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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글로 Feb 08. 2018

[연재소설] 저 너머의 하늘 #38.

슬금슬금, 쭈뼛쭈뼛 움직여본다. 진우도 그 뒤를 따른다. 과하게 조심스러운 속도다.


“야이씨, 쫄았냐? 걷는 게 왜 그 모양이야?”

“팀장님이야말로 새파란 막내 등 뒤에 숨어서 뭐 하시는 겁니까? 모범을 좀 보여주십쇼.”

“모범은 무슨… 야, 저 새끼 면상 좀 봐라. 장유유서나 노인공경 같은 우리네 아름다운 전통은 듣도보도 못했을 것 같이 생겼지?”

“뭐… 면상은 모르겠고 일단 분위기만 봐서는 그럴 것 같네요.” 

“그치? 그럼 만약 처맞게 되면 차별없이 처맞을 거라는 얘긴데, 그래도 젊은 놈 맷집이 나보다는 낫지 않겠냐?”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의 있습니다. 일단 팀장님은 노인이 아니시고요. 장유유서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 아닙니다. 게다가 저는 마스크 쓴 얼굴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시력이 좋진 않거든요. 팀장님은 이 거리에서 저 놈 얼굴이 보이십니까? 그럼 저보다 훨씬 정정하신 것 같은데요. 고로, 역시 팀장님께서 앞장 서시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오, 이 화상이 진짜. 이럴 땐 그냥 좀 잠자코 앞장서주면 안 되겠냐.”

“저도 맞으면 아픕니다. 목숨이 두 개인 것도 아니고요.”


티격태격하는 사이 보폭 좁은 걸음을 느릿느릿 움직이는 두 사람.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선 채 고개만 까닥거릴 뿐이다.


[…지루하군.]


다시 한 번, 울리는 듯한 탁한 음성이 짤막하게 흘러나온다. 문득 영태는 귓전을 때리는 그 소리가 마치 메아리처럼 울린다는 걸 알아차렸다. 마치 밀폐된 실내 공간에서 듣는 것처럼. 


‘낯설다’는 판단이 온몸의 감각을 곤두서게 한다. 비록 한 치 앞도 제대로 식별하기 힘들 정도의 짙은 어둠이 주위를 채우고 있다지만, 조금 전 그들이 발을 들여놓은 이곳은 분명 산이었다. 백 번 양보해서 우연히 사방이 숲으로 둘러싸인 어느 지점에 다다랐다 해도, 이토록 선명하게 소리가 울린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이래저래 골 때리는구만. 여긴 뭐 산 전체가 귀신의 조화로 만들어진 곳인가? 아니, 여기가 당최 산이 맞긴 맞는 거야? 대체 언제부터 이랬던 거지? 확실히 비정상적으로 어둡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지금은 뭐 거의 불 꺼진 방이나 다름없잖아?’


답이 나오기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해본다. 다행히 그간 쌓아온 거칠고 지독한 경험들이 지금 상황에서는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바로 옆사람의 얼굴도 잘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하기만 한 사위. 을씨년스러움을 넘어 두려움까지 느껴질 만큼 괴기스러운 분위기.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미 극도의 불안에 짓눌렸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상황이니까. 


그나마 농담이라도 던지며 이성적인 판단력을 유지할 수 있는 건, 과거부터 겪었왔던 온갖 경험들 덕분에 어느 정도 면역력이 생긴 탓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런 거라면… 영태 입장에서는 자부심이라 할만할 것이다.


‘개똥도 약에 쓰일 때가 있다더니… 지랄같은 인생살이가 이럴 땐 또 도움이 되나보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입가에 쓴웃음이 머금어진다. 진우 녀석도 비슷할까? 아니, 모르겠다. 지금 당장은 거기까지 신경쓰지 않기로 한다. 영태 자신도 간신히 머리를 굴리고 있을 뿐, 옆사람까지 챙겨줄 정도로 정신적 컨디션이 여유로운 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느릿느릿 다가올 거면 그냥 자리에 있는 게 어떤가. 피차 이야기를 주고받는 데는 별 문제 없어보이는데.]

