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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글로 Feb 20. 2018

[연재소설] 저 너머의 하늘 #39.

“이 공간은 대체 어디까지 가야 빠져나갈 수 있는 건가요?”


어둑한 공간 속, 앞에서 걷던 휘영이 묻는다. 둘 중 누구에게 묻는 건지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분위기상 답을 할 수 있을만한 이는 분명했다. 현우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글쎄요. 공간을 만든 놈이 길을 어떻게 해놓았느냐에 따라 다르겠죠. 어떤 목적으로 만들었든 간에 친절하게 뚫어놓았을리는 없겠지만.”

“그게 무슨 뜻이죠? 좀 알아들을 수 있게 말 좀 해봐요.”


그러자 조용히 있던 지홍이 끼어들었다.


“제가 오는 길에 설명을 좀 들은 게 있습니다만… 기본적으로 여긴 어떤 속임수 등의 용도로 쓰기 위해 만들어진 가상의 공간입니다. 보통은 ‘흑막’이라고 부른다더군요.”

“흑막? 뭐, 정치적인 음모라든가 계략 같은 거 말할 때 배후에 가려진, 뭐 그런 거요?”

“흠… 그거랑은 실질적으로 다릅니다만, 기능적인 측면을 생각해보면 의미는 비슷하겠네요. 어쨌거나 뭔가를 숨기거나 속인다는 점은 같으니까요. 아무튼… 이 흑막이라는 곳은 이론적으로 어떤 차원에도 완벽하게 속하지 않는 공간입니다. 때문에 정확히 어떤 식으로 구성돼 있는지는 만든 놈만 알 수 있죠. 아마 이 상태에서 흑막이 갑자기 깨진다면, 저희는 한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꼴일지도 모르겠네요.”

“아무런 대책이 없는 거에요, 그럼?”

“실력 차이가 월등하게 난다면 간파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길을 잃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생각해야겠죠.”

“길을 잃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글쎄요. 저도 흑막을 직접 경험해보는 건 처음이라.”


지홍의 설명이 막히자 현우가 그것을 받아 이어나간다.


“그것도 흑막의 구조에 따라 다릅니다. 보통은 차원과 차원의 사이를 헤매게 된다…는 게 정설입니다만, 그 부분에 있어서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군요. 길을 잃어본 적이 없어서.”

“……지홍 씨, 이거 지금 자랑하는 거죠?”

“그런 것 같네요.”


휘영은 눈을 가늘게 좁히고 얄밉다는듯 현우를 한 번 흘겨본 뒤 다음 질문을 던진다.


“그럼… 이렇게 계속 걷기만 하는 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죠? 차라리 한 곳에 가만히 있는 편이 낫지 않나요?”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를 좀 더 들어보고 싶습니다만.”

“어차피 어떻게 생긴지 모를 공간이라면서요. 그럼 괜스레 체력을 낭비하는 것보다 나은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길을 잃을 위험이 있다고도 하셨고.”

“저 없이 이 친구만 따라다닌다고 해도 차원의 미아가 될 일은 제로에 가깝습니다.”

“왜 제로가 아니고 제로에 가깝다…죠?”

“뭐…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수 있는 거니까요. 저는 안 떨어질 자신이 있지만 이 친구는 또 모르잖습니까?”

“……”

“게다가 흑막은 불안정한 공간입니다. 만들고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술자의 영력을 소모하게 되죠. 즉, 무한정 유지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는 겁니다. 술자 쪽에서 마음만 먹는다면 힘을 좀 더 써서 공간을 다시 한 번 비틀어버리는 경우도 있죠. 즉, 어차피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길을 잃지 않는다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허… 그것 참. 정말 답이 없는 공간이네요. 그럼, 나갈 수 있긴 한 건가요?”

