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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글로 Apr 08. 2018

[연재소설] 저 너머의 하늘 #40.

온통 검은색으로 채워진 집무실. 방 한복판에는 한 세트의 소파가 놓여있고, 그중 한 칸짜리 상석에 앉은 사내의 모습이 보인다. 두 다리를 꼬아 테이블 위에 걸치듯 올려놓고, 한쪽 팔꿈치를 팔걸이에 기댄 채 비스듬히 눕다시피 한 그의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듯하다. 그의 시선이 향해 있는 곳에는 신현우가 마주앉아 있었다.


“그렇게 된 거로군.”

“네, 근원계 쪽 인물과 마주친 건 분명 예상 외의 전개였습니다. 하지만 특별히 변수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고 판단한 바, 좀 더 상황 추이를 지켜본 뒤 보고해도 늦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옳은 판단이었네.”


명령을 받고 즉시 돌아온 현우는 최근의 일의 자초지종에 대해 막 보고를 마친 참이었다. 현장에 도착한 이후 지홍과의 만남부터 흑막 안에서 있었던 일련의 과정에 대해. 사내는 짤막한 찬사로 현우의 보고에 평가를 매긴 뒤 말을 잇는다.


“흠… 이상한 일이군. 백현 녀석이었다고 해도 자네에게는 크게 상관이 없었을 텐데, 그깟 이름조차 낯선 꼬꼬마 녀석이 왜 그렇게 거슬렸던 거지?”

“주군께서 신경이 쓰이셨다면 뭔가 이유가 있었을 테지요.”

“그래, 항상 그래왔지. 하지만 촉만 예민하게 반응할 뿐, 그게 무엇 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었던 때가 더 많았어. 그게 항상 문제였고. 이럴 땐 말야, 누님에게로 간 능력이 참 아쉽단 말이야. 어차피 반쪽짜리가 될 거였다면 그쪽을 받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네.”

“반대였더라도 마찬가지가 아니었겠습니까. 무엇이든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은 남게 마련이니까요.”

“그런가. 하긴, 모든 걸 가져갈 수 없다는 대원칙에는… 예외가 있을 리 없긴 하지. 아버지께서 직접 손대셨던 부분이니까. 거 참… 몇 번을 생각해도 참 대단하신 양반이야.”

“……”


사내는 한쪽 손으로 눈 언저리를 가리며 클클 웃는다. 잠시 뒤, 그의 웃음이 멎자 현우는 눈치를 한 번 살핀 뒤 슬며시 다른 화제를 꺼냈다.


“향후 계획을 추진하는 데 있어 제가 알고 있어야 할 새로운 것이 있는지 여쭙습니다.”

“음? 아, 그러고 보니 저쪽에 다녀왔던 이야기를 자네에게도 해줘야겠군.”


사내는 근원계로 넘어가 불천을 만났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현우는 몸을 앞으로 당겨 앉아 귀를 기울였다. 그가 모시는 주군은 짤막하게 압축된 말들을 툭툭 던지듯 내뱉는 화법을 즐겨 쓴다. 때문에 중요한 정보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상당한 집중력이 필요하다.


사내의 이야기가 끝나자 현우는 머릿속으로 내용을 정리해본 다음 재차 확인을 위해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억류하고 있던 영체를 돌려줌으로써 근원계쪽에 혼란이 올 것임은 예상했던 부분입니다만… 말씀하신대로라면 지금 저쪽에서는 은휘영 씨의 영체를 강제로라도 처리하려 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흠… 그렇겠지? 정황상 그때 사라져버렸다던 영체는 아마 그 아이에게 들어가 있는 듯하니… 뭐, 만에 하나 헛다리를 짚은 거라고 해도 그쪽에서 봤을 때 그 아이는 이미 규정에 어긋난 존재일 거고. 어느 쪽으로 보나 지금쯤 무슨 짓거리를 시도하고 있을지 훤하군.”

