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이 가볍다.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마음 속을 꽉 채우고 있던 짜증과 답답함이 조금씩 떨어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콧노래 흥얼거릴 정도로 편안한 건 아니었지만, 일이 복잡하게 꼬인 것에 비하면 기분의 무게는 그럭저럭 견딜만했다.
그러다 문득, 멈칫했다. 생명을 가지기라도 한 듯 스스로 한 조각, 한 조각씩을 뚝뚝 떼어 날려보내던 스트레스가 움직임을 뚝 멈췄다. 동시에 불천의 발걸음도 제자리에 멎었다. 뇌리 한복판에 남은 하나의 응어리. 이전까지와 달리 조각조각 떨어져나가기는커녕 꺼풀로도 벗겨지지 않는 우직한 덩어리다. 마치 과일 열매 한가운데 틀어박힌 단단한 씨앗처럼.
때문에, 불천은 다시 마음이 무거워짐을 느낀다. 날려보냈던… 아니, 그랬다고 생각했던 답답한 마음의 조각들이 되려 돌아와 달라붙는 듯한 기분. 뭘까. 왜일까. 분명히 하고 싶었던 말을 다 했고, 나름대로 뜻한 바도 관철시켰다. 오는 내내 가벼웠던 발걸음이 그걸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가시지 않는 이 답답함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제 오나?"
"어어, 다녀왔네."
끝내 생각의 결론을 붙잡지 못한 채로,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선다. 여전히 소파에 몸을 묻은 모습으로 늘어져 있던 해강현이 나른한 목소리로 맞이한다. 한쪽 눈만 가늘게 뜬 채 이리저리 시선을 움직이던 해강현은 마치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불쑥 말을 던졌다.
"……어째 기분이 썩 좋아보이지는 않는데."
"그렇게 보이나?"
"응. 굉장히."
"애매해. 웃어야 할지, 찡그려야 할지 모르겠거든."
"그게 무슨 소린가?"
"글쎄. 뭐랄까. 분명 홀가분하게 털어놓고 온 것 같은데…… 여전히 뭔가 찜찜한 기분이랄까."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를 굉장히 자연스럽게 하고 있군. 그 잠깐 사이에 노망이라도 든 겐가?"
"노망은 무슨… 그만큼 심경이 복잡하다는 뜻이지."
"왜, 일이 뭔가 뜻한대로 안 된 모양이지?"
해강현의 물음에 불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과연 뜻한대로 잘 풀린 걸까? 집무실로 오는 내내 그는 곧장 명부를 확인하러 갈 작정이었다. 그렇게 의사를 밝히고 나오기도 했고. 그럼에도 여인, 태황은 특별히 그를 더 말리지 않았다. 즉, 허락했거나 묵인하겠다는 의미.
마지막 허들을 넘었으니, 이제 근원계 질서를 벗어난 그 문제의 영체는 강제로 회수 절차를 밟게 될 것이다. 그 절차는 간단하다. 명부에 적힌 데이터를 찾아 손을 쓰기만 하면 시작되니까. 그 후에는… 특별히 문제될 일이 없다.
물론 기존에 없던 초유의 사례니만큼 정식 루트를 건너뛰고 데려올 인도자를 따로 배정해야 하는 문제가 남지만… 그건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에 비하면 문제 축에도 끼지 못한다. 여차하면 백현에게 직접 지시해서 데려오도록 하면 될 일이고. 팀장급의 권한에 불천의 특별 명령을 얹으면 그야말로 초고속 하이패스로 돌아올 수 있을 테니까.
그 다음은… 시간만 있으면 해결된다. 기존의 절차와 크게 다르지도 않다. 그간 파악하지 못했던 삶의 기록을 살펴보고, 당사자로부터 일의 자초지종을 세세하게 들어보는 단계. 그리고 그에 따른 공정한 판결과 걸맞는 처벌(혹은 상이 될 수도 있겠지만 불천이 생각하기에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을 내려야 하니까. 상당히 오랜 세월에 걸쳐 일어난 일이니만큼 시간이 꽤 걸리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큰 문제가 아니다. 비유하자면 병의 원인은 제거됐고, 회복을 기다리는 정도의 시간.
