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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경 Mar 03. 2024

나도 남편의 큰딸이고 싶진 않은데



  "여보, 아까 엄마도 잘 챙겼냐고 전화하더니 큰오빠도 카톡 보냈더라. 내가 그렇게 못 미덥나. 진짜 식구들이 그냥 쟤는 그런 애겠거니 그러려니 하나 봐."

  오랜만의 회동에 출발 전 준비물 제대로 챙겼냐며 확인해 보는 엄마와 큰오빠의 마음이 그냥 '노파심'이 아니란 걸 양심이 있는 인간인지라 충분히 알면서도 남편에게 투덜투덜했다.

  "나도 그러려니 하고 살아. 안 그러면 못 살아."

  "응?"

  남편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난 분명 들었다. 들었으면서 듣지 않았다. 되물으니 남편 역시 분명 말했지만 말하지 않은 사람처럼 아니라고 얼버무렸다.



  마음껏 과식한 배를 두드리며 이동하는 차 안에서 작은오빠가 큰아이 걱정에 한숨 쉬었다. 성깔과 고집부리는 걸 보면 아버지 생각이 난다고, 그래서 더 싫을 때가 있다고, 유전은 한 세대 건너서 발현된다더니 자기 아이에게 왔나 보다고 말이다. 오빠 이야기에 아버지의 싫은 점이 자기 자식에게 보일 때 얼마나 힘들까 공감하면서도 다른 지점에 꽂혔다. 진짜 유전이 한 세대 건너서 발현되나.



  "엄마나 딸이나."

  집에서 나오기 전 아침, 남편이 식탁 밑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양말을 주으면서 굳이 내게 시선을 꽂으며 말했다. 이 양말의 주인이 너렸다.

  "그거 내 거 아니야!"

  억울한 척 의기양양하게 말했지만 말하기 전 그 양말이 내 건가 싶어 슬쩍 훔쳐봤다. 오늘은 아니지만 다른 날들의 양말의 주인은 나이기도 했으니까.



  깔끔한 성격의 남편은 나를 만나 그 성격을 많이 내려놓았다. 그래도 나만큼은 아니어서 한 번씩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바닥에 이리저리 흐트러져 있는 물건들을 치운다. 그러면서 이 물건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니 집안을 어지럽힌 범인이 누구인지 추궁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난 근처에서 불안해하며 맴돈다. 한 무더기로 쌓여있는 짐들 사이에 내 것들도 있지만 어영부영 모두 딸의 짓인양 모른 척하기도 했다. '엄마나 딸이나'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은 무언의 발악이지만 남편이나 잼이나 나나 모두 알고 있다. 범인은 항상 정해져 있고 그 범인은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라는 걸.



  나나 잼이나 정신연령이 비슷하다는 건 나도 익히 알고 있는 바이긴 하지만 이렇게 남편에게 혼나는 위치에 딸과 함께 서게 되는 건 꽤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정작 잼은 자기가 혼나거나 말거나 엄마도 같이 혼나거나 말거나 관심이 없고 뻔뻔하고 당당하다. 그 뻔뻔한 당당함이 부럽지만 그런 뻔뻔한 당당함을 가질 수 있으려면 최소 서른다섯 살 이상은 어려져야 한다.



  아침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더니 엄마가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짓는 표정을 지었다. 네 남편 진짜 안 됐다 하는 표정, 어쩌다 이런 애를 만나서 하는 표정. 그 애가 엄마 애예요란 표정으로 응수했지만 소용이 없다. 지금은 내 남편을 힘들게 하지만 예전엔 엄마를 힘들게 했던 일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양말이면 양반이지. 너, 옛날부터 맨날 돈 아무 데나 던져놓고 엄마가 감춰놔도 모르고 오빠들이 가져가도 모르고."

  큰오빠도 지지 않고 대꾸한다.

  "그래, 네가 옛날부터 돈 개념이 없었지."

  "그래서 내가 이렇게 멀쩡하게 잘 사는 거야. 돈에 집착하지 않고 사니까 돈에 집착하지 않아도 되게 사는 거라고."

  저기요, 내 대답에 좀 관심 좀 가져주세요. 내가 하는 말은 모두 무시하고 엄마랑 오빠들이 내가 얼마나 예전부터 건성이고 정신없고 개념 없고 털렁뱅이인지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디 도망갈 데도 없는 차 안에 갇혀서 한참을 듣다가 어느 순간, 깨달았다. 이 이야기들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라 내 딸, 잼이어도 위화감이 전혀 없다는 걸 말이다.



  유전자는 한 세대 건너서 발현되는 거라며. 분명 아까 작은오빠가 그렇게 말했는데, 그래서 아버지 기질이 자기 큰애한테 갔다고 힘들다고 그랬는데. 이상하다. 우리 잼이는 내 윗세대에는 아무도 없을, 전후무후한 털렁뱅이인 나를 왜 이렇게 쏙 빼닮았을까. 어쩌다 너에게 내 유전자가 이렇게 몰빵 되었을까. 외모 닮은 것도 신기한데 이런 것까지 똑같을 건 뭐람.


 

  "엄마 닮아서 그래!"

  아직 듣지는 않았지만 언제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은 말이기 때문에 나는 잼에게 권위가 안 세워진다. 너나 나나 똑같은데 내가 뭐라고 애한테 올바른 길(?)을 안내할까. 이건 이렇게 정리를 하고 이건 바로바로 이렇게 하고 이건 똑바로 제대로 챙기고. 사실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나도 모르는데. 이런 상황이니 남편 앞에서 평등하게 혼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아, 이래서 내가 다들 남편이 큰아들이라고 할 때 나 혼자 남편이 내 아들이 아니라 내가 남편 큰딸이라고 하는 거구나. 그래도 주제 파악도 잘하고 양심도 있으니 남편이 미워하진 않는 것 같다.



  얼마 전 생전 하지도 않는 서랍 정리를 하다가 봉투에 들어있는 현금을 발견했다. 액수가 애매했다. 이게 내 돈일까 잼이 돈일까. 이 돈은 왜 봉투에 들어있는 걸까. 아무 데나 올려져 있다가 어찌 흐르고 흘러 내 서랍 안에 들어온 돈아, 너는 나의 돈이냐 잼의 돈이냐. 이럴 땐 시간이 필요하다. 그대로 찾는 자가 없다면 슬금슬금 나의 지갑으로 들어오겠지. 기왕 누구 돈인지 기억 안나는 거, 잼이 돈이라고 생각해야겠다.






잼 : 개학 하루 전, 발악하는 진짜 곧 초등 고학년

엄마 : 잼과 띠동갑.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띠동갑에서 한 바퀴 더 구른 나이에 잼을 낳았지만 잼과의 수준 차이는 한 바퀴를 빼야 한다.





사진: UnsplashOliver H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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