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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룬 Oct 21. 2021

필통 구경

쓰기의 이로움

   공부의 시작은 ‘다짐’과 함께다.

새잎과 함께 맞는 새 학기, 방학 끝의 새 학기, 시험 준비 기간 돌입, 시험을 망친 직 후. 비장한 다짐은 수시로 일어나고 다짐의 실현은 귀엽다.

   빨간색 느낌표를 쾅쾅 찍은 포스트잇이 책상 앞에 붙거나, 한 나절은 걸려 책상 정리를 한다. 폰 배경을 무심한 무채색으로 설정하고, 간식 금지 선언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열공모드 필통 세팅이 있다.


  “이번 콘셉트는 블루예요. 기본 필기는 편하게 제트스트림 3색으로 정하고, 색연필이랑 형광펜도 새로 샀어요. 샤프도 바꾸고요. 쌤, 이 샤프 좀 보세요.”

  “우와, 그렇게 쨍한 파란색 샤프를 어디서 샀어? “

  “초등학교 앞 문방구요.”


  “3색 볼펜은 계속 0.35? 쌤은  화이트 위에 쓸 때 찢어져서 이제 0.5만 쓰는데.”

  “당연하죠. 필기는 무조건 제일 얇은 펜으로 해야 돼요. 리필도 넉넉히 샀어요.”


  “쌤, 좀 안 번지는 연필 없어요? 샤프 찍찍 소리 너무 싫은데 연필은 번져서 지저분해지니까. 영어 교과서는 왜 이렇게 종이가 미끄러워요?”

  “B 말고 H 심으로 쓰면 덜 번질 텐데, 대신 흐려. 그러지 말고 차라리 볼펜을 써보지?.”

  “놉. 볼펜 똥!”


   “이것 봐요, 쌤. 핵심 단어에 이렇게 형광펜을 하고, 이 펜으로 형광펜에다 테두리를 해주면, 엄청 예쁘죠?”

   “예쁘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공들여서 강조할 단어 맞는 거지?”

   “한 페이지에 다섯 개를 넘기지 않을 거예요. 너무 많이 하면 없어 보이니까.”


   “필통 바꿨네?”

   “이번에 펜이랑 다 싹 바꿨는데 전부 안 들어가서요. 알파에서 세뱃돈 남은 거 다 썼어요.”

   “나, 구경할래!”


   필통 세팅을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은 있겠지만, 한 번만 해본 사람은 없다. 뭐가 들었는지 뻔히 아는 내 필통도 즐거운 물건이지만, 책상 위에 놓인 아이들의  필통을 구경하는 일은 정말 즐겁다. 필기도구를 애정하기 때문이기도 하나, 책상 위의 필통은 아이들의 일면을 보여준다. 우리는 쉽게 대화한다. 펜은 큰 일을 한다. 아이들은 내가 열광하는 걸 알고는, 필통 새 식구 소식을 꼬박꼬박 전해주었다.


   학생들의 묵직한 필통을 열어보면.

수업 설명을 받아 적는 기본 필기펜 - 주로 검빨파 3색 볼펜, 취향에 따라 펜 두께 다양하다. 나중에 자기만의 방식으로 다시 정리하는 학생이라면 수업 중 바로 필기는 샤프나 연필로 하고 보통 2H 나 2B의 연필심과 샤프심이 주로 쓰인다. - 수정 테이프 ( a.k.a. 화이트), 지우개와 작은 연필깎이, 샤프심. 강조할 때 사용하는 형광펜( 형광색 아닐 수 있음 주의). 핵심 키워드를 표시하거나 기본 필기펜을 보완하기 위해 다른 굵기, 다른 컬러의 펜들. 혹은 채도 차이로 중요도를 구별할 수 있는 펜 몇 개. 네임펜 (여러분, 뚜껑식이 아닌 후크식 네임펜이 나왔습니다!), 채점용 돌돌 색연필 (요즘 학생들은 일부러 뽀로로 내지는 겨울왕국 색연필을 찾는다구요) 얇은 자와 칼, 인덱스용 포스트잇까지.

이 정도가 기본이다.




 

  물론 필통이 없는 학생도 있다.

바지 주머니에서, 가방의 앞지퍼에서, 옆 자리 친구의 필통에서, 쌤의 펜꽂이에서 손에 잡히는 걸 꺼내 쓰기도 한다. 해당 학생들은 전혀 문제가 없다고 여기지만, 내 눈엔 당면과제인지라…….