“뭐… 그럴 수도 있겠군. 이야기만 주고받을 거라면 말이지.”

[그 외에 다른 목적이 있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헤에, 제법 말귀를 잘 알아먹는데요, 팀장님.”

“그러게 말이다. 말 겁나게 안 들어 처먹는 우리 팀 1호, 2호보다 낫네.”

“……”


반응을 보니 다행히 진우도 그럭저럭 말짱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영태 자신처럼 머릿속이 시끄러울지는 모르지만.


[다른 목적이라… 하긴, 뭔지 알 것도 같군. 고작 알량한 말장난 정도를 하기 위해 이른 시간부터 이 먼 곳까지 떼를 지어 행차했을 것 같지는 않으니.]

“알 것 같다? 뭐, 그렇다면 이야기가 좀 더 빠를 지도 모르겠군. 쓸데없는 신경전 따위 귀찮으니 빙빙 돌리지 않고 물어보겠다. 우리가 지금 사람을 좀 찾고 있는데 말이야.”

[그런데?]

“네가 정확히 뭐하는 녀석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우리가 찾고 있는 애가 어딨는지 알고 있을 것 같다는 촉이 강하게 오거든.”

[자신만만하군. 다른 목적이라 함은… 그것인가?]

“뭐… 굳이 따지자면 그거 말고 또 있긴 한데… 일단 얘를 찾는 게 최우선이라서 말이야. 그래야 뭘 더 하더라도 할 수 있는 상황이랄까.”

[그런가. 정확히 누굴 찾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오늘 만난 몇 안 되는 이들 중에 있을 거다. 이 산은 꽤 오랫동안 나 혼자만 지냈던 곳이거든. 대략적인 인상착의라도 말해보겠나?]


‘뭐야? 이 자식 왜 이렇게 협조적이지? 불안하게시리.’라는 생각과 함께 본능적 경계심이 작동한다. 오늘 처음 보는, 게다가 누가 봐도 의심스러운 차림을 하고 있는 놈에게 동료의 행적을 묻고 있는 꼴이라니. 우스운 일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사실 영태의 계산은, 일부러 여유있는 모습을 보여주면 어느 정도 상대를 도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도였다. 하지만 상대방 쪽에서 이렇게 착실하게(?) 반응해 오자 저으기 당황스럽다. 주도권을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농락만 당하고 다시 뺏긴 느낌이랄까.


‘저 놈 생긴 꼬라지로 보나 이 말도 안 되는 정황들로 보나 휘영이가 말하던 놈이 맞는 것 같은데…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기억력이 가물가물하네. 프로파일을 좀 더 꼼꼼하게 봐둘 걸 그랬군.’


혼잣말을 속으로 뇌까려보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지금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휘하 팀원들을 무사히 챙겨서 돌아가는 것. 설령 작전이 실패로 끝나는 한이 있더라도 그에게는 팀원들의 안위를 챙겨야 할 의무가 있다. 이미 처음 계획했던 것에 비해 너무 많은 것이 틀어져버린 상황. 변수에 따른 수정 루트를 찾는 것도 어느 정도 범위 안에 있어야 가능한 법이다. 


‘저 녀석이 우리 정체를 알고 있을까? 이미 알고도 모르는 척 하는 것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는 지금은… 최대한 태연한 척 행동하는 게 최선이겠지. 일단은 애들을 찾는 게 우선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야.’


생각을 정리한 영태는 일단 대화를 계속 이어가기로 결단을 내린다. 


“인상착의라… 일단은 젊은 여자애야. 외모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네. 되게 고집 세 보이게 생겼고, 목청이 꽤 크고 입도 거친 편이지. 만난 적이 있으면 아마 기억에 남아있을 것 같은데. 오지랖도 제법 있는 애라서 지금 네 모습을 봤다면 뭐라도 한 마디 했을 녀석이거든. 또… 뭐가 있더라. 야, 진우야. 너도 뭐 말 좀 해봐. 네가 제일 최근에 봤잖아.”