“말씀드렸다시피, 온전히 뭔가를 가둬놓을 목적으로만 설계한 흑막이라도 무한정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공간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만도 상당한 힘을 쓰게 마련인데, 만약 지금 놈이 어딘가에서 다른 뭔가를 동시에 하고 있다면 공간 유지의 효율성도 떨어지게 마련이죠.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그 영력이라는 게 고갈되면 갑자기 여기 어딘가가 뻥 뚫릴 수도 있다는 건가요?”

“이론적으로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보통은 작은 틈 정도가 먼저 생기게 되죠. 공간 자체가 엄청나게 넓게 만들어졌다면 어딘가 틈이 생긴다 해도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요.”

“해석해보자면, 신현우 씨는 이 공간을 이미 훤히 꿰고 있다, 뭐 이런 종류의 말씀이겠죠?”

“……눈치가 빠르시네요.”

“기왕이면 이해력이나 기억력이 좋은 거라고 해주세요. 그동안 스스로 잘났다는 소리 하시는 걸 한두 번 봤어야 말이죠. 방금 전에도 두 번, 잘난척 하셨잖아요?”


현우는 의기양양한 휘영의 리액션에 어깨를 한 번 으쓱해보일 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결과 몇 번 정도 틈이 생길 뻔한 적이 있었습니다. 직전에 멈춰버리긴 했지만요. 보아하니 만든 놈이 상당히 불안정한 상태인 듯한데, 아마 조만간 틈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럼 찾아내는 거야 금방이죠. 아마… 이 친구 능력으로도 충분할 겁니다.” 

“엥? 나?”

“그래. 누누이 말했지만 이 공간은 아주 초보적인 수준이다. 그대가 아직 흑막을 파훼해본 경험이 없으니 틈이 생기더라도 곧바로 알아보지 못하고 잠시 헤맬 수는 있겠지만… 기껏해야 얼마 간의 시간 차이일 뿐이지. 본래 틈이란 건 한 번 생겨나기 시작하면 더 커지거나 많아지기 쉬운 법이니까.”

“그렇군… 그럼 이렇게 길을 찾아 돌아다니는 건 틈이 생기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차선책을 준비해두는 셈인가?”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 볼 수 있네. 애당초 누군가를 이곳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입구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그대와 나도 그걸 통해 들어온 거고. 가능성이 낮은 이야기긴 하지만, 만약에라도 끝까지 저쪽이 틈을 보이지 않는다면 자력으로라도 빠져나가야 하지 않겠나.”

“아…” 


지홍은 알아들었다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휘영은 작은 탄성을 내며 납득했음을 표현했다.

 

“원래대로라면… 처음 은 경위님이 지나왔던 길을 그대로 되짚어서 돌아가면 다시 입구를 찾을 가능성이 높지만… 당연히 어디로 어떻게 왔는지 기억하고 계실리는 없겠죠?”

“……네, 그렇네요. 안타깝게도.”

“별로 기대하지 않았으니 실망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흠… 다른 누군가가 들어온 걸 알았다면 지나온 길을 다시 흐트러뜨려 재구성해버리는 식으로 시간을 끄는 방법도 있습니다만… 그러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길을 찾아내는 건 꽤나 흔한 능력이라는 걸 알고 있을 테니까요.” 

“할 수는 있지만 비효율적이라서 하지 않는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아무리 복잡하게 길을 꼬아놓는다고 해도 감지계 능력자들은 기억력이나 오감에 의지하지 않고도 길을 찾아낼 수 있으니 무쓸모한 짓이 될 수밖에 없죠.” 


휘영은 생소한 단어들이 군데군데 섞여있음에도 전체적인 맥락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원계라는 곳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어째서 완벽하게 이해되지 않는지는 의문이었지만, 지금은 그것까지 담아둘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니 일단 넘어가기로 한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무슨 말인지 알겠어…’ 라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가며 피식 웃음이 난다. 


