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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화구통을 숨겼다!

[11매]

by 이한얼






꿈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 자고 있을 때와 깼을 때의 사고와 판단이 확연히 다르다. 결정의 주체마저 그렇다. 이것이 마음과 정신의 차이다. 꿈에서는 마음이 동하여 말하고 행동하는 반면, 깨서는 정신으로 생각해서 말하고 행동한다. 꿈에서는 가슴 부분이 흔들리고 깨서는 머리 부근이 진동한다. 꿈에서는 훨씬 솔직하고 자주 놀라운 판단을 한다. 깨서는 꿈에서 떠올리지 못했던 것을 다양하게 고려하여 훨씬 ‘나은’ 결정을 한다. 꿈에서는 어리지 않지만 마치 어린 것처럼 행동한다. 깨서는 늙지 않았지만 마치 늙은 것처럼 행동한다. 꿈에서는 사람들과 있어도 ‘관계 밖의 나’로 존재한다. 깨서는 혼자 있어도 ‘관계 속의 나’로 사유한다. 마음은 꿈에서만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고 현실에서는 도통 나타나지 않는다. 정신은 깨서만 온전히 작동하고 꿈에서는 영 힘을 쓰지 못한다. 꿈에서 마음이 주체인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모습이지만 하자가 많다. 깨서 정신이 주체인 나는 하자는 많지 않지만 완전히 충족되지도 않는다. 어느 쪽도 나다. 어느 쪽도 내가 아니라 할 수 없듯이. 더 좋아하는 쪽과 더 필요한 쪽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반대쪽을 안 좋아하고 필요하지 않다는 뜻도 아니다. 마음은 총체적인 내가 방향을 잡고 나아가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다. 정신은 총체적인 내가 나아가는 동안 중심을 잡고 넘어지지 않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다. 둘이 싸워 이긴 쪽의 결정을 대체로 따르는 신체와,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그저 묵묵히 바라보는 영혼이 있다. 보통은 날뛰는 마음과 그 충동을 제지하는 정신. 보통은 숙고하는 정신과 그 우려를 발로 차버리는 마음. 늘 둘에게 끌려 다니며 고분고분하지만 둘의 갈등이 극에 달하면 최종 결정권을 가져오는 신체. 그리고 한 자리에 앉아서 이 모두를 아우르듯 지켜보는 영혼. 이렇게 넷이자 하나.


2025년 2월의 마지막 날, 방금 깨자마자 마치 닫힌 뚜껑이 열리듯 이 모든 것이 한 번에 기억났다. 나는 10년 전에 <그가 머물던 자리>로 마음과 정신과 신체의 관계성을 이미 정리해놨구나. 20년 전에는 미리 각각의 역할과 이름까지 정해놨구나. 2003년 내가 불안장애로 고통 받고 있을 때는 하나하나 인격이 부여된 이들이 나를 늪에서 끌어냈다. 2014년 내가 마음의 구멍에 빠져 두 다리가 모두 부러졌을 때는 용암이 흘러내리는 협곡에서 이들이 나를 업고 가파른 언덕을 올라갔다. 어쩌다 한동안 잊고 살았을까. 누군가가 ‘마음과 정신이 어찌 다른지’에 대해 물었을 때 ‘모른다’라고 답할 만큼 이 관계도는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나 보다. 생각 설계도를 담은 화구통이 책장 제자리에 꽂혀있지 않은 경우는 드문 일이라 생경하다. 물론 그 이유로 짐작 가는 바는 있다만, 뭐든 우울증 탓으로 돌리려는 것 같아 경계 중이다. 과연 우울증과 나태함 중에 어느 쪽 영향이 더 클까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우울과 나태는 서로를 잡아먹고 자라는 영구동력 같아서 어찌 다른가 싶기도 하다. 아니면 단순히, 누군가 들고 튀었을 수도 있지. 자신을 봐주지 않으면 종종 이렇게 중요한 것을 한동안 숨겨놓기도 하니까. 어느 쪽이든 이탈한 화구통에 대해 조금 더 숙고해보기로 했다. 숨긴 찬이가 먼저 달려와 ‘그놈의 생각 좀 그만해!’라며 엉덩이를 걷어찰 때까지.


마음의 이름은 찬, 정신은 휘, 신체는 수다. 영혼은 한얼이고. 셋의 돌림자는 ‘은’이다. 올해로 은찬이는 스물여덟, 은휘는 예순하나, 은수는 서른아홉이다. 한얼은 여덟(추정)이자 열아홉이고. 아마 한얼이 가진 두 가지 나이가 같아질 무렵 이 삶도 끝나지 않을까 싶다. 다르게 표현하면, 이번 삶이 끝나기 전에 두 나이를 같게 만드는 것이 인생의 목표 중 하나이기도 하고. 마치 나이테처럼 존재로서 한 계씩 자라날 때마다 먹게 되는 나이가 처음 스스로의 세계를 창세한 나이와 같아지는 날이 온다면 꽤 너른 만족 속에서 눈을 감으리라.


(여담으로 ‘한얼’은 한글 이름이다. 풀어내자면 ‘큰 정신’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나는 ‘큰 영혼’에 더 가깝게 해석하고 있다. 어머니께서 미리 어찌 알고 그리 지으셨는지 신통하다)





25. 02. 28.












<참고>


https://brunch.co.kr/@e-lain/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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