  “학생... 무지개 색연필을 아십니까”

  “아, 귀찮아요. 그냥 연필로 밑줄 그을게요.”

  “그런데 거기에 무지개 색연필이 딱 들어가면 강조가 더 잘 되고, 무채색 필기에 새바람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학생! 지금 손 들면 쌤이 하나 드립니다.”

  “깎아야 되잖아요.”

  “AS 가능, 올 때마다 깎아 드립니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삼십 년 동안 연필을 깎아온 사람으로서.”


   우습지만 종종 있는 일이다.


   다채로운 펜들이 활보하는 필기를 보고, 쓸데없는데 힘쓴다고 타박하는 어른도 있다. 그런데 그마저 하지 않고 수업 시간에 팔짱을 끼고 앉은 가만한 학생을 보면 생각이 달라지기도 한다. 펜은 긴 손가락을 뽐내며 멋있게 돌릴 때만 쓰는 도구로 여기고, 곁눈으로 훑기만 해도 대단한 정보처리 능력으로 기억할 수 있을 거라 큰소리치는 학생들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은 언제나 그렇게 힘차게 일하지 않는다.

   시험 기간이 가까워지면 주관식 답안지의 비극적 결말이 예상되므로 한 번씩이라도 직접 써보라고 겁을 주면서, 마지막까지 단 한 자루로 여러 역할을 해낼 수 있는 무지개 색연필 영업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강요와 권유 사이에서 줄을 타며, 학생 앞을 지키고 선 귀찮음과 싸우며 쓰기의 이로움을 강력히 외친다. 실은 작은 소리로, 여러 번, 예민한 시절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하는데, 마음으로는 두 팔 벌려 큰 소리로 외침과 다름없는 작전 수행이다.      


   오감을 동원한 공부가 효율적이다.

눈으로 읽고, 입으로 소리 내고, 그 소리를 자기가 들으며 공부하면 그 내용은 적어도 세 번 이상 반복되는 중이다. 교과서나 교재마다 조금씩 다른 책장의 질감과 그 위에 흘리는 펜의 잉크 냄새까지 수업 중 자극이 될 수 있다. 어떤 날은 공부 환경의 수많은 정보가 더욱 어우러져 온 몸을 관통하며 반복된다. 그러니 샤프나 연필 한 가지 말고 다른 펜도 골라 들고, 적어 보고, 그려도 보라는 말은 어떻게든 반복되고 흔적을 남겨보자는 말이기도 하다. 지금도 알차고, 나중에도 도움이 될 수 있게 말이다. 읽고 중얼거리기는 자발적으로 자주 하는 학생들 중에도 유독 쓰는 방식에 곁을 주지 않는 아이들이 있다. 귀찮음이 이렇게나 높고 두터운 벽이다.


    ‘쓰는 일’ 은 학생에겐 놀이로 시작된다. 그리고 이렇게 저렇게 쓰는 데 재미가 생기면 아이들은 수업 시간에 필기를 시작한다.

   수업 중 필기란,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이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한 자신의 상태를 파악하고 남길 부분과 버릴 부분,  놓친 부분까지 구별해 기록하는 것이다. 강의 중인 선생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의 필기가 완료될 때를 기다려주는 법이 없으므로, 학생은 주어진 시간 내에 자신이 가진 어휘(한글, 영어, 제3외국어, 각종 기호 포함) 중에서 핵심을 담을 표현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찾아낸다. 강조되는 내용에 어울리는 표시가 필요하고 어려웠던 내용은 다시 꼼꼼하게 보기 위해 구별해 기록해야 한다. 설명하던 선생님이 ‘이런 건 정말 중요하지~’ 했다면, 시험에 나올 확률이 높아지니 형광펜 출동이다. 수업 중 필기란, 분주하기 이를 데 없는 데다 잠시라도 다른 생각을 했다가는 놓쳐버리는 일이다. 수업을 듣고 있지 않다면 펜 끝을 어디에 둘지 모를 일이니, 적어도 부지런한 필기는 적극적인 수업 참여의 증거다.


   복습의 시간, 바로 이 수업 중 필기가 빛을 발한다.