그래… 다 좋다. 순조롭다. 아주 깔끔하다. 그런데 왜? 어째서 기분이 이렇게도 가라앉은 채로 있는 걸까? 걸림돌이 될만한 일은 다 해결됐는데. 대체 왜?
“…모르겠어, 나도.”
“잘 된 거면 잘 된 거고, 안 된 거면 안 된 거지. 잘 모르겠는 건 또 뭔가? 평소의 자네답지 않게 이해가 안 되는 소리를 자꾸 하는군.”
“그러게 말이야. 참 이해가 안 되는 일이지.”
“처결할 수 있다, 없다. 둘 중 하나인 문제 아닌가? 그걸 확인하러 갔던 거고.”
“그랬지. 그랬는데……”
“태황께서 허락하셨으면 처결하면 될 일이고. 혹여 안 된다 하셨으면 쿨하게 포기하든지, 아니면 허락하실 때까지 기다리든지. 그것도 아니면 다시 설득하든지 하면 되고. 뭐가 문제인가?”
“……흐음…… 아!”
해강현의 계속 되는 질문에 어영부영 대꾸하던 불천이 갑자기 탄성을 질렀다. 떠올랐다. 돌아오는 내내 그를 괴롭혔던 찜찜함의 뿌리가 무엇이었는지.
“…깜짝이야… 뭔가? 갑자기.”
“알고 계셨던 거야. 태황께서는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계셨어. 내가 찾아가 인사를 올리자마자 대뜸 말씀하시더군. ‘그냥 놔두는 게 어떻겠냐’고. 용건도, 내 의견도 모두 이미 알고 계셨던 거네.”
“난 또 뭐라고… 태초부터 모든 걸 알고 계시는 분이 아닌가. 그게 이상한 일은 아닐 텐데?”
“그래, 이상한 일은 아니지. 원래대로라면 이상한 일이 아니야. 모든 일을 알고 계시는 분이니까. 이 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지만…!”
“흠… 가만…? ‘이 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그러고 보니…?”
“그래, 이번 일은 근원계 안에서 일어난 게 아닐세. 이쪽의 질서와 관련된 일이라 결과적으로는 영향을 받고 있다지만, 시작된 곳 자체는 외부야. 그것도 그 작자가 관련돼 있지. 정상적인 루트였다면, 태황께서 속속들이 알고 계시는 게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야. 그렇지 않나?”
“그렇군. 자네가 공식적으로 보고한 적이 없으니까……”
“…그렇다면 직접 알아보셨다는 이야기가 되겠지. 적어도 내가 모르는 또다른 정보원을 두고 계실 리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요즘 부쩍 잦은 편이었던 출타도… 설명이 되는군.”
“장담할 수는 없지만 가능성은 충분하지.”
해강현은 미간이 절로 찌푸려짐을 느꼈다. 이제는 근원계 최고 두뇌라 일컬어지는 그로서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제자인 지홍이 담당하고 있다는, 그래서 그에게 몇 번인가 조언을 구했던 영체. 실제로 만나본 적이 없으면서도 이상하게 자신의 일처럼 여겨져, 평소보다 열성적으로 도와주고 싶었던 기억도 난다. 아무튼… 대체 그 영체를 태황이 직접 신경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체 어디까지를 안배해두고 있었던 걸까?
답이 나오지 않는 자문 대신, 해강현은 가만히 오늘 하루를 되짚어본다. 별 생각없이 불천에게 용건이 있어 찾아왔고, 부재 중을 확인한 뒤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마주쳤다. 그리고 의외의 존재가 함께 있음을 발견했다.
이어 백현을 만나 또다른 이야기를 들었고, 그를 통해 제자가 맡고 있는 그 영체가 과거 자신이 그토록 애태워 찾아다녔던 ‘사라진 영’이라는 심증을 갖게 됐다. 그토록 오랫동안 추적해왔지만 이렇다 할 단서 하나 찾지 못했는데… 오늘 하루 사이에 너무 빠르게 수면 위로 드러났다. 마치, 누군가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것처럼.