“네? 아, 그게… 어… 그러니까… 자, 자, 자세히 들여다 보면 꽤 예쁜 분입니다. 가끔 반짝반짝 후광 같은 게 보일 때도 있고요.”

“…… 뭐라는 거야, 이 미친놈이. 새벽에. 나갈 때. 그러니까. 네놈 자식이. 내 지시 야금야금 씹어드시고. 보내드릴 그때. 무슨 옷 입고 나갔는지 그런 걸 말해줘야 할 거 아냐, 인마.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아, 어, 그게… 기억이 잘…”

“…… 휴우…… 됐다. 넌 그냥 입 다물고 있는 편이 훨씬 낫겠구나.”

“그러고 보니… 팀장님, 알고 계셨네요. 제가 은 경위님 보내드린 거라는 거.”

“… 당연하지, 인마. 니들이 기든 뛰든 날든 다 내 손바닥 안이란다.”

“쩝……”


평범한 사람이 봤으면 피식 웃었을 상황이다. 아울러, 무척 민망할 수도 있을 상황이기도 하다. 이런 때에는 상대방이 그런 ‘인간적인’ 것들이 먹힐 존재가 아닌 것 같다는 게 오히려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더 말하지 않아도 누군지 알 것 같군. 오늘 내가 만난 사람 중 여자는 한 명밖에 없었거든. 마침 말해준 특징들과도 일치하는 것 같고.]

“그래? 그것 참 다행이군. 그럼, 걔 지금 어딨는지 알아?”

[글쎄… 지금 바로 이 시점을 기준으로는… 모른다. 조금 전까지는 알고 있었는데… 놓쳐버렸어.]

“…… 아, 그래? 그럼 혹시 마지막으로 봤다는 장소를 알려줄 수는 있나? 가는 길이라든가.”

[흐음… 그건 좀 곤란한데. 나한테는 나름 중요한 곳이라서. 아무나 들쑤시게 놔둘 수는 없거든.]

“……”


이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지? 라고 스스로 질문을 던져본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일단 휘영이 있는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어딘가를 배회하고 있다는 뜻이 되나? 흠… 크게 틀린 답은 아닌 듯하다. 


그럼 다음 질문. 자신에게 중요한 곳이라는 건 어떤 ‘경계’가 존재하는 특정 공간이라는 뜻. 또한, 알려줄 수 없다는 건… 더 이상 의도를 감춘 질문을 던져봐야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없다는 의미, 대화를 지속할 생각이 없다는 의미로 봐도 되려나? … 다소 확대 해석한 경향이 있긴 하지만, 방향 자체는 틀리지 않은 듯하다. 


하긴… 애당초 그 ‘중요한 곳’에 휘영만 들여보내 놓았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의심스러운 상황 아니던가.


영태가 내놓을 다음 말은 이미 정해졌다.


“휴우… 대충 봐도 평범한 놈팽이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 우리 애들 어쨌냐? 너, 내가 말한 여자애 말고 다른 애들도 봤지?”

[기억력이 좋지 않나보군. 이미 말해줬었다. 나머지 하나는 놓쳤다고. 여태까지 만나지 못했다면 나도 어디 있는지 알 도리가 없다. 주변에서 별다른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이미 내 영역 밖으로 나간 것 같군.]

“… 나머지 하나…?”


영태의 표정이 빠르게 굳는다. 처음 마주쳤을 때 먼거리에서도 뚜렷하게 들려왔던 그 말을 되새긴다. 놓쳐버린 나머지 하나… 그럼 다른 둘은? 아니, 현재로서는 휘영의 행방도 모른다. 직접 알아낸 것도, 놈에게 확답을 들은 것도 없으니 행방을 모르는 멤버는 정확히 셋으로 봐야 할 것이다. 


순간 등줄기를 타고 오싹한 느낌이 흐른다. 