“만약 혼란을 줄 목적이라면 입구의 위치를 바꾸는 정도로도 충분합니다. 특정 대상이 들어온 뒤에 입구 위치를 바꾼다거나, 만약 여러 대상을 동시에 끌어들이는 상황이라면 하나가 들어온 뒤 입구 위치를 비틀어 서로 다른 곳으로 떨어뜨려 놓을 수도 있죠.”

“그럼 지금처럼 반대로 안쪽에서 입구를 찾아 다시 나가더라도 제가 처음 들어왔던 곳과 다른 곳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복잡하네요.”

“흑막이라는 게 원래 그렇습니다. 속임수를 목적으로 시작된 것이긴 하지만, 사용하기에 따라서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갖죠. 이 분야만 전문으로 연구하는 이들도 꽤 많을 정도니까요.”

“하… 답답하네요.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두 사람을 만난 후 눈에 띄게 안정을 되찾았던 휘영은 문득 막막한 심정에 다시금 표정이 어두워졌다. 자신이 상대하려 했던 녀석이 이 정도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데서 상대적 박탈감 같은 느낌마저 든다. 


‘난 기껏해야 꿈처럼 느껴지는 기억들을 좀 되찾은 것 뿐인데… 힘은 좀 세진 것 같긴 하지만 고작 이걸로 그 자식을 상대할 수 있을까?’


처해있는 현실을 다시 한 번 냉정하게 정리해본다. 자신이 이 괴상한 공간에서 헤매고 있는 동안 동료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아니, 어쩌면 이미 무슨 일이 생긴 걸지도 모른다. 어둠 속에 갇혀 있을 때 봤던 그 장면이 만약 현실이라면… 그렇게 된다면 정말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 


조용히 몸을 숨기고 동료들을 기다렸다면 괜찮았을까? 아니, 애당초 고집을 부려 혼자 먼저 움직이는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다른 모습이었지도 모른다. …… 자책으로 점점 젖어드는 그녀의 표정을 지켜보고 있던 현우가 말을 건넨다.


“녀석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은 경위님 당신입니다. 아마… 걱정하시는 종류의 일은 없을 겁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


거짓말. 

현우와 지홍은 이미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알고 있다. 현우는 잠시 멈칫하긴 했지만, 별다른 티를 내지 않고 끝까지, 위로의 거짓말을 밀어내는 데 성공한다.


“저기… 신현우씨라면 다른 방법도 써볼 수 있지 않나요?”

“흠… 이를테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거죠?”

“충분히 강한 분이니까… 이 공간 자체를 부숴버린다든가…”


현우는 피식 웃었다.


“비웃는 것 같았다면 먼저 사과부터 하겠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해볼까요? 저 친구는 모르겠지만 은 경위님과 저는 여기 도둑을 잡으러 온 입장이었죠?” 

“그렇…죠?”

“도둑놈 잡으러 소굴까지 직접 찾아온 마당에, 이것저것 마구 때려부수면서 ‘내가 너 잡으러 왔다’고 대대적으로 광고하는 게… 과연 현명한 일일까요?”

“……비유가 참 현실적이시네요. 덕분에 아주 쉽게 이해했어요.”

“과찬이십니다.”


휘영은 뭔가 더 쏘아붙여주고 싶은 마음이 잠깐 들었다. 하지만 곧 ‘에휴, 내가 말을 말자.’라고 생각하며 그만둔다.


“…영 조급해하시니 말씀 드리는 겁니다만, 아까부터 공간을 유지하는 힘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습니다. 줄어드는 속도도 빨라요. 밑 빠진 독처럼 뭉텅이로 새고 있달까요. 조만간 틈이 생길 것 같습니다. 틈이 생길만한 곳이 몇 군데 있어서 잠시 둘러보고 올까 합니다.”

“어, 그럼 저도 따라가면…!”


휘영이 일어서려 하자 곁에서 지홍이 잡는다.


“놔두세요. 여기서 체력이나 조금이라도 보충하는 게 이득입니다. 지금 은 경위님 상태로 저 인간 따라다니다가는 아마 금세 방전되고 말 걸요.”