“그…렇다면 저희도 서둘러야 합니다. 마련해두었던 대안대로라도 일을 진행시키려면……”


현우의 말투에 긴장감이 묻어난다. 늘 차분함을 유지해오던 그였지만, 이번엔 다르다. 여러 대안을 준비해 두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휘영과 접촉이 가능할 때 성립하는 것들이다. 대상이 되는 존재 자체가 사라져버리면 아무런 소용이 없어질 수밖에 없다.


“아아, 안절부절할 필요 없어. ‘시도’하고 있을 거라고 했잖나.”

“……네?”

“말 그대로 시도만 할 뿐이지. 내가 아는 한, 저쪽에서는 그 아이의 영체를 강제로 처리할 수 없을 거네. …… 이유는 묻지 말게. 서운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자네한테도 알려주기 어려운 레벨의 이야기라서.”

“서운하다니, 당치 않은 말씀입니다. 주군께서 안배하신 일이라면 저는 그저 따를 뿐이죠.”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다행이고. 아무튼… 서두를 필요는 없네. 자네가 마련해둔 그 대안들은 앞으로의 상황을 보며 차근차근 진행하면 될 거야.”

“알겠습니다.”


이야기 하나가 끝나자, 여유로웠던 사내의 표정에 난처하다는 듯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다음 말을 꺼냈다.


“그보다, 자네를 급히 불러온 또 다른 이유에 관한 건데…” 

“말씀하십시오.”

“아무래도 그 놈의 처리 방향을 바꿔야할 것 같아. 아직 멀쩡하지?”

“네, 제가 손을 쓰지도 않았고, 특별히 문제가 있지도 않을 겁니다. 꽤 큰 규모의 흑막을 만들어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었는데, 제가 복귀하기 직전에 균열이 시작된 걸 보니 힘이 꽤 약화됐을 수는 있겠습니다만… 헌데, 무슨 문제가 있으십니까?”

“아, 별 건 아니고. 마지막으로 남겨뒀던 녀석의 상태가 좀 안 좋아졌거든. 만약을 대비한 백업용 샘플이 하나 더 필요해졌다고나 할까. 이미 없애버렸다면 모를까, 아직 남아있는 이상 아쉬움이 생기더라고.”

“그렇습니까? 하지만 이미 잔뜩 엇나간 놈인데… 과연 쓸모가 있을까요?”

“그거야 모르지.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외에 대안이 없지 않나. 어찌됐건 남아있는 건 그 놈 뿐이니까. 일단 신병을 먼저 확보한 다음 차근차근 알아내는 수밖에. 뭐… 원래 목적으로 쓰지 못하게 되더라도, 그동안 스스로 개척하거나 쌓아온 것들이 있을 테니 연구해보면 뭐가 됐든 얻는 게 있지 않겠나? 또, 만약 그 은 뭐시기 하는 아이와 함께 확보할 수 있다면 써먹을 구석이 더 있을지도 모르고.”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분부하신 바를 적용해 대안을 수정, 진행하겠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믿겠네.”


자리에서 일어선 현우는 허리까지 숙여 정중히 예를 표한 뒤 검은 방을 나섰다.






[명령을 처리할 수 없습니다.]

“뭐? …… 이게 무슨……?”


불천은 짙은 당혹감에 흠뻑 젖은, 불완전한 문장을 뱉어낸다. 화면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불안하게 떨린다. 출력된 문구를 보면서도 도무지 믿기지 않아 몇 번이고 되새긴다. 그동안 그는 다른 어떤 생각도 떠올릴 수 없었다. 오래된 기억 어느 곳을 더듬어봐도 도무지 겪어본 적 없는 무척 생소한 상황. ‘머릿속이 하얗다’라는 게 이런 기분일까.


