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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ile Aug 24. 2024

동거녀의 본부인

feat 2010년 쿠데타

그에게 여자가 생겼다.

그건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이 결혼은 어차피 기획된 만남이었고 그 만한 대가가 오갔으며, 이제 그 목적을 달성하였으므로 더 이상 유지될 만한 유인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으니까. 바로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이 결혼은 결국 내가 아니라 아빠와의 결혼이었기에, 아빠가 퇴임을 하고, 감옥에 가고, 가진 돈을 잃고, 점점 늙어가서 힘이 쇠약해 지자 그는 아빠를 본체만체했다. 그것은 곧 나에게 그렇다는 것이었다. 이 집안의 구세주이자 투자처였던 나는 단물만 쏙 빼앗긴 채 이 집안의 애물단지가 되어 상장폐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결국 이 결혼의 유지의 힘이 애당초 돈과 힘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것은 곧 젊음을 잃고 늙는다는 것을 의미했고 아무리 재벌가의 안주인이라는 이름을 가졌다고 해 봤자 실질적 영향력이 없는 퇴역 군인 같은 것이었으니, 그런 여자에게 충성할 더 이상의 군인은 없었다. 그러나 그에 비해 그에게는 돈도 힘도 더욱 많아지며 오히려 젊어지고 있었으니, 그는 이제 미국에서 만났던 최고 통치권자의 딸에게 겸손하고 수줍어하던 하급 장교 애송이가 아니었다. 게다가 아빠가 약한 틈을 보이자마다 반란을 일으키고 꿈꿔왔던 쿠데타를 시행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시한폭탄의 스위치를 누를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결국 폭탄은 터졌고 쿠데타의 밤이 찾아왔다. 이번에 그는 단단히 빠진 모양이었다. 이번 폭탄은 돈으로 단순히 수습할 수 있는 불길이 아니었다. 반란군의 딸이 되었을 뻔할 때 처음 느꼈던 불안감이 다시 엄습해 왔다. 이번 쿠데타는 비의 자리를 노리는 쿠데타가 될 것 같았고, 쿠데타를 당하는 입장이 어떠한 것인지 처음으로 절감했다. 반란의 수괴의 딸일 때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이미 결혼한 전력이 있는 베테랑이다. 아직 이혼도 하지 않은 유부녀와의 전쟁이라니. 그녀는 군인으로 치면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실전 경험이 수두룩한 베테랑 공수부대원 같았다. 그런 여자가 한 번도 어려움이 없이 평온하고 고요함 속에 화초처럼 자라온 나의 온실을 위협하고 있다. 이 온실은 높은 고지에 위치하고 있지만 사방은 포위되었고 곧 총알과 수류탄이 수없이 날아들 것이었다. 얇은 유리는 쉽게 산산이 조각날 것이었고 그 안의 키 가장 큰 꽃은 안 그래도 돌림병으로 시들해지고 있는데, 탄에 쉽게 두 동강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한 온실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아빠는 이제 거의 본인의 거동조차 어려워졌다. 수술과 퇴원이 반복되었으며 휠체어를 타고 기억마저 희미해진 전투력이 바닥난 옛 지휘관을 무서워할 옛 장교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더 화가 났다. 아무리 결혼이 기획되고 대가가 오고 간 것이었다 해도 그 당사자인 아빠가 아프자마자 배신을 일삼았다는 것이 그렇다. 이 결혼은 결국 내가 아닌 아빠와 한 계약이었고, 그 아빠가 힘이 없어지고 병들자 망설임 없이 아빠를 버리고 새로운 여자를 만나려고 떠나버린 것이 아닌가? 재벌은 결국 아내는 물론 자식도 소용없다는 것을 비로소 몸소 깨달았다. 이 분류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인종들에 속한 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내가 목적했던 계급, 돈, 그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목적하는 것과 타고나는 것은 차이가 있으니까. 나는 아빠의 엄호를 믿고 멋 모르고 총 한 자루 들고 적진에 뛰어든 군인 같았다. 그러나 엄호는 사라졌고 는 군인 하나는 우습게 처리할 수많은 경호원들을 그 대신 거느리고 있었다.


