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 분명히 여기 어디쯤일 텐데.”
지홍은 작은 동네길 어귀에 서서 좌우를 살폈다. 어슬렁어슬렁 뒤따르며 뒤통수를 흘겨보던 백현이 결국 보다못해 한 소리 뱉는다.
“너 한 번도 안 와봤냐? 담당한지 꽤 된 걸로 아는데?”
“그렇게 오래 되진 않았거든요? 휴가 기간 잘 쉬고 있는데 일방적으로 던져주신 거 기억 안 나십니까? 덕분에 기본 정보부터 수집하느라 만나본 것도 몇 번 안 된다고요. 집에 가본 적이 있긴 한데 그것도 거의 초반이라… 최근에 머리쓸 일이 많다보니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가물가물하더라고요. 누.구.덕.분.에.”
“그래, 아주 단물 쪽쪽 빠질 때까지 우려먹어라. 쯧쯧쯧… 그나저나 기술이 발달하니 다들 잔머리만 굴리기 바쁘지. 너같은 완벽주의자도 이런데 다른 애들이 어떨지는 정말 안 봐도 뻔하다 뻔해.”
“기술은 쓰라고 발달하는 겁니다. 전통 고집할 일이 따로 있지.”
“기술만 믿고 있으니 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거 아니냐. 나 때는 말이야. 담당 케이스가 아침에 집에서 나올 때부터 다시 들어갈 때까지 밀착 마크하는 게 당연한 거였어. 심플하고 확실하잖아?”
“지금 하신 그런 말투들을 싸잡아서 요즘 이 동네에서는 ‘꼰대’라고 하죠. 따라해보실래요? 꼰.대.”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감이 참… 그렇다?”
“당연하죠. 욕이니까요.”
“…에휴, 말을 말아야지, 내가.”
“아, 이쪽인 거 같네요.”
잠시 두리번대며 기억을 되짚던 지홍은 이내 제대로 된 방향을 찾았는지 자신 있게 앞장선다. 백현은 툴툴거리면서도 그 뒤를 따랐다.
“근데 있잖아. 전화는 왜 안 쓰냐? 그냥 주소 물어보고 지도에 찍어서 가면 이렇게 헤맬 필요도 없잖아? 아니면 애초에 어디다 메모를 해놓든가.”
“마지막으로 통화한 게 얼마 되지도 않았고 어느 분 덕분에 시간도 많이 늦었잖습니까? 벌써 새벽이 한창인데 민폐입니다. 그리고 뭐, 헤매면 얼마나 헤맸다고 엄살이십니까? 체력도 짱짱하신 분이.”
“한 마디를 안 져요, 한 마디를.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여기까지 왔을까…”
“그래도 다행인 줄 아세요. 전화 안 하고도 어디 있을지 뻔할 정도로 생활패턴이 단순하거든요. 집 아니면 경찰서에 있을 확률이 80% 이상. 그 외의 곳에 있더라도 어디서든 정보를 얻을 가능성이 99퍼센트거든요.”
“그 애매한 1퍼센트는 뭔데?”
“완벽이라는 건 함부로 장담할 수 없는 거니까요.”
“...빠져나갈 구멍 미리 뚫어놓는 건 아니고?”
“굳이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아, 이제 기억나네요. 저 집입니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걷다보니 어느새 휘영의 집 근처까지 왔다. 걸음을 재촉하는 지홍과 달리 백현은 갑자기 멈춰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쪽으로 가면… 형님? 왜 그러세요?”
“어? 아냐, 아무것도. 그냥 뭐랄까. 동네 분위기가 좀 낯익은 것 같아서.”
“실무 뛰던 시절에 와본 적 있는 거 아니에요? 꽤 오래 하셨고… 한 번 케이스를 맡으면 다음 케이스도 담당했던 구역에서 크게 멀지 않은 곳으로 주는 편이잖아요?”
“흠… 그런가? 뭐, 그럴 수도 있겠네. 그렇게 오래된 기억이 남아있을만큼 기억력이 좋은 건 아니지만… 예외라는 건 있으니까.”
“셀프 디스도 할 줄 아십니까? 그건 의외네요.”
