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이쯤 되면 집안 곳곳에 훌륭한 미술 작품들을 걸어놓고 커피 한잔을 하며 흐뭇하게 작품을 바라보고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한국국제아트페어(KIAF)나, 화랑미술제, 그리고 각종 전시회와 미술관을 다니면서 작품 보는 안목을 키웠지요. 지금은 전시회나 미술관을 자연스럽게 넘나들지만 십여년 전만 하더라도 주말에 그림 보러 간다고 하면은 다소 고상한 취미생활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그만큼 순수하게 접근하기에는 미술관의 문턱도 높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작품을 보러 갈 때면 살 그림, 안 살 그림을 골라가며 신중히 고르곤 했었지요. 물론 그 작품을 살 여력 같은 것은 전혀 없었으므로 그냥 생각해 본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고른 작품만이 이미 쏙 팔려나간 것을 보면서 '누군가 보는 안목이 있군!' 이라며 보는 눈이 일치했음을 만족하곤 하였지요.
그래서 이런 책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언제가 읽었던 '가난한 컬렉터가 훌륭한 작품을 사는 법'과도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겠네요. 지난번 책이 외국 컬렉터인데 비해 이번에는 국내 컬렉터네요. 지난번 가난한 컬렉터 보다도 이번에는 훨씬 더 가난한 컬렉터 같아서 안심입니다. 지난번 컬렉터는 가난하다고는 말했지만 그 바닥에서 가난한 것이었지 인간계의 컬렉터는 절대 아니었거든요.
사실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기획'이라는 업무에도 도움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창조적 영감'을 얻기 위해서는 미술작품을 보러 다니는 것은 아주 좋은 기획의 고난이도 수련이라고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회사에서는 그렇게 고난이도의 창조적 영감을 필요로 하지 않더라고요. 창조적 영감을 쏟아부어서 작품을 만들어 낸다 해도 작품으로 걸리기는 커녕 한번 쓰고 버리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때 미술작품을 보며 얻은 창조적 영감은 이제 겨우 글쓰기에서나 가끔 써먹는다고는 할까요? 뭐 글들에 미술작품과 연관된 그런 창조적 영감을 한 스푼이라도 집어넣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기는 것이지요. 마법의 미약 같은 것이 작용했다라고요. MSG 조미료라 해도 괜찮습니다만.
그런데 이번에도 아무리 더 많이 가난한 컬렉터라고 해도 집에 작품을 걸 공간은 최소한 필요한가 봅니다. 층고가 높아야 하고 벽면이 넓고 깨끗하게 반질거리면 더욱 좋겠지요. 물론 컬렉팅 한 작품 수가 많아지면 따로 보관해야 할 창고 같은 것도 필요할 듯하네요.
그래서 집의 벽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아이고 그런데 작품을 걸만한 곳이 없네요"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폼)가 없냐"라는 영화 베테랑의 대사처럼 '돈이 없지 안목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작품을 걸 곳이 없지 작품을 보는 눈이 없는 것은 아니라니까요!'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 베테랑 중
컬렉터인 것처럼 미술품을 보러 다녔던 '가락'이 있겠다, 작품을 보는 '안목'이 있겠다, 이제 작품을 걸어둘 벽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넓은 벽이 있는 집을 사기 위한 돈만 있으면 되는 것이지요.
이미 반 이상을 이룬 것 같아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이 나이쯤 되면 집안 곳곳에 훌륭한 미술 작품들을 걸어놓고 커피 한잔을 하며 흐뭇하게 작품을 바라보고 있을 줄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