‘아주 오래 전에 이미 만나본 적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결국 모두 내 손을 거쳐간 친구들이니… 그저 그것 뿐이라 생각했지. 하지만 이런 전개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부끄러운 일이군. 바로 코앞에서 버젓이 돌아다니는 걸 보고도 알아채지 못했다니. 가설에 불과하다고 해도 이젠… 허어… 대체 어디까지가 그 분의 뜻이었단 말인가.’
예상은커녕 막연한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소득. 태황을 알현하러 가는 불천을 보며, 그 결과가 어찌됐든 관계없이 심증을 확실하게 수면 위로 끌어내줄 마지막 쐐기돌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태황의 권한으로만 볼 수 있는 동결보관 자료를 열어보면 분명히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녀는 자료를 보여주는 대신 준비해뒀던 ‘제안’을 먼저 해왔다고 한다. 이건… 불천이 동결보관된 자료 열람을 요청할 거라는 것도, 왜 그렇게 하려는지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해강현은 조심스레 내린 결론을 한 번 정리한다. 그리고 묻는다. 아마… 불천도 같은 생각일 것이다.
“…그래서, 자네가 내린 결론은 뭔가?”
“‘사라진 영’ 자체가 처음부터 태황의 계획 안에 있었다는 것. 물론 모든 게 딱딱 들어맞지는 않았을지라도 말이지.”
“……”
역시…… 불천을 괴롭히던 답답함이 삽시간에 해강현에게로 전이됐다. 이제야 알 것 같다. 불천이 ‘앞뒤 안 맞는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의 기분. ‘그 분께서 그동안 우리 모두를 속여오셨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럴 분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지 않나? 아무리 자네라도 그건 엄연한 모독이고 권위에 대한 도전일세!’ ……와 같은 자연스러운 항변들이 반사적으로 떠오른다.
하지만 그뿐이다. 머릿속을 맴돌기만 할 뿐, 결코 입밖으로 튀어나오지는 않는다. 아니, 차마 그럴 수 없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의 지식으로도 불천의 말을 부정할 수 있는 다른 해석을 내놓을 수 없었으니까.
“그럼 이제 어떻게 할 텐가?”
“어떻게 하다니? 난 이미 내 할 일을 할 것이라 말씀드렸네. 그때 몰랐던 걸 이제 와 알게 됐다고 해서 입밖으로 낸 뜻을 바꿀 이유는 되지 않아.”
“그렇다면… 계획대로 명부에 손을 댈 심산이군?”
“그 수밖에 없지 않겠나? 지금으로서는. 내가 할 수 있는, 내가 해야 하는 일. 그리고 본래의 내 일이니 말일세.”
“……글쎄… 자네가 말한대로 태황께서 정말 그런 거라면… 과연 자네의 결정은 옳은 일인가?”
묵직한 물음. 불천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진다.
“이건 지금 옳고 말고를 판단할 문제가 아닐세. 태황께서도 인정하셨고.”
“흐음……”
“이 세상의 토대는 내가 닦았네. 공치사 따위를 하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나는 그럴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다 생각하네. 마땅히 그래야 할 책임도 있고.”
“글쎄… 자네, 과거 땅을 일구며 살던 때를 기억하나?”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꺼내는 건가?”
“자네는 말이야. 이 근원계라는 곳 전체를 그 시절 자네가 가꾸던 농장처럼 여기고 있는 듯하이. 세계의 존재들은 농작물처럼 생각하고.”
“그건 무슨 뜻이지?”
“자네는 늘 그랬지. 최고의 결실을 거두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왔어. 그럴만한 지식과 지혜가 있었고, 충분한 능력도 있었지. 필요하다면 주저하지 않고 손을 쓰는 과감함도, 아쉬움을 감추고 잘라내는 대담함도 갖추고 있었어. 하루가 멀다 하고 모든 걸 세심하게 신경쓰던 자네의 그 노력은 마땅히 박수 받을 일이야.”