사실 미묘하게 뭔가가 달랐지만, 본래 느낌이란 놈은 보통 그리 정교하지는 못하다. 게다가 백현처럼 감지계 능력이 발달하지 않은 타입에게는 더더욱. 백현 스스로도 그걸 잘 알고 있기에 미심쩍은 느낌을 그냥 슬쩍 넘긴 일도 많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그로 인해 문제가 생겼던 적은 없었다.
“역시, 예상대로 집에 있는 것 같군요. 기운이 느껴집니다. 이 솔직단순한 생활패턴 덕분에 일 하기는 참 수월한 편이라니까요.”
“...혹시나 물어보는 건데. 너 이 자식, 편하게 해먹을 수 있는 일감 뺏으려 한다고 반항해보는 건 아니지?”
“전 형님처럼 잔머리로 임기응변하는 타입이 아닙니다. 그냥 머리를 쓰면 훨씬 모양새 좋게 일을 처리할 수 있는데 굳이 이렇게 투박한 반항을 할 필요가 있습니까?”
“틀린 말은 아닌데 기분이 좀 나쁘다?”
“꿀밤 한 대쯤은 맞아드리겠습니다. 그 정도야 뭐.”
‘아오… 이 자식 힘 떨어진 걸 아는 게 분명해. 깐죽거리는 게 진짜… 휴우, 참자. 참아.’
대문은 잠겨 있었지만, 애초에 두 사람에게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집 뒤 야산 쪽으로 돌아 담을 훌쩍 뛰어넘었다. 땅에 닿는 발소리조차 유달리 크게 울리는 듯해 숨죽여 주위를 살핀 다음에야 살금살금 걸음을 옮긴다. 극도로 조심스러운 움직임에 답답함을 느낀 백현이 목소리를 낮춰 묻는다.
“야, 근데 불도 꺼져있구만 이렇게 도둑놈처럼 움직일 필요가 있나?”
“여기 현직 경찰 집이거든요? 들키면 빼박 현행범입니다.”
“얼굴 알잖아. 근데 뭐가 문제야?”
“이 어둠에 예고없이 찾아온 누군가가 아는 사람일 거라 생각하기보다는 일단 후려치고 보는 게 빠르지 않을까요. 제가 멱살 한 번 잡혀봤는데 힘이 보통이 아닙디다. 지금은 더 늘었을지도 모르고요. 게다가… 제가 좀 쿨하잖습니까? 애초에 제가 그리 전폭적인 신뢰를 얻고 있는 건 아니라서요.”
“그거, 보통은 싸가지가 남다르다고 하지 않나?”
“……형님한테 말로 한 방 먹으니 기분이 색다르군요.”
“헹, 쌤통이다.”
“뭐… 굳이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게다가 제 신뢰 문제는 둘째 치고 여기, 낯선 얼굴 하나 껴 계시잖습니까? 그것도 언제든 적으로 돌아설 수 있는.”
“거 참, 도와준다고 했는데도 불만이냐? 아까도 말한 거지만 이놈 자식은 당최 말을 믿지를 않아.”
“모든 걸 의심하면서 하니까 일처리를 잘하는 겁니다.”
“에휴, 그래. 너님 참~ 잘 나셨습니다.”
잔뜩 낮춘 목소리로도 티격태격을 이어가며 앞마당 쪽으로 돌아나온다. 지은지 오래된 옛날식 집은 탁 트인 마루가 미닫이 문으로만 닫혀있는 구조였다. 가까이 다가가던 두 사람은 동시에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야, 아무래도 이상한데? 집에 없는 거 아냐?”
“흠, 아까 뒤쪽 담장에서 감지할 때보다 오히려 기운이 약하네요. 아직 퇴근을 안 한 걸 수도 있고… 아니면…….”
“좀 있으면 아침인데 퇴근을 안 했다고? 이야, 이쪽 세계 경찰이라는 거 진짜 극한직업이구만? 낮달 애들도 이 정도까지는 아닐 텐데. 그나저나 왜 말을 하다 말아?”
“아, 잠복근무 같은 걸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난 또 뭐라고… 결국 야근이란 소리네, 뭐.”
