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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ile Nov 07. 2021

일요일 오전의 무도회

정오 12시까지는 돌아가야 해

'커피는 무도회에 가서 마셔야 하거든요'


좀 늦었습니다. 재빨리 평소 항상 마시던 커피를 대신하여 우유를 먹습니다. '커피는 무도회에 가서 마셔야 하거든요!'

그러기 위해서는 대략 1만 5 천보를 걸어야 할 듯합니다. 평소의 두배 지요. 하지만 주말이기도 하고 가을이기도 하니 의지가 충만합니다. 내일부터는 가을비가 내리고 겨울이 온다고 하거든요.


서둘러 집을 나섭니다. 왜냐하면 정오 12시까지는 집에 돌아와야 합니다. 무도회에 가는 신데렐라지요. 시간이 공교롭게도 같은 12시까지입니다. 다만 자정이 아니라 정오가 되겠습니다.


12시까지 돌아와야 하는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생쥐와 호박이 변한 마차를 타고 가는 것도 아니지요. 걸어갈 것입니다. 고로 드레스도 없어요. 그냥 평상복이지요. 마법사는 더더욱 없구요.

단지 정오 이후에는 햇살이 높이 올라와서 자외선이 강할 거라는 생각에서였지요. 코로나 시대 이전, 기내에서 봤던 '미드나잇 선'이란 영화가 갑자기 생각나는군요. 물론 영화에서처럼 햇빛을 피해야 하는 병 같은 전혀 없고 그래서 사랑에 빠질 일도 없지요. 단지 도시민의 지극히 소심한 생각일 뿐입니다.


'나무들과 낙엽들의 무도회'


도시민은 멀리도 못 갑니다. 서울 밖으로 웬만해선 나가지도 않지요. 그래서 선택된 건 '남산'입니다. 남산에서 열리는 무도회예요. '나무들과 낙엽들의 무도회'라고 해 두지요.

정해진 코스 같은 것도 없습니다. 그냥 서울 타워가 보이는 방향으로 발걸음이 내닫는 데로 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발걸음에 맞기고 나면 길을 자주 잃곤 합니다. 그런데 또 낯선 길을 좋아하지요. 길을 잃을 위험을 뻔히 알면서도 낯선 길을 나오면 피해 가는 것이 아니라 좋아라 그 길로 가고 맙니다. 그래 봤자 서울 안이지요. 오늘도 낯선 길을 택했다가 생각지도 못한 계단을 타고 있었지요. 그래서 올라가는데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이러다가 12시까지 돌아오는 게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만.


옷 차람은 평상복이지요. 무도회에는 등산복을 많이 입고들 오셨습니다만, 드레스를 좋아하지 않아서요. 산도 그냥 평지를 산책하듯 걷는 것을 좋아하지요. 등산복은 산에서 내려왔을 때 '나 산에 다녀왔다'라고 크게 붙이고 다니는 것 같거든요. 그러고 보니 자전거 탈 때도 평상복입니다. 평상시와 산에서와 자전거 탈 때의 경계가 없는 삶을 좋아하지요. 이 무슨 궤변일까요?

여하튼 그래서 오늘 의지할 것은 운동화 하나뿐입니다. 등산화도 아니고 조깅화에 불과하지만 평상시에 걷기와 산책을 좋아한 덕분에 발걸음은 빠르고 가볍지요. 그냥 언덕과 계단이 좀 있는 동네 마실이라고 생각하지요. 이래서 서울을 못 벋어나나보죠.


한쪽에서는 이미 술에 취한듯한 어르신이 "아 막걸리도 준비를 안 했어!"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십니다. 또 한쪽에서는 "막걸리도 준비 안 했다고 화가 많이 났구먼" 이러면서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산에 오르십니다. 

'그래 막걸리나 커피나 다 중하지요'

중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은 산 중턱에서도 게임에 열중입니다. 켜놓은 게임 소리가 산과 어울리지 않게 경쾌합니다. 막상 산을 좋아하는 것은 포메라니안 강아지였지요. 낙엽을 밟기도 하고 낙엽에 거의 뒹굴다시피 뛰어다닙니다. '너 가을을 좀 즐길 줄 아는구나!'


어느덧 땀도 좀 나는 듯 싶습니다. 포기하지 않게 목표를 다독이는 것은 꼭대기에 올라가서 먹을 '커피'이지요. 이번 무도회의 왕자님도 공주님도 아닌 유일한 당근입니다. 남산 꼭대기 타워 1층에 그곳에 있지 않을 법한 다소 어울리지 않는 스벅이 있지요. 역시 좋은 경치를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만 한 게 없지요.


'그래 저래서 초딩이지, 부럽습니다'


오늘따라 산 꼭대기에는 사람이 분비 었지만 내려오는 길은 고요합니다. 아직 일요일 오전 늦잠을 즐기고 있는 것이겠지요. 낙엽만이 바람에 이따금 흩날리는 게 마치 눈이 내리는 듯 기분을 설레게 하네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소녀는 떨어지는 낙엽을 공중에에서 잡겠다고 껑충껑충 뛰어오르기도 합니다. 아마 잡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눈처럼 손에서 녹아내렸을 수도 있겠네요. '그래 저래서 초딩이지', 낙엽이 내리는 걸 좋아라 하면서 껑충껑충 뛰면서 기뻐할 수 있는 모습이 부럽습니다. 어른들은 내리는 낙엽을 맞으며 과연 기쁘게 다시 뛸 수 있을까요? 어른이 되고는 불가능한 일일 것 같기는 합니다만 생각해보면 가능했던 적도 있었네요.

바로 사랑에 빠졌을 때이지요. 내리지도 않는 낙엽을 스스로 뿌리며 나잡아 봐라 뛰던 모습이 기억에 선합니다. 다시 그 모습을 기대하기란 불가능하겠지만 말이지요. 


오르는데 헤매며 시간을 많이 썼더니 12시까지 도착하기가 쉽지 않을 듯합니다. 돌아오는 길임에도 쉴틈이 없이 발걸음이 여전히 빠릅니다. 은행잎 같이 작은 낙엽들이 하늘에서 눈처럼 나린 다면 플라타너스 큰 낙엽은 거의 축구공 크기 인체로 바닥에 그득합니다. 그 큰 잎사귀 하나가 머리로 툭 떨어져서 맞았더니 거의 헤딩 수준입니다. 어이없는 충격에 초딩처럼 웃음이 나옵니다.

또 은행잎은 사뿐히 지려밟고 왔다면 플라타너스 낙엽들은 발에 걸려 거의 낙엽을 차면서 걷지요. 그것도 꽤 재미있습니다. 개들이 휴지 뭉텅이를 마구 흩뜨려 놓고 발길질하며 왜 좋아하는지 알 것도 같습니다. 길바닥에 낙엽이 한가득 어질러져 있는 것이 그런 모습이었으니까요.


'무도회가 끝나고 겨울'


신데렐라가 그랬듯이 언제나 시간은 거의 딱 맞거나 조금 모자라는 법이지요. 그래도 거의 12시 남짓 도착한 듯하네요. 풀릴 마법 같은 것은 없지만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야지요. 드디어 일요일 오전의 무도회는 끝났습니다.

가을 낙엽을 뒤로하고  앞으로는 추운 겨울 마녀와 싸워야 할 것 같습니다. 벌써부터 오싹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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