“……”
“하지만 말일세. 어떤 것들은 과도한 보살핌이 독이 되기도 한다네. 자네도 겪어봤지 않나?”
“그래, 그런 것도 있었지.”
“때로는 손을 거치기도 하고, 때로는 저절로 자라고 시드는 작물과 식물이란 것들은 말일세. 세상의 순리라는 것에 가장 근접해 있는 존재들이네. 순리를 따를 수 있도록 ‘적당한 보살핌’만 있을 때 가장 잘 살 수 있는 이들이지. 그렇다면 근원계의 근간이 되는 영체들은 어떤가? 다소 혼돈의 성질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다들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태어난 존재들이 아닌가?”
“……”
“세상은 과거 자네가 머물며 가꾸던 농장이 아니야. 늘 자네가 원하는 결실만을 가져다주는 곳이 아니라는 이야기일세. 분명 비슷한 면도 있긴 하겠지만, 뿌리를 찾아나가다 보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지.”
“…나도 알고 있네. 어느 분께 들었던 것과 참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군.”
불천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당장이라도 하품을 할 것처럼 따분한 표정이다. 하지만 해강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간다.
“지루한가? 그렇다면 조금 다른 비유를 들어보세. 이 세계와 그 안의 존재들은 자네의 자식과 같은 곳일세. 동의하나?”
“어느 정도는.”
“그렇다면 묻겠네. 부모가 자식의 모든 걸 좌우하려 하는 게 맞는 일인가? 그들은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이성과 지성을 갖췄네. 그렇다면 그들에게도 스스로 선택이라는 걸 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마땅하지 않겠나? ”
내내 짧은 대꾸만 하며 듣고 있던 불천이 드디어 할 말을 찾았다는 듯 허리를 세웠다.
“말 한 번 잘했군. 자식에게 위협이 될만한 걸 미연에 방지하는 건 부모로서의 의무고 책임일세.”
“일리는 있네. 하지만 그건 물정 하나 모르는 어린 자식일 때나 가능한 거라 생각하네. 어느 정도 머리가 굵어진 뒤에도 그리 해야 옳겠나?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히 있는데도?”
“그들이 스스로 답을 찾을 능력이 있다는 건 누가 보증하지? 내가 봤을 땐 그렇지 않은데.”
“자네는 태황께서 자네보다 지식과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나?”
“뜬금없이 그게 무슨… 그럴 리가 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지.”
“태황께서 자네에게 뭐라 말씀하셨나? 답은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다, 그 또한 답이 될 것이다. 그리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
“자네를 뛰어넘는 지혜를 가진 분도 자네의 뜻을 존중해주셨네. 그런데 정작 자네는 다른 이들을 낮춰보려 하고 있지 않나?”
불천은 말문이 막혔다. 날카로운 지적이다.
“물론 자네 역시 최초의 존재 중 하나였고, 태황에 비해 부족하다 하나 결코 부족하지 않은 경험과 깨달음을 가지고 있네.”
“……”
“그건 분명 강력하고 훌륭한 자산이야. 지금껏 그것들을 바탕으로 이루어낸 것들도 많고.”
“흥. 병 줬다 약 줬다 장단이 아주 다이내믹하구만. 그럼 이제 다시 병을 줄 차례인가?”
“하지만 경험은 지극히 천편일률적인 것일세. 자네의 경험은 최초의 것으로서 충분히 가치가 있지만, 오직 그것만이 정답이라는 의미는 아닐세. 경험은 시야를 넓혀주는 기능을 하지만, 반대로 그 안에 갇혀버릴 경우엔 시야를 완전히 차단해버리기도 하거든.”
“허 참… 달랬다, 때렸다, 뭐하는 짓인가? 헷갈리게시리.”
뚱한 표정으로 대꾸하는 불천. 하지만 해강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간다.