문득 지홍은 마지막 휘영과 통화했던 내용을 떠올렸지만, 구태여 백현에게 말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한시적으로 협력하기로 합의했다지만, 바꿔말하면 언제 다시 적대적인 태도로 바뀔지 모른다는 뜻. 따라서 최소한의 패는 감춰둬야 한다.
“그나저나… 이상해.”
“뭐가요?”
“아까부터 느낀 그 익숙한 기분 말이야.”
“엥?”
“뭐랄까. 향기라고 해야 하나? 어… 난 너처럼 학구파가 아니라서 적확한 개념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만… 우리 근본을 이루는 영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결국 어떤 ‘요소’들이 모여있는 거거든.”
“네, 들어본 적 있습니다. 반대로 잘게 나눌 수도 있죠. 기억 편집이나 조작에서 쓰는 기초 이론이기도 하고요.”
“이쪽 세계에서 말하는 유전자? DNA? 암튼 그것도 같은 이론적 토대를 쓰지 아마?”
“대강 맞을 겁니다. 자세한 이론 내용은 자료를 비교해봐야겠지만요. 어쨌든, 그게 왜요?”
“어떤 영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구분하는데는 몇 가지 방법이 있거든. 나는 감각 계통 능력을 따로 배우거나 발전시키지 않아서 대충 감으로 때려맞추곤 하는데… 지금 이 공간에 퍼져있는 기운이 매우 익숙하게 느껴져. 마치 언젠가 접해봤던 것처럼.”
그리 명확하지 않은 설명이었지만, 지홍은 이해할 수 있었다. 과거 휘영이 처음 ‘깨어나던’ 때, 그녀의 눈에 붉은 아지랑이가 보이던 현상을 설명하고자 관련 자료를 찾아봤던 적이 있으니까. 백현의 설명도 결국 같은 맥락이었다. 단지 그것을 눈으로 느끼냐, 다른 감각으로 느끼냐의 차이일 뿐.
‘그러고 보니 아까 동네 분위기가 낯익은 것 같다고도 했었는데. 그것도 무슨 관련이 있는 건가? 아직은 모른 척 하고 있는 편이 좋겠군.’
지홍이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백현은 골똘히 잠겨있던 생각에서 벗어났다.
“아, 모르겠다. 너무 오래된 일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를 않네. 나중에 여유있을 때 천천히 고민해봐야겠어.”
“별 거 아닌 일일 수도 있잖습니까? 일단 지금 일에 집중하시죠.”
“그래야지. 자, 그럼 이제 어떡할 거냐?”
“뭐… 일단은 제일 상식적인 방법부터…….”
휴대폰을 꺼내 버튼을 누른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두어 번 신호가 간 뒤, 고요한 어둠 속 어딘가에서 진동음이 들려온다.
“…….”
“…….”
“그것 보십쇼. 미리 전화했어도 소용없었을 거구만.”
“그것 참 다행이구나, 빌어먹을 후배놈아.”
“직업이 직업이다보니 휴대폰을 따로 쓸 수도 있다는 것쯤은 예상했지만… 하나를 두고 다닐 수도 있다는 건 미처 예상하지 못했네요.”
“이제는 어떡하면 되냐?”
“별 수 있나요. 경찰서 쪽으로 가봐야겠죠. 거기 있다면 좋은 거고, 없어도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정보는 얻을 수 있을 테니.”
“그래? 그럼… 혹시 좀 쉬고 가면 안 될까? 나도 빨리 해결하고 돌아가면 좋은데, 경계 넘어올 때 체력이 왕창 날아갔는지 좀 힘들다. 이쪽 세계 몸뚱이를 써먹는 건 참 오랜만인데… 여전히 엄청 허약하단 말이지.”
동의를 구하는 말과 다르게 백현은 이미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친 기색이 완연한 모습. 경계를 넘어올 때의 체력 소모가 컸다? 그 자연스러운 임기응변에 지홍은 내심 감탄했다. 처음 조우했을 때부터 나눴던 이야기들, 각각의 상황에 대한 백현의 대처를 보면서 지홍은 그의 능력치 자체가 전체적으로 약화되어 있음을 거의 100% 확신할 수 있었다.