결국 이 쿠데타는 성공했다. 그런데 이번에 쿠데타를 당한 것이 나였고 나는 방어에 실패했다. 그녀는 전 남편과 사이에 아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뿐 아니라 그에게서 얻은 딸아이를 방패 삼아 청와대에 무혈 입성했다. 그녀는 있던 폭탄을 주저하지 않고 터뜨렸으며 나는 타오르는 불길을 잡지 못하고 불길에 오히려 휩싸였다. 그는 그가 가진 무기를 마음껏 사용하여 그녀의 이혼까지 성공시켜 결국 그녀를 없는 트로피로 복구해 냈다. 그녀는 보다 열다섯 살이나 어렸으며 나와는 달리 아빠의 어떤 도움도 없이 손쉽게 그를 스스로의 힘으로 차지하는 쿠데타를 멋지게 성공시켰다. 그런 쿠데타에 대해서 그는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라도 하기 위해 마치 나를 만난 것처럼 이야기했으며, 이제 같은 것에 전혀 목적이 없는, 대신 그에게만 향하는 사람을 위해서 자신이 그동안 잘못 살아온 같다며, 그동안 맺은 아빠와 또는 나와의 모든 계약을 부정했다.


나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반란군의 딸이 된 것도, 무기수의 딸이 된 것도 이 단단한 성이 있었기에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성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쿠데타를 당한 아빠의 원흉들이 모두 일어나 아빠와 나에게 쿠데타를 가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는 이럴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마치 내 자리가 쿠데타로 얻은 것인데 뭘 그렇게 당당하냐는 듯이, 자신도 똑 같이 쿠데타를 일으켰을 뿐, 성공한 쿠데타는 죄가 되지 않는다는 듯, 그만 항복하고 자리를 평화롭게 이양한 후 사형이라도 담담히 받아들이라고 마치 예전의 아빠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녀가 터뜨린 폭탄의 상처는 컸다. 아빠의 건강뿐 아니라 나도 치명상을 입어 유방암을 앓고 절제 수술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한 순간에도 그는 나 대신 여전히 그 여자를 돌보고 있었을 것이다. 수술에서 절제한 것은 그에 대한 나의 마음이었다. 그것이 증오가 되었건, 계약이 되었건 절제와 함께 그것도 사라졌다. 그 대신에 처음으로 아빠를 원망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왜 사람을 죽이고 쿠데타를 일으키고 대통령이 되었냐고? 왜 이런 결혼을 만들었냐고? 세기의 결혼이 아닌 세기의 사업을 잘못 벌인 아빠가 원망되었지만, 아빠는 이제 잘 알아들을 수도 없게 되었다. 게다가 세상의 난리에도 평온하고 고요한 삶을 누려온 내가 과연 그런 원망을 늘어놓을 수가 있을까? 계급이 올라가고 돈을 목표로 한 내게도 책임이 없는 것일까? 과연 신은 이런 나에게 뭐라고 하실까?


신에게 의지 하니 마음이 다소 누그러지고 편해졌다. 신은 마치 지금껏 아무 걱정 없이 평온하고 고요한 삶을 살아왔던 것에 대한 대가라도 내놓으라는 듯이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대가를 치르기 위해 이제라도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 치러야 할 대가는 이렇게 끝나지 만은 않을 것 같았다. 과연 그와 나 사이의 관계는 무엇이었을까? 그렇다 이 결혼은 기획되고 대가가 오고 갔다 해도 결국은 계약이었다. 그리고 그 계약을 어긴 것은 그뿐만 아니라 원인 제공자인 그의 동거녀였다. 나를 찾기 위해서라도 미뤄왔던 이혼 소송에 응해야 한다. 결국 배우고 익힌 것은 힘과 돈, 그 원천인 돈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힘이고 그것이 나를 찾는 길이라고 신은 전혀 말하지 않았지만, 군인이자 아빠의 딸로서 나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래 쿠데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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