“경험자의 말이라 엄청 와 닿네요.”

“…합의가 되신 거라면 여기서 기다리겠다는 뜻으로 알고 다녀오겠습니다. 흠… 어쩌면 제가 돌아오기 전에 흑막이 깨질 수도 있겠군요. 혹시 제가 간 곳 말고 다른 곳에 틈이 생긴다면… 알아서 처신하시길. 저 친구를 전체적으로 읽어봤습니다만, 제가 없어도 딱히 어려운 상황이 생기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너무 마음을 놓으시지는 말고요. 만약이라는 게 있을 수 있으니.”

“뭔가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취급하시는 것 같네요. 걱정 마세요! 현실 공간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겪어본 적 없으니 잘 모르겠지만 당신 정도의 존재가 충분히 가능할 거라 보장했으니… 한 번 믿어보도록 하지.”


현우는 보일락말락한 웃음을 머금은 표정으로 두 사람을 한 번씩 바라본다. 부루퉁한 휘영의 대꾸를 곱씹자 ‘어린애 취급’이라는 말이 귓가에 맴돈다. 육체로 보나 그 안에 자리잡은 영체로 보나 그의 입장에서 휘영은 까마득한 어린애이거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피식 웃고 말았다.


“왜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 거죠? 그것도 그렇게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면서?”

“별 거 아닙니다. 얼굴에 뭐 묻은 건 아니니 괘념치마시길.”

“...... 그렇게 말하던 더 신경 쓰이거든요? 아무리 봐도 일부러 그러는 거 같아…”

“아무튼, 머리로는 알아도 마음이란 놈은 제멋대로 쉽게 풀어지는 일이 많으니 쉬더라도 항시 긴장하시길. 하긴… 여기 온 이후로 만약의 상황이라는 걸 계속 겪어왔을 테니 잘 해내시리라 믿습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휘영은 현우와 했던 ‘불편한 약속’을 떠올렸다. 잠깐 둘러보고 오겠다는 말과 달리 자꾸 떠날 것처럼 말하는 사람. 그렇다면 지금 그가 ‘만약’이라 했던 말들은 곧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지금 분명히 확인해 둬야만 했다.


“그보다…”


휘영은 말끝을 흐렸다. 뭐라 말을 꺼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대략 눈치로 보건대, 현우와 따로 만나 주고받았던 이야기들은 지홍에게 알려져서 득될 일이 아니다. 둘 사이의 불편한 약속은 더더욱. 다행히 현우는 눈치챈 모양이었다. 


“애당초 목적은 유사시 제가 직접 손을 쓰는 거였습니다만… 그 계획대로였다면 저는 여기 들어오지 않아야 됐겠죠. 중간에 일의 진행방향이 살짝 바뀐 겁니다. 덕분에 여유 시간은 조금 잃었고, 추가로 해야할 일이 꽤 생겼죠.” 


미세한 턱짓으로 지홍이 있는 방향을 가리키는 현우. 휘영은 무슨 말인지 다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다음으로, 드디어 휘영이 원하는 대답이 나왔다.


“말씀드렸던 그건… 가급적 지켜주셨으면 하지만 ‘반드시’는 아닙니다. 일이 자꾸 틀어지는 건 좋아하지 않지만, 어차피 크게 틀어진 일이 조금 더 틀어진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겠죠. 여러 변수를 고려해 상황 변화를 미리 예측하는 건 늘 해오던 일이니까요. 그저 뜻하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 고맙네요. 그것때문에 내내 불편했었는데.”

“역시… 당신은……”

“네?”

“아닙니다. 아무 것도.”

“뭐야? 나 빼놓고 무슨 얘기들을 그렇게 오래 하는 겁니까?”


자리에 드러누워있던 지홍이 몸을 일으켰다.


