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자면 난 잼이가 싫다고 말하는, 친구를 배려할 줄 모르고 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삐지는 그런 아이였다. 이기적인 데다 화까지 많아 친구들은 나를 무서워도 했다.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대단히 달라지지도 않았다. 아닌 척하는 스킬만 늘었달까.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랬다.
그래도 요즘엔 그전보다 사람 취급받으면서 살 수 있게 됐는데 이렇게 된 데에는 남편과 잼의 몫이 크다. 연애 때부터 조곤조곤 팩폭으로 나와는 다른 시각과 입장에 대해 생각하게 해 주던 남편과 아이를 함께 키우면서 조금은 신중해졌고 조금은 노력하는 사람이 되었다. 남편과 함께 저 꼬마 입장에서는 이 상황이 어떨까, 이 꼬마에게 이 상황에서는 어떤 말을 해줘야 할까, 그런데 요 꼬마에게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를 고민하며 아이를 키우다 보니 아이와 함께 조금씩 커나간 것 같다.
어제는 세상에서 태어나 제일 잘한 일이 아이를 낳은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 말에 부정적인 의견을 가진 지인에게 말했다. 나는 잼이가 주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어디에서도 받아보지 못했다고, 이런 관계와 이런 사랑을 알게 해 준 우리 잼이를 낳은 게 제일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그러자 그런 나와 잼이의 관계가 너무 잘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 아니겠냐고 했다.
모든 사람이 아이를 낳고 키우는 걸 행복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걸 알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이는 본인의 의지가 아닌 타인인 부모의 의지로 태어난 거 아닌가. 자신들의 욕심으로 아이를 낳고 잘한 일이 아니라고 하는 건 태어난 아이에게 실례가 아닐까. 부모의 의지로 얼결에 이 세상에 태어나 아침이면 일어나 아침밥 먹고 학교에서 싫은 소리도 듣고 힘든 관계도 겪다가 학원을 가서 공부를 하고 친구들이랑 조금 놀면 저녁이 되고 저녁밥을 먹고 숙제도 하고 게임도 좀 하고 그러다 보면 또 밤이고 깜박 자고 일어나면 또 아침이고 아침이면 일어나 아침밥 먹고 학교에 가는 일상의 무한루프에 빠진 이 불쌍하고 가련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에게 너를 낳은 게 세상 살면서 제일 잘한 일이라고 말이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닐까. 말은 안 하더라도 마음이라도 먹어야 하는 거 아닐까. 예전 부모들처럼 네가 누구 덕분에 태어났는데 따위의 마음이 아니라 부모가 자식에게 미안한 마음을 기본적으로 장착하고, 사랑하고 잘해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갑자기 나는 왜 이렇게 열변을 토하고 있는가. 나도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면서 잼에게 그렇게 잘해주지도 않으면서.
얼마 전 배우 이정은이 나오는 드라마를 보면서 아이에게 이정은 배우가 춤추는 장면을 보여줬다. 어쩜 저렇게 아줌마가 귀여울 수가 있냐고, 진짜 귀엽지 않냐고. 잼이도 귀엽다고 인정했다. 그래서 갑자기 냅다 잼이에게 선언했다. 저렇게 귀여운 아줌마가 되는 걸 목표로 삼아야겠다고. 그랬더니 잼이가 뭐라고 했을까.
"엄만 이미 귀여워."
아무도 안 날려주는 심쿵멘트를 딸에게 듣고 심쿵하는 나. 잼이 때문에 올라간 자존감으로 하루하루를 버틴다.
예전 힘든 날들에는 내가 잘해야지만 나를 사랑하는 그런 사람 말고 나를 판단하지 않고 그냥, 언제든 내 옆에 있어주는 사람을 떠올리며 힘을 냈다. 그때는 그런 존재가 남자친구였다. 괜찮아, 나한테는 그 사람이 있어. 그런 사람의 존재는 삶을 버틸 힘을 준다. 그 사람과 결혼해 그런 존재를 하나 더 얻었다. 너무 싫은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수치스러운 일을 겪었을 때, 힘든 일이 겹쳐 멘붕이 왔을 때면 잼이를 떠올린다. 순진무구한 얼굴로 "엄마"를 부르는, 엄마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잼이를.
이럴 줄 알기는 알았지만 이 글들에 결론이 없다. 글을 쓰면서 나나 잼이가 달라진 것도 없다. 그렇다고 이럴 줄 알았다고 해서 안 쓰지도 않았을 글들이다. 잼이와의 한 시절의 단순한 기록이지만 잼이와의 사랑이 담긴, 그 순간의 잊히지 않을 이야기들이다.
이번 기록은 여기에서 잠시 쉬기로 하자. 잼이가 엄마 귀여워를 반복하는 아이가 아닌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아이로 업그레이드 혹은 다운그레이드된 후에 다시 기록하기로 하자. 그 변화를 힘겹게 보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잼이가 지금까지 나를 사랑해 준 기억으로, 이 기록으로 버틸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이제는 내가 더 사랑해 줄 차례다.
잼 : 엄마랑 함께도 좋지만 혼자만의 시간이 꼭 필요한 초등 고학년.
엄마 : 잼과 띠동갑.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띠동갑에서 한 바퀴 더 구른 나이에 잼을 낳았지만 잼과의 수준 차이는 한 바퀴를 빼야 한다.
사진: Unsplash의Gabrielle Hender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