하죠. 전 직접 겪어보진 않았지만 들어본 적은 많거든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 뭐 그렇게 말씀하시면 뭐… 할 말은 없네요.”
“……”
“……가세요.”
“……뭐?”
“가시라구요.”
“…무슨 꿍꿍이야, 이건?”
“꿍꿍이는 무슨… 제가 어디 그런 거 키울 놈입니까? 말 그대로 몇 시간 남지도 않은 거, 이제 와서 억지로 잡아놓는다고 뭐 달라질 것도 없는데.”
“……괜찮겠어?”
“와, 이거 봐. 이거 봐. 꿀먹은 벙어리처럼 입 닫고 있다가 가시라고 하니까 바로 덥석. 너무 하시는 거 아닙니까?”
“……”
“까짓 거. 몸으로 때우면 되죠. 제가 덜렁거리고 다니는 게 하루이틀 일도 아니고, 잠깐 화장실 갔다온 사이에 놓쳤다고 둘러대면 몇 대 맞고 말겠죠, 뭐. 솔직히 죽을 죄 지은 것도 아닌데.”
“…진짜 간다?”
“그럼 가짜로 가는 척 하실 겁니까? …대신에… 진짜 죽을 죄 지은 놈으로 만들지만 마세요.”
“그건 무슨 뜻이야?”
“가서 지켜보기만 하라는 겁니다. 아무 것도 하지 말고. 몇 시간 뒤면 출동할 건데 이렇게 서두르는 이유, 그냥 시야 안에 잡아두고 싶으신 거잖아요?”
“그렇…지.”
“금방 뒤따라갈 거니까,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숨어서 기다리고 계세요. 그 정도는 협조해주실 수 있죠? 협조 안 하시면 그냥 이대로 연행하고요.”
휘영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진우는 못 믿겠다는 눈초리로 잠시 보고 있더니,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던졌다. 얼떨결에 받아든다. 차 키다. 의아해하는 휘영을 향해 진우는 겸연쩍게 말한다.
“에이… 그냥 그런갑다 하고 가시지 뭘 또 궁금해하고 그러십니까. 거기까지 뛰어가실 생각은 아니잖아요? …사실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어요. 타고 가시라고 미리 준비해놓은 거고요.”
“……”
“혹시라도 나중에 팀장님이 어떻게 빠져나갔냐고 추궁하시거든 묵비권이나 행사해주세요. 어차피 저도 빌려온 차니까 들킬 걱정은 안 하셔도 되고… 무엇보다 저도 어떤 핑계 대고 처맞을지 모르니까 진술은 엇갈리지 않아야죠. 음… 어차피 범법행위 하는 건 아니니까 상관 없으려나? 에이, 모르겠다.”
“…고마워, 오 형사.”
씨익 웃어보이는 진우를 뒤로 하고 휘영은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빠르게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보며 진우는 한숨을 내쉰다.
“하여간에… 정없어 보이게 말이야. 근무 시간도 아닌데 이럴 때는 그냥 이름으로 불러주시면 좀 좋아? 하~ 그건 그렇고 난 이제 어쩐다? 무슨 핑계를 대야 한 대라도 덜 맞으려나……”
팔짱을 끼고 휘영이 사라져간 방향을 한참동안 쳐다보고 있던 그는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다. 아직 이른 새벽. 문득 저질러놓은 일이 꽤 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시 신경이 쓰였지만, 이내 그보다 더 큰 고민거리가 있음을 떠올린다.
“…시간이 생각보다 너무 많이 남았네. 하여간에 뭐 하나 꽂히면 완전 부지런하시다니까. 이제 어디서 뭘 하면서 때운다?”
“응? 진우야, 뭐라고? 다시 한 번만 말해볼래?”
“…그게… 저… 화장실 갔다온 사이에……”
“하…하하…하하하… 화장실? 최 형사야~ 얘 지금 뭐라고 씨부리는 거니?”
“……”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푹 숙이는 진우를 보자 영태는 그저 웃음만 나온다. 곁에 있던 최재한 형사도 황당함에 할 말을 찾지 못한다. 재한은 순경으로 시작해 경장 진급 직전부터 강력팀에서 뛰었던 베테랑 형사다. 경사 계급까지 올라오는 험난한 세월동안 겪을 수 있는 돌발상황은 빠짐없이 겪어봤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세상이란 놈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팀장님, 일단 진정하시고…”
“진정? 그래, 진정해야지. 근데 그게 마음처럼 잘 안 되네? 아오, 진짜 이걸 그냥 콱!”
“에이, 팀장님.”
옆에 있던 결재서류철을 머리 위로 쳐드는 영태를 재한이 말린다.
“하아… 내가 정말 너무, 너~어무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힌다. 자기가 다 알아서 할 것처럼 적극적으로 나서더니, 뭐가 어째요? 화장실 간 사이에? 화장시~일? 전입 1일차 순경도 그런 짓은 안 하겠다. 응? 차라리 곱게 몸 사려서 집에 가야되는 의경이었으면 내가 말도 안 하지.”
“……”
“사내 자식이 그냥 어디 담벼락에 숨어서 해결하면 될 걸 무슨 놈의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 오밤중에 구석진 동네에서 화장실을 찾아? 왜, 아주 불 꺼진 동네 식당 문 두드리면서 ‘저기요~ 죄송한데 화장실 좀~’ 이러고 다니지.”