물론 백현이 일부러 힘이 약해진 척 속이려 할 경우의 수도 고려해봤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일부러 속임수를 쓸 이유는 없다. 본래의 그가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 그렇다면 오히려 무력을 앞세워 일을 원하는 방향으로 풀어가는 쪽이 훨씬 유리하다. 달리 저항할 방도는 없으니까. 게다가 그동안 지홍이 보아왔던 백현의 성격상, 얄팍하든 깊든 속임수를 쓸 위인은 아니다. 그럴 머리도 안 되고.
‘아마도… 어떤 규칙에 의해 이쪽 세계에서 운용할 수 있는 절대치 자체가 낮아졌다고 보는 게 가장 타당할 것 같군.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지. 고작 이 정도 활동한 걸로 피로감을 느낀다면 잠깐 휴식한다고 해도 그리 많이 회복할 수는 없을 거다. 그 말은… 최악의 상황이 오더라도 리스크는 그리 크지 않을 거라는 의미. 그렇다면 괜히 강행군을 종용해서 감정을 자극할 필요는 없겠지.’
잠깐 사이에 머리를 굴려 결론을 내린 지홍은 백현의 옆에 덩달아 주저앉았다.
“한두 시간 정도는 쉬다 가도 될 것 같네요. 어차피 조금 있으면 해가 뜰 테고… 운 좋으면 그 사이에 은 경위님이 퇴근해서 돌아오실 수도 있고요.”
“그래,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아~ 난 지금 아~무 생각이 없거든.”
마루 미닫이문에 머리를 기댄 백현은 눈을 감아버렸다. 자신의 상태를 지홍이 눈치챘을 거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지만……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떤 문제건 닥친 다음에야 본격적으로 해결 방법을 모색하는 게 그의 스타일이니까. 안 돌아가는 머리 기름칠까지 해가며 굴릴 바에야 잠깐이라도 자두자 싶어 상념을 몰아낸다. 혹시 누가 알까. 좀 자고 일어나면 힘의 한계치가 조금이라도 늘어나 있을지.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백현은 쪽잠을 청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어쩐지 자도 너무 잔다 했습니다.”
“그렇게 불만이면 좀 깨우지 그랬냐?”
“잠깐만 쉬자고 앉은 채로 잠들더니… 저도 잠깐 자고 일어났는데 추운 줄도 모르고 바닥에 대자로 뻗어 자드만요. 입 안 돌아간 걸 보면 그렇게 허약하기만 한 몸뚱이는 아닌가봅니다?”
“젠장. 진짜 마음에 안 들어!”
“제가 하고 싶은 말이거든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푹 쉬어버린 탓에 이미 해가 중천이다. 사람들의 이목이 많은 시간이라 이동속도를 높일 수도 없었다. 덕분에 둘은 거의 점심에 가까운 시간이 되어서야 경찰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안으로 들어서자 커피잔을 손에 든 정복 차림의 경찰 하나가 지나가다가 말을 걸어온다. 백현은 당황해서 뒤로 슬쩍 물러나고, 얼떨결에 지홍이 앞장선 모양새가 됐다.
“아… 그… 저… 혹시 은휘영 경위님이 이 곳에 근무하시는 게 맞습니까?”
“네, 저 안쪽에 있는 팀 소속이십니다. 지금은 안 계시는 것 같네요. 그런데 누구시죠?”
“친구입니다. 오랜만에 연락했는데 전화를 받지 않아서 말이죠. 예전에 여기서 근무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그러시군요. 음… 그러고 보니 다른 팀원분들도 안 계시는데. 이봐, 정 경감님 팀 오늘 무슨 일 있다고 했었나? 난 전혀 들은 게 없는데.”
“글쎄? 조금 전부터 꽤 분주하긴 했었는데, 아마 팀 전체가 어디 간다고 들은 것 같아. 자세한 내용은 나도 모르고.”
앉아있던 다른 누군가를 향해 묻자 곧장 대답이 돌아온다.
“그렇다고 하네요. 보통 행선지 정보가 없으면 팀 단위 작전일 때가 많은데, 아마 그거 같네요.”