해강현과 헤어져 명부 시스템이 위치한 공간으로 넘어온 뒤에도 불천은 꽤 오랫동안 머뭇거렸다. 태황과 나눴던 대화를 신중하게 복기해봤고, 오랜 친구와 나눴던 이야기의 한 구절 한 구절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두 사람의 만류에 어느 정도 마음이 흔들렸음을 인정하면서도 처음 품었던 계획을 소신껏 밀고 나가겠다 큰소리친 상황. 하지만 동시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겠다는 마음도 분명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명부 시스템을 이용해 한 번 내려진 명령은 돌이킬 수 없는 그야말로 절대적 명령. 때문에 그에 따른 책임 또한 무겁다. 게다가 영체에 부여되는 코드값은 매우 복잡하게 이루어져 있다. 실수로 단 한 글자만 틀려도 전혀 엉뚱한 존재가 억울하게 비명횡사해버리는 일이 생긴다. 


‘과거 이 시스템의 무서움을 모르던 시절에는… 종종 있던 일이지.’


물론, 저쪽 세상을 살다 온 무수한 영들의 기록을 살피다 보면 권리만 휘두르고 책임을 회피하는 사례를 수도없이 본다. 결정을 내린 이와 잘못됐을 때의 책임지는 이가 다른 경우. 그 때문에 근원계에 돌아와 무거운 벌을 받은 영도 부지기수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시스템 구조상 불가능한 일. 게다가 불천 자신도 그런 식으로 책임을 떠넘기는 걸 용납하는 성품도 아니다.


한 마디로, 매우 중대한 결정이고, 그만한 각오를 다지며 실행에 옮겼다는 의미다. 기억의 저 편에나 존재하던 ‘사라진 영’. 오랫동안 잊은듯 잊지 못한듯 어렴풋이 남아있던 데이터의 코드를 떠올리고, 한 글자 한 글자를 힘주어 입력한 다음, 혹시 코드값이 틀리지는 않았는지 몇 번씩 다시 봤다. 


그리고 나면 비로소 ‘강제 송환’ 명령을 내리는 일만 남는다.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그간 숙고했던 시간에 비해 턱없이 짧은 과정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결코 만만치 않다.


[코드값 승인. ‘강제 송환’ 명령을 실시합니다.]



[오류 발생. 시스템 안에 대상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명령을 처리할 수 없습니다.]


쉽지 않은 고민을 몇 번이나 반복한 끝에 어렵게 내린 결정이었고, 딱 그만큼 당혹스러운 결과가 지금 눈앞에 나타나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명부 시스템은 시초의 산물 중 하나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아무리 불천이라도 근본적 구조까지 속속들이 헤아리기는 어려울 정도로 방대한 원칙을 토대로 하고 있다. 오랜 시간 동안 쌓여온 예외처리 규정이라든가 돌발상황 대처법 등을 스스로 학습하며 진화해온, 그야말로 ‘살아있는’ 시스템.


‘그런 시스템 안에… 존재하지 않는 대상이라고…? 이걸 대체 어찌 해석해야 하는 거지?’


자가 학습 시스템이 미처 따라잡지 못할 만큼 빠르고 복잡한 과정이 이루어졌다는 걸까? 살아있는 생명처럼 스스로 많은 것을 찾아내고 진화를 거듭하는 유능한 시스템이, 그 오랜 세월 동안 발견하지 못할 정도로 기발한? 글쎄… 불천의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쉽게 납득하기에는 너무 희박하다. 생의 기억이 엄청나게 많이 누적된 영체라 해도 마찬가지. …… 그렇다면 역시……’


당황스러웠던 심경이 어느정도 추슬러지고 침착함을 되찾자, 이성과 지식이 제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불천은 조금 전 해강현과 나눴던 대화의 한 부분이 다시 한 번 떠올랐다.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을 존재. 그래, 애당초 그녀가 손을 썼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역시… 당신께서 뭔가 손을 쓰신 거라고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군요.”