십수 년간 현장을 누비는 동안 쌓았던 직감들이 불안한 예측이 되어 알람처럼 울려댄다. 그 중에서도… 그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상황을 봤던 때와 비슷한 종류의 직감이 가장 맹렬히 움직이고 있었다.


옆에 있던 진우도 대략적인 낌새는 알아차린 모양새다. 다만, 영태에 비해 주위의 암울한 분위기에 영향을 더 많이 받고 있던 탓에, 다소 의식이 또렷하지 못하다. 덕분에 그는 둘 사이의 이야기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 건지 빠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두툼한 목소리가 천천히 울려퍼진다. 


[하나는 숨통을 막아줬고… 다른 하나는 공간을 비틀어서 그 사이로 밀어버렸지. 특별히 손을 많이 쓸 필요도 없었어. 조금만 빨랐으면 셋 다 아주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 그건 좀 아쉬운 일이야. 그 놈, 눈치만큼이나 행동이 빠르더라고.]


내뱉어진 단어들이 귓가로 전해짐에 따라 영태의 표정이 변한다. 직접적인 표현을 듣자 진우의 표정 역시 일그러진다. 


[참, 그 여자는 종적을 놓치긴 했지만… 아직 살아있을 거다. 내 손으로 뭘 어떻게 하지도 않았고, 그 공간이 특별히 위험한 것도 아니거든. 운이 좋다면… 곧 만나게 될지도 모르지.]


한없이 낮았던 목소리의 톤이 살짝 높아진다. 두 사람의 표정 변화를 보며 만족스러운 반응이라는 듯한 태도.


“…… 이……”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최대한 드러내지 않으려 애를 써보지만, 도무지 어려운 일이다. 불안한 예감이 현실로 다가왔음을 인지한 영태의 분노가 악문 잇새로 슬쩍 새어나온다. 보다 빨리 화를 터뜨린 진우의 음성이 들려온다.


“… 팀장님, 저 새끼가 지금 뭐라고 지껄인 겁니까?”

“……”

“제가 잘못 들은 거죠? 아니면 저 새끼가 소설을 쓰고 있거나. 그렇죠?”

“……”

“아, 진짜! 뭐라고 말씀 좀 해보세요, 팀장님! 네?”

“… 조용히 해라, 인마.”

“……에이씨, 젠장! 이런 개같은!”


당장 달려들기라도 할 기세로 언성을 높이던 진우는 씹어뱉듯 꺼낸 영태의 나직한 한 마디에 혼자 바닥을 구르며 울분을 터뜨릴 뿐이다. 평소 같았으면 몇 마디라도 더 대들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분위기가 아니다. 당장이라도 건드리면 터질 것처럼 위태로운 영태의 모습에 진우는 한층 더 답답한 분노를 느낀다.


누가봐도 엄청난 감정 동요를 애써 삭이고 있는 듯한 영태. 그 속이야 말해 무엇할까. 아마 바락바락 악이라도 쓴 자신보다 훨씬 더할 것이다. 그렇게 이해하려 애써본다. 끓어오르는 감정 위에 그나마 남은 이성을 있는대로 박박 긁어 들이부으면서.


영태는 상의 안쪽에 있는 총을 떠올리고 손을 가져가려 했지만, 꺼내기 직전 마지막 남은 이성의 끈을 붙잡을 수 있었다. 과연 이걸 꺼낸다고 해결할 수 있을까? 글쎄. 확신할 수가 없다. 


처음 산 초입에 들어설 때부터 어렴풋이 느꼈던 이질적인 기분. 바로 옆에 있는 진우의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멀찍이 서있던 녀석의 옷차림까지 세세하게 보이는 모순. 감각과 이성, 양쪽 모두가 이 말도 안 되는 공간 전체에 깔려있는 이질감과 어우러져 혼돈 속으로 빠져든다. 그러자 확신은 더더욱 흐려져 간다. 애당초 얼마 있지도 않았지만.


‘이 말도 안 되는 조화를 부린 게 저 놈이라면… 고작 총 따위로 해결할 수 있을리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있을까?’