너무 깨끗해서 도난의 위험이 1도 없는 교과서보다, 부지런한 기록이 가득한 교과서가 최고다. 새 책은 언제 보아도 새롭지만, 생생한 수업 시간으로 데려다 줄 포트키가 된 교과서라면 시험 대비도 더 이상 두렵지 않다. 구별된 밑줄과 표시들은 어디서부터 공부를 시작할지 알려주는 나만의 안내자다. 공부할 내용이 아무리 많아도 매끄럽게 빠져나갈 탈출구를 만들어둔 이가 바로 과거의 자신이 된다. 그 든든함을 경험하면 다시 부지런한 수업시간으로 돌아가는 일이 자연스럽게 된다. 기록과 정리는 지극히 개인적인 기술인만큼, 반복하고 익숙해지면서 각기 다른 수업 속도에 맞춰, 자신만의 약자나 기호를 암호처럼 만들어 효율을 높일 것이다. 이로운 기술이 실력에 기여하게 된다.  


   묵직한 시험 범위와 여러 시간에 걸친 수업 내용은 정리를 거듭하면서, 가벼워진다. 문장 부호를 떨어내고 긴 문장은 단어의 나열이 된다. 살아남은 단어들은 상황과 맥락에 따라 선택되었기에 핵심을 담는다. 전체 구조를 파악하고, 표나 그림을 이용해 한눈에 보기 쉽도록 정리하는 기술은 어른이 되어도 두고두고 유익하다. 손 끝에서 길들여진 다양한 필기 기술은 자신만의 고유한 형태로 숙련된다. 자신만의 필기 방법이 있다면, 자기만의 공부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런 학생은 아마도 자기만의 걷는 법, 자기만의 생각하는 법, 자기만의 사는 법을 가질 것이다.


   결이 좀 다르지만 필기와 쓰기가 익숙할 때, 뜻밖의 유익은 내놓는 결과물의 미감에 기여한다는 사실이다.

수행 평가나 주관식 답안지를 보았을 때, 채점자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답안지 전체에서 드러나는 단정함이다. 쓰는 일이 익숙하지 않은 학생들은 답지에 마련된 선을 무시하고 아래 윗 칸을 무질서하게 넘나 든다.

   띄어쓰기가 중요한 영어 주관식의 경우 단어 간 띄어 쓴 폭이 들쭉날쭉하면 중간에 빠진 단어가 있을 거라 의심하게 된다. 알파벳 o와 e를 답안지에서조차 흘려 쓰거나 앞 철자에 찰싹 붙여 쓰는 것은 채점자의 눈을 더욱 피곤하게 만든다. 학생 스스로 실수를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답안지에 적어둔 문장은 머릿속에선 정답이었을지 몰라도 제대로 평가받을 기회를 잃는다. 이런 일은 정말 흔하다. 부분 점수라도 주고 싶은 답지가 있는 반면, 틀린 것을 실수로 맞았다 채점하게 될까 오히려 눈을 더 부릅뜨고 마는 답안지도 있다. 캘리그래피를 하듯 멋진 필체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쓰는 일이 익숙한 학생들은 의식하지 않아도, 써 내려간 글자들이 자신의 의도를 잘 드러내는지 살필 줄 안다. 전체적인 균형을 가늠하는 시선을 갖는다.



   이렇게 이로움이 가득한 '쓰는 일'이 어디서부터 시작하는지 떠올려보시라. 필통이다. 학창 시절 마음에 드는 펜을 골라 잡는 즐거움에서 시작한다.


   돌돌 풀어내는 색연필을 꼭 쥐는 어린이, 용돈이 모이면 폼나는 샤프를 사고 싶은 아이, 필통에 쏙 들어가는 지우개 청소기를 찾아 헤매는 학생, 볼펜은 삼색이어야 하고 샤프는 제도여야 하는 수험생, 펜을 살 때면 리필 심도 세 개씩은  구매하는 어른에 이르기까지 ‘펜심’을 가진 모두는 쓰기를 즐기는 사람들이다.


  펜은 기록하고, 기록은 기억을 연장한다.

필통이 가득 찬 학생을 우리끼리는 펜 부자라 부르는데, 그들이 누릴 풍요로움은 가득 찬 필통을 넘어설 것이다.  


   오늘의 펜 덕분에, 아이들은 결국 자신만의 사는 법도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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