불천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부터 모든 게 계획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상황이 변하면서 그에 맞춰 수정해나갔던 걸까? 아니면 조금 전 그가 찾아간 이후 급하게 이루어진 조치일 수도 있다. 불천으로서는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모두 가능성과 개연성은 충분하다. 


“저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무슨 까닭으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건지…”


고개가 절로 내저어진다. 여전히 오류 메시지가 출력돼 있는 화면을 잠시 바라보던 불천은 오래지 않아 등을 돌렸다. 그래, 인정하자. 가장 ‘신사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길은 이미 막혔다. 답을 찾을 수 없는 길에 더이상 미련을 두지 않기로 한다.


“하지만 저 역시… 분명 말씀 드렸습니다. 제가 옳다고 믿는 바를 행할 것이라고. 당신에 비해서는 한참 부족할지라도… 저 역시 적지 않은 세월을 허투루 보낸 건 아니니까요. 이번에 시도할 방법은… 어쩌면 그 친구 입장에서는 더욱 잔인한 일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당신께서 처음부터 계획하고 계셨던 것인지 아닌지는… 이제 상관 없게 됐습니다. 하지만 만약 처음부터 계획하신 거라면, 그 친구가 얼마나 가혹한 현실을 겪게 될 것인지도 모두 알고 계셨던 거라 믿겠습니다. 전지(全知)한 나의 주군.”


띄엄띄엄, 듣는 이 없는 혼잣말을 천천히 읊조린 불천은 다시 한 번 명부 시스템의 화면에 출력된 문구를 바라본 다음 그 공간을 떠났다. 






“…… 그래서, 너를 부른 거다.”

“…….”


말이 끝남과 함께 불천은 의자를 빙글 돌렸다. 백현은 공손한 자세로 시립한 채 말없이 고개를 반쯤 숙이고 있었다. 바닥을 향해 있는 시선. 그 눈빛에는 몇 마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심경이 드러나 있다. 그걸 눈치챈 불천이 말을 잇는다.


“강요하지는 않으마. 너에게도 그리 내키지 않는 일이라는 건 있을 테니까. 다만 내 관점에서 봤을 때 이 일의 최고 적임자가 너라고 생각했을 뿐이야.”


백현의 표정을 본 불천은 ‘어느 정도는… 네 책임이 있기도 하고.’라는 말은 구태여 붙이지 않았다. 이미 스스로도 깊숙이 책임을 통감하고 있으리라는 걸 그도 알고 있으니까.


강림팀장, 백현. 장난기 많고 다소 게으른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허술한 성격. 인도자 시절 업무 성과로 미루어보면 일처리가 꼼꼼한 편도 아니다. 서류 상으로 기록돼 있는 백현에 대한 평가다. 


실제로 한두 번쯤 만나본 뒤에도 그 뺀질거리는 가벼운 모습에 실망하는 이들이 간혹 있다. 하지만, 그를 여러 번 만나며 조금씩 더 알아가다 보면, 그 성격이 오히려 강점이라는 걸 알게 된다. 허술한 듯하지만 한두 번씩 있었던 실수들은 모두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거나 했던 것들이었고, 치명적이라 할만한 것들도 없었다.


단순히 그가 운이 좋았기 때문일까? 글쎄… ‘운의 영향이 전혀 없었다’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불천은 다르게 본다. 적어도 백현은 자신의 능력이 닿는 범위 내에서는 최선을 다하는 스타일. 스스로 해결하기 힘든 지경이 되면 덮거나 속이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시 상황을 빠르게 보고하고 깨진(?) 뒤, 다른 조치를 모색하거나 조언을 구한다. 즉, ‘매 상황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스스로의 운을 만들어 나간다’라는 게 백현에 대한 불천의 평이다.


백현의 침묵이 길어지자, 불천은 난처한 듯 다시 말을 꺼낸다.