펄펄 끓는 감정이 금방이라도 쏟아질듯 넘실거리는 가운데, 영태는 필사적으로 마지막 남은 이성을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저 놈이 단순히 도발을 하는 것이든,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든, 현재로서 그가 추구해야할 최선에는 변함이 없다. 남은 멤버들이라도 무사히 챙겨서 귀환하는 것. 


‘저 미친놈이 놓쳤다…고 말한 건… 아마 최 형사일 거다. 지금으로서는 어떻게든 안전한 곳으로 피해있을 거라 믿는 수밖에 없겠지. 휘영이 녀석과 박 형사, 한 형사는 일단 이 자리를 피한 다음에 다시 생각을 해보면 되겠지만… 문제는 일단 어떻게? 이 자리를 피할 방법이 과연 있을까? 저 미친놈이 지금까지처럼 넋 놓고 이야기나 주절거리고 있지는 않을 텐데…’


철컥-


그때, 답을 찾기 어려운, 아니 과연 답이 있기는 한 건지 의심스러운 고민으로 머릿속이 시끄러울 바로 그때, 가까운 곳에서 익숙한 쇳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린 영태는 당황스러운 광경을 본다. 화를 주체하지 못한 듯 왼손으로 머리를 벅벅 헝클어뜨리고 있는 진우의 오른손에 총이 들려있는 모습. 그리고 그 총구는… 영태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너…? 오진우, 너 지금 뭐하는 거냐?”


당황. 황당. 그런 진부한 단어 따위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영태의 이성을 강하게 때린다. 복잡하게 머릿속을 휘감던 수많은 생각의 실타래들이 일순간 방향을 잃고 말았다. 지금 생각 따위를 하고 있을 여유가 어디 있냐며 제멋대로 꼬여간다.


“…네? 제가 뭘… 어? 어라? 이런 제길!”


탕-


진우가 잽싸게 총구 방향을 돌리는 순간, 불이 뿜어진다. 기겁한 와중에도 순발력을 발휘해 가까스로 상황을 모면하자, 진우는 다시 분노를 터뜨린다.


“이 미친 새끼가! 네가 그런 거지? 이 새끼야!”

“뭐야, 왜 그래? 이게 다 무슨 상황이야?”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 새끼가 뭔가 괴상한 조화를 부린 게 분명해요. 말이 안 되잖습니까. 제가 팀장님을 왜…!”

“오케이, 오케이. 일단 진정해라. 그런 당연한 말은 할 필요도 없는 거지. 안 그래? 그러니까 일단 진정하고. 응?”

“후우… 후우… 젠장! 빌어먹을!”


진우는 거칠게 심호흡과 함께 재차 바닥에 발길질을 하며 분풀이를 한다. 당연히 의심하지 않는다 영태는 말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스스로에게 치미는 화는 견디기 어렵다. 이 빌어먹을 상황이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사내는 여전히 미동도 없다. 거리와 무관하게 여전히 뚜렷하게 보이는 검은 마스크. 그 안에 들어있는 표정은 분명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있으리라.


[궁금하겠지?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지? 키히히히. 나도 가물가물하던 차라 그냥 시험삼아 해봤는데… 뭐야, 너무 잘 되네? 키히히히.]


가뜩이나 유쾌하지 않았던 목소리에 억지로 참는 듯한 웃음소리가 더해지자 소름끼칠만큼 기분 나쁜 소리가 만들어진다.


다양한 감정으로 혼란을 겪는 두 사람과 그 모습을 보며 즐기듯 웃고 있는 괴인. 한동안 이어지던 불쾌한 웃음 소리가 멎더니, 조금 전까지 들었던 낮은 탁성이 다시 흘러나온다.


[너, 지난번에 날 만난 적 있지? 그 밤, 골목에서 말이야. 여자와 같이 있던 두 놈 중에 하나였잖아.]


짜증이 치밀대로 치밀어 ‘또 무슨 개수작인가’라는 듯한 표정으로 웃음소리를 참아넘기던 진우는, 문득 그 말에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싸악- 표정이 굳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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