“기억 누적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본질적인 이유를 잊지 말게. 그 아이디어는 자네 머리에서 나왔다는 것도.”
“아아, 몰라. 머리가 아플 지경이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결국 자네도 규칙을 벗어난 존재를 포용해보는 게 어떻겠냐, 그 말을 하고 싶은 거 아닌가?”
“규칙을 벗어난 게 아니라 자네의 통제를 벗어난 거겠지.”
“……!!”
“내가 볼 때 자네는 지금… 자네가 모르는 영역에서, 그럴듯해보이는 결과가 나온 게 마음에 안 드는 거야. 아니면 자네가 모르는 뭔가가 있었다는 걸 납득할 수 없거나.”
“…후… 그건 부정할 수 없군.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는 건 사실이니까.”
“통제를 벗어났다는 이유로 그저 찍어누르려고만 한다면, 이 세계의 많은 존재들에게는 무슨 발전이 있겠나? 또 자네는 이미 알고 있는 것들 외에 뭘 더 배울 수 있고? 운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어려울 거야.”
“후우…… 따끔하군.”
불천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상대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지만, 점점 밀리는 느낌이 들더니 이젠 한 마디 꺼내기도 쉽지 않다. 역시 두뇌집단의 수장다운 언변이다. 그는 몇 번 심호흡을 하며 생각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태황께도 비슷한 말씀을 드리고 나왔네만...”
“흠?”
“…자네는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해. 나는 내게 주어진 일을 할 테니. 어차피 답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면… 그 분의 말도, 자네의 말도 나를 설득할 목적이었다면 부족했네. 아주 조금이지만 말이야.”
“허허… 이 친구 참…”
“자네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겠어. 하지만 머리로는 알면서도 마음이 따르지 않는 일이라는 건 있는 법이지. 흥미롭지 않은가? 우리가 이렇게 끝까지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했던 것도 참 오랜만이거든. 어느 쪽이 새로운 답이 될지, 그건 결과가 말해주지 않겠나? 어디… 우리에게 어떤 길이 주어질지 가보자고.”
“어쨌든, 생각이 바뀌기는 했다는 건가?”
“그래. 결국 내가 하려는 행동은 같겠지만, 마음가짐은 달라졌네. 뭐랄까… ‘그 존재를 반드시 쫓아내겠다’는 쪽에서 ‘어디 한 번 지켜보겠다’는 쪽으로 바뀌었달까?”
“어쩔 수 없군. 뭐… 그 정도로 만족해야겠지. 이거 참… 예상은 했지만 역시 쉽지 않은 인사로군.”
“누가 할 소릴.”
대화가 끊기고 옅은 어색함이 감돈다. 해강현이 먼저 몸을 일으켜 문 쪽으로 향하자, 불천도 약간의 간격을 두고 뒤를 따른다. 복도로 나선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본다.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 불천과 그를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는 해강현. 불천이 먼저 몸을 돌려 어디론가 향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해강현은 조용히 혼잣말을 읊조렸다.
“너무 올곧다고 해야 할지, 강직하다고 해야 할지… 그래, 그 답은 지나간 뒤에야 알 수 있겠지. 어디, 함께 지켜보도록 함세. ……그나저나… 쓸데없이 용감한 제자는 이제 어떻게 되려나. 늘 걱정거리를 몰고 다니는 건 여전하구만.”
불천이 사라진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린 그는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며 한숨을 푹- 내쉰다.
지난 회차보다는 많지만 여전히 평소보다는 분량이 약간 적습니다.
몇 주 정도 이상하게 할 일이 밀려드는 바람에 연재 간격도 확 벌어졌네요. 그나마 이번 회차는 어떤 내용을 쓸지 정해져있는 상태였는데도 2주를 넘겨버렸습니다. 다음 회차는 전개 방향부터 다듬어야 하는데 큰일났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마무리해보겠습니다. 혹시 모르죠. 이번 주엔 할 일이 그리 많지 않으니 의외로 빨리 작업이 진척될지도요. 모든 건 '글빨신'에게 맡겨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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