“어려운 일이라는 건 안다. … 뭐, 내 입장에서 안다고 해봐야 당사자인 네 심정이 어느 정도일지는 차마 헤아릴 수 없다만.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사안이 너무 중대해. 그래서… 가능하면 이 자리에서 답을 줬으면 좋겠구나. 대신… 실행 여부는 언제가 됐든 네가 내킬 때 해도 된다.”


목석처럼 미동도 없이 서있던 백현이 비로소 고개를 든다. 눈빛에는 여전히 복잡한 심경이 드러나 있었지만, 조금 전에 비해 다소 옅어진 듯하다. 적어도 불천이 느끼기에는.


“이건 여느 때의 명령과는 다른 일이야. 그보다는 부탁…이라고 생각했으면 한다.”

“…… 부탁이라니요.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들려주신 이야기 내내 생각했습니다만,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은 없었습니다. 도리어 결정을 내리기까지 거듭하셨을 고민을 생각하면 감히 저로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라 생각할 따름이지요.”

“… 호오…?”


반 정도는 예상했던, 또 반 정도는 예상하지 못했던 답변이다. 그동안 봐왔던 백현의 성향이라면 당연히 이해할 거라 판단하긴 했지만, 어느 정도는 의문을 품을 부분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물론 의문을 품었지만 마음에만 담아두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불천의 시선으로 들여다본 백현의 속내는 100% 동의였다. 


“답을 드리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기꺼이 하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바가 있습니다.”

“현계에서의 능력 제한이겠지?”

“그렇습니다. 지난번 넘어갔을 때 제 힘을 측정해본 결과, 그 팀원과 비등한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간 현계에서 적응해온 시간을 고려하면 제 힘으로 그를 제압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뭐, 그랬었지. 네 녀석의 능력 타입과 수준을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솔직히 신기록을 세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이미 페널티의 수준이 정해진 이상 다시 넘어가더라도 상황은 같을 거고.”


백현은 입을 꾹 다문 채 답을 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기도 했으니까.


“별로 큰 문제는 아니야. 네가 그 일을 기꺼이 하겠다고 수락한 이상, 더 망설일 이유도 없지.”


불천은 허공에 손을 휘저어 화면을 하나 띄우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뭔가를 조작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한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백현은 갑자기 힘이 쭉 빠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니, 정확히는 뭔가가 그를 옥죄는 듯한 느낌이랄까. 한 번 겪어본 듯한 전혀 생소하지는 않은 느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익숙하다는 건 아니지만.


“불천님…? 이건……”

“아, 별 거 아냐. 한시적으로 네 소속을 현계로 바꾼 거니까. 저번에 설명해준 적 있었지? 실무 인도자들은 한시적으로 현계에 소속되도록 한다고. 그걸 너한테 적용했을 뿐이야. 걔네들은 오히려 근원계에 보고하러 넘어왔을 때 능력 제한 규칙을 적용받는 식이거든.”

“아……”

“그리고 혹시 오해할까봐 미리 말하는 건데, 소속만 한시적으로 바꾼 거지 강등시킨 건 아니다?”

“…… 그런 거였으면 안 한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랬으면 이 자리에서 나한테 뒤지게 맞았겠지.”

“……”


무겁게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다시 살짝 떠오른다. 진중해야 할 상황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불천은 어차피 사태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는 이상 쓸데없이 심각해질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의 농담을 받았다는 건 백현 역시 같은 의견이라는 뜻일 테고. 그렇게 생각하자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이 답답한 기분을 오래 느끼고 싶지는 않으니… 가능한 한 빨리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주면 나야 더 좋고.”

“그런데…… 한 가지만 더 허락을 구해도 되겠습니까?”

“뭔데?”


백현은 내내 마음에 담아두었던 우려를 꺼내놓았다. 미간을 찌푸린 채 그의 말을 들은 불천은 아주 잠시 생각에 잠겼지만 곧 시원스레 답을 내놓았다.


“너도 쉽지 않은 결정을 해주었으니 나도 그에 상응하는 보답은 해줘야지. 방도를 찾아보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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