“그…렇습니까. 네, 감사합니다.”
터덜터덜 밖으로 나온다. 아무런 소득도 없이. 멍~해진 표정의 지홍을 보며 백현이 닥달한다.
“야, 인마. 그냥 나오면 어떡해. 뭐라도 알아내야지.”
“그럼 뭐 어떡합니까? 멱살 잡고 아는대로 불라고 할까요?”
“신경질까지 부리네. 일단 같이 가서 직접 보고 판단하라길래 백 번 양보해서 따라와줬구만.”
“아, 생각 좀 하게 조용히 좀 하십쇼.”
백현이 툴툴거리거나 말거나 지홍은 생각에 잠긴다. 물론 그는 휘영의 팀이 투입됐다는 작전에 대해 들은 바가 있다. 마지막으로 했던 통화에서 그녀가 먼저 알려줬으니까. 문제는… 실용적인 정보는 하나도 없다는 것. 어디로 가는지,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 건지 등등.
‘돌연변이와 관련이 있어 보이는 건 분명한데… 내가 정보를 가져다줬던 그때 그 사고와 관련된 녀석인가? 아니면 지난번 병원에 입원하게 만든 그 녀석? 이거 좀 골치 아프게 흘러가는데……’
백현은 지홍이 자신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생각에 빠져버리자 무료함을 느낀다. 머리 쓰는 놈도 대책이 없는데 자신이라고 별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다.
“그러고 보니 여기에서도 어제 느꼈던 것과 비슷한 향기가 느껴지는군. 뭐…… 여기서 보내는 시간도 만만치 않게 많을 테니 당연한 거려나?”
옆에 있는 놈은 어차피 생각의 바다를 헤엄치고 있을 테니, 당장은 달리 할 게 없다. 백현은 계단에 걸터앉아 어제 스쳐갔던 익숙한 느낌을 다시 고민해보기 시작했다.
“이 익숙한 느낌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려. 아무래도 꽤 중요한 거였다는 촉이 드는 게…… 음?”
문득 백현의 눈이 외부 게시판에 붙어있던 현상수배 전단 속 어떤 얼굴에서 멈췄다. 처음 보는 게 분명한데,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얼굴. 순간, 오래 전 불천에게 불려갔던 날이 떠올랐다. 그 날 그는 무척 오래되어 거의 잊었던 이야기를 쥐어 짜냈었다. 그 과정에서 비교적 최근 기억으로 되새김됐던 어떤 사건.
“가만… 혹시… 그건가? 그래, 옛날 일 중에 그나마 기억에 남아있는 거라곤 그것 뿐이니…”
혼잣말을 중얼거린 다음 돌아보니 지홍은 여전히 뭔가를 생각 중이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이따금씩 툭툭 두드리는 걸 보니, 뭔가를 검색하거나 메모를 하는 듯하다. 저 정도라면… 잠시 다녀와도 문제는 없을 듯하다.
“야, 나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온다. 아오, 이놈의 몸뚱이는 들어간 것도 없는데 뭘 내보내려는 건지…….”
괜히 제 발이 저려 주절주절 사족을 붙인다. 대답도 없이 손을 휘휘 젓는 지홍. 완전히 자기 페이스에 빠져있다는 확신이 들자 백현은 화장실을 찾는 듯한 모양새로 잽싸게 건물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제법 으슥해보이는 곳을 찾아 수석팀장 염훈에게 연결되는 채널에 접속했다.
[백현 팀장? 무슨 일 있습니까?]
“불천님께 보고 드릴 내용이 생겼습니다.”
[그렇군요. 특별 지시가 있었으니 바로 연결해드리죠.]
잠시 뒤, 심드렁한 듯한 불천 특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냐. 좀 어때? 살만 해?]
“불천님. 사라진 영에 대한 단서를 찾은 것 같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에 돌파구가 하나 생겼겠다~ 내용 전개에 관해 생각하는 시간을 줄이는 중입니다. 설정 충돌만 없게 하려고 신경 쓰고 있는데, 그래도 장담하긴 어렵네요. 나중에 다시 한 번 정주행 하면서 점검하는 시간을 가져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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