“한참 전에 간다던 양반이 여태 안 가고 뭐하는 거유? 그 틈이라는 거 벌써 생기고도 남았겠네.”

“그렇게 빨리 생기는 건 아니니 안심하도록. 그럼, 가보겠습니다. 어떤 상황이 되든 일은 잘 처리하실 거라 믿고, 조만간… 또 뵙도록 하죠.”

“또 보자고 하시는 걸 보니 제가 여기서 죽지는 않나 보네요.”

“삶과 죽음은 제가 관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긴 합니다만… 때로는 어느 정도 짐작이 되기도 하더군요. 그럼……”


길고 길게 이어진 대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현우는 마치 공간 속 어둠과 동화되듯 홀연히 사라졌다.






저벅저벅.


느긋함마저 느껴지는 발자국 소리. 현우는 주위를 둘러본다던 말과는 어울리지 않게 시선을 한 곳에 고정한 채 걷는다. 어느 순간 그가 걸음을 멈췄을 때, 그 곳에는 또다른 누군가가 서있었다. 두루마기를 연상케 하는 푸른 외투 차림의 소년이다. 그는 살짝 푸른빛을 띠는 맑은 눈동자로 현우를 올려다본 뒤 예를 갖춘다.


“누가 들어왔나 했더니… 자네였군.”

“오랜만에 뵙습니다. 주군께서 급히 보내셔서 오는 길입니다. 제가 제일 발이 빠르기도 하고… 이 곳은 제 관할구역이기도 하니까요.”

“관할구역이라… 이런 비틀린 공간 따위도 관할구역으로 포함시키다니. 자네는 여전하군.”

“이 정도 공간이야 저에겐 없는 거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뭐, 그렇긴 하지.”

“아무튼… 주군의 전언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소년은 눈을 감고 합장하듯 손을 모은다. 품이 넉넉한 소매가 살짝 펄럭일 정도로 약한 바람이 불었다. 소년이 다시 눈을 뜨자, 푸른 눈동자 대신 하얀 빛이 은은하게 뿜어져 나온다.


[자네인가?]

“네, 주군.”

[긴말하지 않겠네. 하던 일 중단하고 즉시 돌아오도록.]

“무례인줄 알지만 감히 여쭙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요? 전개 과정에 잠시 변수가 있긴 했지만, 당초 보고 드렸던 계획 전체로 보자면 이제 마지막 단계에 접어든 상태입니다만.”

[과정이 바뀐 것 따위는 상관없어. 어련히 알아서 처리하겠지. 다만… 자네로부터 느껴지고 있던  기운이 신경 쓰여. 지금도 느껴지고 있고.]

“근원계쪽 존재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주군께서 염려하실만한 수준은 절대 아니지만… 그래도 신경 쓰이신다면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어차피 이 시점에서 돌아가는 것 또한 계획 안에 넣어두었던 선택지 중 하나니까요.”

[그래. 자세한 이야기는 돌아와서 듣도록 하지.]

“명을 받듭니다.”


대화가 끝나자 소년이 다시 눈을 감았다 뜬다. 빛이 새어나오던 눈에는 다시 맑은 푸른 눈동자가 구르고 있다.


“바로 돌아가시는 거라면 문을 열어드릴까요?”

“아니, 괜찮네. 이 공간만 깨지면 나도 문을 열 수 있을 테니.”

“흑막을 직접 깨고자 하십니까?”

“시간을 좀 앞당겨주는 것 뿐이야. 보아하니 가만 놔둬도 곧 깨질 것 같거든. 자넨 이만 가봐도 되네. 고생 많았어.”

“별말씀을요. 그럼 또 뵙겠습니다.”


다시 한 번 예를 갖춘 소년이 잔상을 남기며 사라진다. 현우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본 다음, 한 손을 들어 허공의 무언가를 그러쥐듯 하는 자세를 취한다.


“그럼… 슬슬 마지막 장을 시작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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