“…그게, 큰 거라서…”
“…큰 거…… 그래, 됐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너 하나 잡아족친다고 이미 간 애가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됐으니까 전화나 해봐. 아마 꺼놨거나 안 받겠지만.”
진우는 다행히 한 대도 안 맞았다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욕도 이 정도면 욕 축에도 못 낀다. 잔뜩 움츠린 척하며 휴대폰을 꺼내 휘영의 번호를 찾고 있는데, 먼저 전화가 걸려온다. 오, 이런 드라마틱한 타이밍이라니.
“…먼저 걸려왔는데요?”
“뭐? 먼저 전화가 와? …니들 혹시 짜고 치는 거 아냐?”
“에…에이, 무슨 말씀을.”
“수상한데…… 아무튼 이리 줘봐.”
시선을 피하는 진우의 모습을 의심스럽게 보던 영태는 전화기를 낚아챘다.
[오 형사?]
“네, 은 경위님. 오 형사 전화 받았습니다.”
[아, 팀장님이세요?]
“아, 팀장님이세요…? 하이고~ 아주 태평하십니다, 은휘영 경위님? 보고도 안 하고, 오밤중에, 그것도 단독으로 그 멀리까지 가시더니 이건 무슨 친절한 서비스 정신이십니까?”
[뭐…… 자수하는 거죠. 여기 와서 막상 해 뜨는 걸 보니 양심이 아프더라고요.]
“양심 같은 소리하고 있으세요. 아플 양심이 있었으면 그런 짓을 하지 마셨어야죠.”
[…진짜 죄송해요. 어쩔 수 없었어요.]
“늬예늬예~ 그러셨겠지요. 퍽이나 어쩔 수 없으셨겠지요. 그렇게 입 아프게 떠들며 어르고 달랠 때는 알아들은 척 가만~히 있더니, 아주 그냥 뒤통수 후려칠 스택을 모으고 계셨구만? 아주 깨소금 맛이시겠어요. 네? 무슨 말을 해도 귓등으로도 안 들으시는데 일개 미력한 팀장 따위가 뭘 어떻게 더 할까요. 그냥 마음대로 하시게 냅둬야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은휘영 경위님?”
[너무 그러지 마세요, 팀장님. 안 그래도 마음 무거워 죽겠는데.]
“마음 무거워 죽으라고 그러는 거거든? 하지 말라는 짓만 쏙쏙 골라서 한 세트 푸짐하게 맞춰놓은 주제에 마음이 가벼우면 쓰나. 왜, 그럼 뭐 내가 ‘그래, 네 맘 다 안다. 곧 따라갈테니 조금만 기다려~’ 이러면서 토닥여줄줄 알았냐? 그랬으면 아예 텐트 쳐놓고 휘파람 불고 있었겠네?”
[……죄송해요오……]
“……크흠, 흠. 그래도 전화 안 꺼놓은 건 잘했네. 늦었지만 어쨌든 연락은 했고. 청개구리 풀세트에서 하나쯤은 빼주마.”
[…헤헤.]
“칭찬 아니야. 웃지마.”
[헤헤헤.]
“웃지 말라고, 인마. 정드니까. 떽! …너, 지금 이 시간부터 아~무 짓도 하지 말고 거기 딱 기다리고 있어. 한 번만 더 사고치면 진짜 여자고 나발이고 궁뎅이를 확 걷어차버릴 테니까. 알겠어?”
[넵, 꼼짝 않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신경질적인 척 전화를 끊고는 던지듯이 진우에게 휴대폰을 건네준다. 큰소리를 잔뜩 쳐놓긴 했지만 이러나 저러나 진심일 리가 없다. 간곡한 설득을 외면하고, 지시를 어겼음에도 싫지 않은 이유를 영태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
어쩌면 그 역시 무의식 중에 휘영이 어떤 선택을 할지 이미 알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밖으로 드러난 모든 언행과 반대로 향하고 있던 그의 마음을, 휘영이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었다고 해석한다면 과도한 합리화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진다. 휴대폰을 받아들고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던 진우가 살짝 올라간 영태의 입꼬리를 보고 말았다.
“어, 팀장님. 웃으시는 거예요?”
“…웃긴, 내가 뭘, 임마.”
“아닌데. 지금 방금 입꼬리 씨익 올리고 계셨는데. 처음부터 화 나신 거 아니었죠? 그쵸?”
“스읍- 쓸데없는 소리… 아니, 근데 이 자식이 뭘 잘했다고 깐죽거려? 너 일루 와, 인마. 어디 오늘 한 번 뒤지게 맞아보자. 어?”
“으아악, 남녀차별 반대. 타도하라, 타도하라~”
진우는 소리를 지르며 경찰서 밖으로 달음질치고, 영태는 아까 들었던 결재서류철을 꼬나쥐고 그 뒤를 쫓는다. 그 모습을 보는 재한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젓는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참 매력적인 팀이라는 건 확실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시작이 좀 삐걱대는 모양새였지만, 어쨌거나 오늘 일정에는 별 차질이 없을 것 같다.
헐… 많이 늦는다, 늦는다 생각은 했는데. 설마 한 달이 넘었을 줄이야. 유구무언입니다. 구차한 변명은 접어두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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