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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경 Jul 08. 2024

착하고 웃기고 이상한, 우리들의 이상형



  열두 살이면 사춘기가 시작될랑 말랑하는 나이인가 보다. 사람들을 만나면 잼이가 거실에 있는 시간이 많은지 방문을 닫고 혼자 자기 방에 있는 시간이 많은지 묻는다. 유행이 한참 지났다고 생각한 철판 아이스크림 만들기를 한다고 일요일 저녁 유난인 잼이에게 사춘기가 왔는지 척도가 방에 혼자 얼마나 있는지인가 보다고 하니 옆에 있던 남편이 그런다.



  "얜 사춘기 되어도 거실에 오래 있을 거 같은데? 내가 방으로 들어가고?"

  "뭔 소리야. 당신은 지금도 방에 들어가서 안 나오면서."

  "그렇긴 한데 좀 더 그러지 않겠냐는 거지. 아무튼 우리를 몰아내고 거실에 혼자 있을지도."

  "응, 내가 잼이 보고 한숨 쉬면서 방으로 들어가 버릴 수도."



  나중은 그럴지언정 지금 거실은 잼이와 나의 것이다. 창문형 에어컨까지 장착해 완벽해진 자기만의 동굴로 돌아간 남편 없는 거실은 오늘도 잼이와 나의 차지다. 거실에 펼쳐놓은 작은 상 위에 철판을 놓고 본격 아이스크림 만들기에 돌입했다. 잼이는 철판 위에 뿌려놓은 우유와 휘핑크림 위로 오레오 과자를 주걱으로 다다다 부시는 재미에 빠졌다. 주말 내내 할 생각도 안 하다가 갑자기 일요일 저녁밥까지 먹고 나서야 만들고 싶다고, 그런데 재료 사러 가기 싫다고 고민하던 잼에게 그럼 내일 하라고 했더니 그건 또 싫다고 하더니 슬그머니 사라졌었는데 분명 아빠한테 다녀온 게 틀림없었다. 남편이 신발 신고 나가는 소리가 들린 걸 보면.



  아빠가 사 온 재료로 만든 아이스크림 반죽을 철판 위에 평평하게 펴놓으면서 잼이가 친구 커플들 이야기를 꺼냈다. 친구들이 자기가 모쏠이라고 하면 놀란다고 하면서. 라떼는 모쏠이어서 놀라운 나이는 스무세 살 정도는 넘었던 거 같은데, 열두 살이 놀라운 나이라니 격세지감이 어쩌고 요즘 아이들이 어쩌고 한참을 늘어놓는데 잼이가 본격 연애 상담을 시작한다. 자기는 안 사귀려고 하는 게 아닌데 자기한테 고백한 애 중에는 마음에 든 애가 하나도 없었다고, 자기가 나름 이상형이 있는데 그런 애를 아직 못 봤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엄마 이상형이 뭐냐고 물었다. 이상형이라... 이런 질문을 받아본 게 도대체 얼마만인가. 기억을 끌어모아 대답해 본다.



  "음... 대화가 되는 사람, 가치관이 비슷한 사람."

  "외모 그런 건 없어?"

  "있지. 너무 키 안 크고 체격도 크지 않고 쌍꺼풀 없고~"

  "나도 키 큰 사람 싫어. 아니, 난 키 작은 사람이 좋은데."



  친구들이 내내 넌 왜 키 큰 남자를 안 좋아하냐고 신기해했는데 왜 내 딸도 그런가. 



  "내 이상형은 착하고 웃기고 이상한 사람이야."

  내 이상형은 관심 없었던 게 틀림없다. 자기 이상형을 이야기해 주려고 물어본 질문일 뿐. 어라, 그런데 착하고 웃기고 이상한 사람이라...



  "그거 너네 아빠 아니냐?"

  "응??"

  "너네 아빠 착하고, 아까도 너 철판 아이스크림 만들라고 나갔다 오고, 웃기고, 요즘엔 좀 덜 웃기긴 하지만, 그리고 이상하잖아."

  "어라? 나 왜 이상형 아빠냐??"



  생각지도 못한 결론에 어리둥절하면서도 아니라곤 말하지 못하겠나 보다.



  "야, 진짜 너네 아빠네. 너네 아빠 키도 작고, 크크크."

  "어, 진짜네? 아빠 키 작고 착하고 웃기고 이상하고. 왜 내 이상형 아빠냐??"



  그런데 잼이 이상형 설명은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설명이긴 했다. 착하고 웃기고 이상한 사람. 보통은 외모를 말하거나 나처럼 이야기하는데 말이다. 생각해 보니 내 이상형도 착하고 웃기고 이상한 사람이 맞는 거 같다. 그러니까 잼이네 아빠랑 결혼했지. 그런데 또다시 생각해 보니까 잼이가 날 좋아하는 이유도 이거 아닌가?



  "잼, 그런데 나도 네 이상형 아니냐? 네가 맨날 나 착하다고 하고, 웃기다고 하고, 이상하다고 하잖아."

  "어? 그러네? 엄마도 내 이상형이네? 뭐야."

  "어? 그런데 너도 착하고 웃기고 이상한데??"

  "아냐, 난 안 착해!"

  "너 정도면 착하지."



  서로 착하다고, 웃기다고, 이상하다고 칭찬인지 아닌지 모를 말들을 퍼부으면서 깨달았다.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이 착하고 웃기고 때론 이상하게 엉뚱해 보이고 그 모든 게 좋게 귀엽게 보인다는 걸. 귀여우면 끝난 거라는데 이미 끝난 상태에서 보면 그 사람이 착하면서도 웃기고 이상한데 그게 또 좋은 거 아닐까. 그리고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무장해제된 상태에서는 착하고 웃기고 이상하지 않을까.  뭐, 무장해제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이상한 건 우리 가족 특징인 거일 수도 있지만.



  이상해도 좋다. 그래도 밖에서는 사회의 일반적이고 멀쩡한 일원인 척은 잘하니까. 집에서는 언제든 마음껏 이상해질 수 있으니까, 그런 나를 그런 너를 서로를 좋아해 주는 내가 네가 있으니까. 가끔 방심해 밖에서 이상함이 삐져나가서 마음속으로 이불킥을 백 번해도 괜찮다. 그런 날에도 저녁에는 나의, 너의 이상형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오니까. 






잼 : 오늘도 밀린 숙제를 초치기하고 이제야 자려는 초등 고학년.

엄마 : 잼과 띠동갑.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띠동갑에서 한 바퀴 더 구른 나이에 잼을 낳았지만 잼과의 수준 차이는 한 바퀴를 빼야 한다.



사진: UnsplashWilliam War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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